## 348화
낯선 남녀는 잠시 노르웨이어로 들리는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내가 다가서자 제대로 날 봐 주었다.
남자 쪽이 앞으로 나섰다. 큰 키에 말쑥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물었다.
“러시아분이십니까?”
꽤 유창한 러시아어였다. 혹시 영어로 대화해야 하나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었는데, 안심했다. 난 편안하게 대답했다.
“예, 맞아요.”
“이 배 하르당에르 피오르 유람선 맞죠?”
그 질문엔 편안하게 답하지 못했다.
이 배의 목적이 하르당에르 피오르를 쭉 따라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것이긴 하지만, 한눈에 봐도 이 남자는 이 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난 친절하게 대답했다.
“이 배는 이곳의 유람선이 아니에요. 러시아에서 왔거든요.”
“뭐라고요? 배가요……?”
황망해하는 그를 보며 난 이 배가 러시아 무스만스크에서 왔음을, 그리고 나와 오케스트라는 이 배를 타고 피오르를 돌며 선상에서 리허설을 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일반 관광객을 위한 배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아니, 그렇다면 이 배의 주인 되십니까?”
“제 아버지가요.”
“아, 이럴 수가……. 잠시만요, 불법 승선했다는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해요. 타티아나라고 불러 주세요.”
“그, 그래요. 타티아나. 지금 설명을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정말 듣고 싶었다.
“예. 듣고 싶어요.”
“후.”
앨런 칼센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는 옆에 있는 자신의 아내인 아네트 칼센과 함께 신혼여행으로 하르당에르 피오르에 관광을 온 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직접 보라면서 자신의 티켓을 보여 주었다. 티켓엔 그가 타야 할 배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별과 바람이라는 꽤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문제는 그 이름이 바로 이 배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앨런이 원래 탔어야 하는 배는 배 옆면에 노르웨이어로 적혀 있었고 이 배는 러시아어로 적혀 있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러시아 음악원에서 유학을 해서 러시아어에 유창한 앨런은 이 배의 이름을 읽어 버리고는 자신이 타야 할 배인 줄 알고 올라타 버린 것이다.
난 이런 일도 있구나 싶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하……. 아, 웃어서 죄송해요. 칼센.”
“웃을 만도 하죠……. 그래도 실수에서 비롯된 오해라는 걸 믿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타티아나.”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쩐지 티켓을 보여 주려고 했더니 승무원들이 바이올린만 슥 보고는 그냥 들어가라고 하지 뭡니까? 뭔가 너무 고급 유람선 같기도 하고…… 그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느끼긴 했는데…….”
승무원들이 앨런을 그냥 들여보내 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저 케이스만 보고는 조금 늦게 온 오케스트라 단원인 줄 알고 통과시켜 준 것이다.
나야 단원들의 얼굴을 전부 알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보자마자 수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오늘 처음 보는 승무원들이 보기엔 악기만 들고 있으면 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앨런이 그냥 탄 것도, 승무원이 그냥 통과시켜 준 것도 있을법한 일이라서 재미있게 생각하는 와중,
난 창밖으로 지나가는 배를 보고는 앨런을 불렀다.
“저기 저 배 혹시…….”
“망할.”
혹시나 해서 말해 봤는데 앨런이 배 옆면의 글자를 보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원래 저 배에 탔어야 했던 것 같다.
앨런은 다시 아네트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한숨을 푹 쉬며 내게 말했다.
“후, 정말 미안합니다. 어쨌든 이제 확실하게 상황파악을 했으니 나가야겠는데……. 타티아나. 정말, 정말 큰 실례지만 배가 출항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가능하다면 배를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 바로 내리겠습니다.”
“예?”
그는 죽을죄를 진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 사과하며 말했다. 나보다 한참이나 큰 그의 키가 작게 보일 지경이었다.
“제가 마음 같아선 당장 바다에 뛰어들어 부두까지 헤엄쳐 가고 싶은데, 악기를 들고 있어서…….”
“아, 악기를 바닷물에 적실 순 없죠.”
“그러니 혹시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저희를 내려 주시면…….”
