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49화 (349/1,277)

##  349화

갑판에 올라가니 이미 무대처럼 보이는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피아노도 팀파니도 세팅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현악기 연주자들이 앉을 의자나 보면대 등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 오케스트라 캠프에는 오케스트라의 악보를 책임지는 악보계나 다른 행정, 무대 업무 등을 보는 분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팅되어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선 단원들이 각자 할 필요가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응? 아니, 괜찮아 타티아나. 그사이 피아노 상태 확인하고 있어. 조율이야 잘 되어 있겠지만 손에 좀 익게.”

멍하니 있긴 싫어서 뭐라도 하려고 했더니 크리스티나가 내가 맡은 피아노를 다시 확인하라며 돌려보냈다.

굳이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겠나 싶지만, 생각해 보니 이 피아노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 이틀간 항해를 했다. 피아노는 섬세한 악기라서 정말 문제가 생겨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약간 걱정이 든 나는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습관적으로 스케일을 한 번 오르내렸다. 일단 바로 손끝에 걸리는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이번엔 음색을 보려고 하는데 옆에서 앨런이 말을 걸어왔다.

“아, 타티아나는 피아니스트였군요? 어쩐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알고 계셨다고요?”

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다고만 했지 내가 무슨 악기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바이올린일 수도 있고 플루트일 수도 있고, 트럼펫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서 올려다보자 앨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피아니스트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다른 악기 연주자들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면이 있죠. 타티아나에게선 그런 게 느껴지더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난 앨런에게 말로 더 길게 설명해달라고 하는 대신, 살짝 화제를 바꾸었다.

“음, 그러면 제 분위기 말고 제 음악도 들어 보시겠어요?”

“연주하실 건가요?”

“예. 혹시 제가 연주해 드렸으면 하는 곡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차피 피아노 상태도 확인해야 되니 한 곡쯤 연주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내 말에 앨런이 약간 당황한 것 같다가, 다시 물었다.

“신청곡 말입니까?”

“예, 한 곡만 받을게요. 특별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앨런은 아네트와 짧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한 곡의 이름을 말했다.

“혹시 결혼 행진곡 가능합니까?”

“바그너? 멘델스존?”

“멘델스존이 좋겠군요.”

“왜 이 곡인지 여쭈어봐도 되나요?”

앨런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온 것이니 쉽게 결혼 행진곡이라는 곡을 떠올렸겠지만, 막상 내게 부탁해 놓고선 뒤늦게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었군요. 아닙니다, 타티아나.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시죠.”

손사래를 치는 그를 보며 난 가늘게 웃었다.

“후후후.”

피아노 앞에 앉은 나는 연주자일 뿐이다. 그리고 내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청중.

청중이 있다면 진심을 담아 연주할 뿐, 난 그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난 앨런과 아네트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이 곡을 연주할게요.”

그리고 난 바로 건반 위로 손을 떨어뜨렸다.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위해 작곡된 음악. ‘한여름 밤의 꿈’에 등장하는 마지막 5번째 곡이다.

본래 관현악이었으나 리스트가 피아노 솔로로 편곡하고, 호로비츠가 다시 한 번 더 편곡한 음악을 경쾌한 연타로 시작했다.

시작부터 관현악과는 다르다. 전통적인 독주 기악곡의 형태에 맞추어 서두가 주어지고, 주제가 펼쳐져 나간다.

다장조의 손가락 하나로 시작했던 음악은 곧 양손으로 옥타브를 연타해야 할 정도로 어려워졌다.

난 이 모든 것을 크게 힘들이지 않고 부드럽게 연주해 나갔다. 결혼 행진곡은 따뜻한 축복을 담고 있어야 한다.

“…….”

첫 주제의 연속되는 변주가 끝나고 사장조로 이조되며 조금 더 발랄하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이 등장했다.

양옆으로 말들이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닫힌 연습실이나 홀이 아닌 뻥 뚫린 배 위에서 제대로 음향이 나올까 걱정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소리가 나왔다. 피아노도 내 의도대로 연주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말들을 보내 주고, 다시 첫 주제로 돌아왔다가, 이번엔 라단조로 달콤하고 감정적으로 하늘을 그린다. 때마침 이곳엔 천장이 없었다. 살짝 고개를 드니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색을 조금 덜어서 피아노에 더해 보았다. 사실 하늘은 다 비슷비슷해서 그런지 크게 달라지진 않는 것 같다.

잠시 그렇게 피아노 테스트와 함께 이러저런 것들을 알아보고,

난 본격적으로 이 변주곡의 핵심을 건반 위로 올렸다.

“…….”

오른손을 빠른 아르페지오고 꾸미고, 왼손으로 멜로디를 짚는다.

단순한 과정이지만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템포가 어긋나거나 박자가 틀어진다. 난 가볍고 빠르게, 하지만 신중하게 실수하지 않도록 건반을 움직여 나갔다.

산뜻하게 뛰놀듯 이어지던 음악은 한층 더 변주를 거쳐서 보다 커다랗게 발산된다.

멘델스존의 밝은 화성과 리스트 특유의 강렬한 다성 음향, 그리고 호로비츠 특유의 피아노 테크닉이 한데 어우러졌다.

내가 이 곡을 레퍼토리에 넣고 연습했던 것은 세 대가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곡은 이 곡이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습실에서 홀로 연습했던 곡은, 지금 들어 줄 사람을 찾아내어 화려하게 펼쳐졌다.

난 더 열성적으로 건반을 연주했다. 몇 번의 변주를 더 거친 결혼 행진곡은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방불케 하는 난곡으로 변신해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더 장대하고 축복이 넘치는 행진곡이 되어 있었다.

변주는 마지막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 행진의 여운을 암시하는 음향으로 결말을 고조시키고, 양손으로 옥타브 반음계 스케일을 타오른 뒤 나팔소리를 터뜨리며 음악을 마쳤다.

“브라바!”

고개를 들고 보니 앨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습 준비를 하던 다른 단원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와우, 타티아나. 홀도 아닌데 소리가 쩌렁쩌렁하네. 컨디션 좋나 봐?”

난 일어서서 가볍게 묵례로 칭찬에 답했다. 모두들 시작이 기분 좋다며 기뻐했다. 나 역시 기뻤다.

그리고 옆에 있던 앨런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설마 정말 이렇게 연주해 주실 줄은…….”

“괜찮았나요?”

“최고였습니다. 타티아나. 아네트도 정말 감격했다고 전해 달라 하는군요.”

아네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풋 웃어 주었다. 내 음악을 듣고 나선 이전과 다른 신뢰가 생겨난 것 같았다.

난 오늘 앨런과 아네트 부부가 이 배에 오른 것이 앞으로도 쭉 저 두 사람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앨런은 여기에서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타티아나.”

“예.”

“저희도 한 곡 돌려드려도 괜찮을까요?”

“아 정말인가요?”

이 자리에서 답례를 해 줄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감사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난 연주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듣는 것도 좋아하니까.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곤 갖고 있던 악기 케이스를 열었다. 척 봐도 바이올린 케이스였는데, 그 안에 있던 것은 바이올린의 친척처럼 생긴 악기였다.

“바이올린이 아니네요……?”

“그걸 알아 보시겠습니까?”

“약간 커다란 피들fiddle 같이 보이긴 하는데요.”

앨런이 꺼내 든 악기는 바이올린보다 조금 큰 비올라 사이즈의 현악기였다. 일단 바이올린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보이는 대로 이야기했는데도 앨런은 깜짝 놀랐다는 듯 말했다.

“꽤 박식하시네요. 맞습니다. 노르웨이의 피들인 하딩 휄러hardingfele라고 하죠.”