사실 사정을 듣자마자 마음이 기울어 있긴 했지만, 너무 진지하게 미안해하는 모습과 그러면서도 악기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을 정했다.
“아뇨.”
앨런은 뭐가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난 분명하게 다시 물어보았다.
“칼센. 원래 아내분과 함께 하르당에르 피오르를 관광하려고 하셨던 것 맞죠?”
“그렇죠.”
“그럼 그냥 저희와 함께하셔도 괜찮아요. 원래 타려고 하셨던 배는 이미 떠났잖아요?”
“!”
내 제안에 그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에 기쁨과 부담감 등의 감정이 혼재되어 스쳐 지나간다.
약간 고민하던 그가 다시 내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타티아나. 모두 제 실수인데요?”
“저희 측 승무원 분들도 칼센이 악기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확인을 제대로 안 했으니 실수가 있다고 해야겠죠. 만약 배를 돌리면 그분들도 문책을 당할지 몰라요. 전 그런 걸 원하지 않으니 협조해 주시겠어요?”
“혀, 협조요?”
“예. 두 분을 제 손님으로 초대할게요. 괜찮으시겠죠?”
배를 잘못 타거나 확인을 안 한 건 꽤 큰 실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실수가 아니게 만드는 것으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하고 싶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배는 두 명이 아니라 스무 명 정도는 얼마든지 더 태워도 될 만큼 컸으니까. 신혼여행을 온 두 사람을 도로 돌려보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앨런은 그래도 부담이 되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타티아나……. 그래선 너무 미안합니다. 저희는 이런 배에 초대받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고요.”
“왜 안 되나요. 오늘 이 배는 악기를 가지고 계신다면 누구나 환영이에요.”
정말 내 마음대로의 기준이긴 하지만, 자신의 악기를 든 노르웨이의 음악가를 초대하는 건 즉흥적이긴 해도 괜찮은 일인 것 같았다.
내가 환영한다는 의사 표현을 다시 하자, 앨런은 돌아서서 아네트와 상의했다. 아네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노르웨이어로 내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알아듣지 못해도 그 뜻은 충분히 느껴졌다.
“좋아요.”
이제 앨런과 아네트는 내 손님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책임지고 설명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등을 돌리자마자, 빅토르와 눈이 마주쳐서 소리를 질러 버릴 뻔했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거예요!?
빅토르가 물었다.
“아가씨. 누굽니까? 저 사람들.”
“……제 손님이에요.”
“예?”
“설명해 드릴게요. 빅토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차분히 그에게 설명했다.
빅토르는 내 설명을 다 듣고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옆머리를 꾹 눌렀다. 아무래도 경호원인 그의 입장에선 보안상 문제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는 이 상황이 달갑잖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이미 손님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빅토르도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제가 따로 이야기는 좀 해 봐야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그리고 빅토르는 앨런과 아네트를 데리고 복도 저편으로 갔다. 바이올린 케이스도 열어 보고 하는 것을 보니 정말 만에 하나 위험한 사람은 아닌지 검사하는 것 같았는데, 저런 모습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가서 말을 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난 앨런의 첫인상을 보자마자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문제없군요.”
그 확신은 현실로 증명되었다. 빅토르의 확인이 끝났다면 완벽히 믿을 수 있다.
약간 기분이 좋아져서 웃고 있는데, 빅토르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선장을 만나러 가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승무원에 대해 한 소리 할 것 같아서 난 손님들을 태운 것이니 너무 크게 문제 삼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빅토르는 내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면서 결국 웃어 주었다.
빅토르를 설득하고 자신감을 얻은 나는 앨런에게 말했다.
“객실로 가죠. 인사시켜 드릴게요.”
“오케스트라가 있다고 했었죠?”
“예.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예요.”
그 말에 앨런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난 일단 객실로 앨런과 아네트를 안내했다.
“타티아나, 어디 갔다 오…….”
크리스티나가 날 부르다 말고 뒤에서 따라오는 두 사람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낯선 사람에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정반대의 이유로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앨런 칼센??”
바이올리니스트 미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그 반응에 나도 깜짝 놀랐는데, 앨런은 별로 당황하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미샤, 오랜만이야. 10년 쯤 됐나?”
“우리 졸업한 지 5년밖에 안 됐어.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앨런.”
앨런은 10년이건 5년이건 무슨 상관이냐는 듯 히죽 웃더니 다가가서 미샤와 악수를 나누었다. 미샤는 정말 반갑다는 듯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네가 노르웨이에서 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사실 못 만나는 게 정상이었는데, 내 멍청한 짓과 타티아나의 도움이 이 자리를 만들어 냈군.”
“타티아나가?”
미샤가 아직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날 바라보았고, 곧이어 앨런의 설명을 듣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고맙습니다. 타티아나. 이 녀석 조금 바보 같긴 해도 이상한 놈 아닙니다. 같은 음악원 다닌 제가 보증하죠.”
앨런이 유학했다는 음악원도 미샤와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이었던 것이다. 음악원을 졸업한 지 꽤 시간이 지난 두 친구가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난 이 재회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다른 단원들도 모두들 각각의 방법으로 축하했다.
“미샤, 네 보증을 어떻게 믿어? 난 내가 음악원 다닐 때도 널 본 적이 없어서 네가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다닌 게 맞긴 한지 의심이 갈 지경인데. 음, 그런데 저 친구는 학교 다닐 적에 본 것 같기도 하고.”
“난 기억 날 것 같아.”
“자자, 어쨌든 환영합니다. 칼센. 옆의 분은 아내분이신가요? 아내분도 음악가이신가 보군요?”
친해지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모두들 당장 회포를 풀기 위해 술이라도 마시러 가자고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앞으로 할 일이 많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 같다.
시끌벅쩍해진 모두를 두고 크리스티나가 내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길래 깜짝 놀랐어…….”
“후후, 괜찮겠죠?”
“괜찮아 보이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했다고 하니까 뭐.”
그녀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두 명을 더 태우고 여객선은 하르당에르 피오르를 향해 나아갔다.
“피오르는 우리나라 말로 내륙 깊이 파고든 만이라는 뜻입니다. 빙식곡이 만든 긴 골짜기에 바닷물이 차서 만들어진 만이죠. 대체 볼거리가 뭐가 있겠나 싶겠지만 배를 타고 들어가는 데 양옆으로 펼쳐진 산과 작은 마을들이 꽤나 볼 만한 편입니다.”
앨런은 마치 현지인 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노르웨이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의 설명을 꽤 귀 기울여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알아 가야 하는 우리 입장에선 노르웨이인인 앨런의 설명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잠깐, 와이프에게도 설명 좀 해 줘야 해서.”
그리고 앨런은 아네트에게도 빠짐없이 창밖에 지나가는 것들을 노르웨이어로 설명해 주었다. 보아하니 앨런은 이곳을 잘 알고, 아네트는 처음인 모양이었다. 노르웨이인이라고 해서 베르겐과 피오르를 모두 아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앨런이 러시아어와 노르웨이어를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고, 우리 역시 노르웨이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며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는 와중이었다.
“가이드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 스타니슬라프.”
객실에서 보이지 않던 스타니슬라프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앨런과 아네트를 보더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구부렸다.
난 스타니슬라프에게도 모든 것을 설명했고, 스타니슬라프는 별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건 상관없다는 듯한 반응이다.
“알겠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연구와 연습에 있지. 모두들 갑판으로 올라오게. 저기 손님은 빼고.”
지붕이 있는 갑판엔 피아노와 팀파니 등이 세팅되어 있다고 한다. 스타니슬라프는 지금 당장 모두와 지금 공유하고 있는 노르웨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대해 연구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손님인 앨런과 아네트는 여기에 낄 필요가 없으니 자유롭게 선내를 돌아다니며 관광을 하면 된다.
“지휘자님. 혹시 연습을 옆에서 견학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런데 앨런은 그보다 우리에게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우리가 노르웨이까지 와서 느끼고 싶은 것이 있는 것처럼, 앨런 역시 우리의 연습을 보며 느끼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연습 장면을 외부인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지휘자들도 많다. 하지만 스타니슬라프는 흔쾌히 견학해도 좋다고 대답했다.
신혼여행에까지 자기 악기를 들고 다니는 연주자는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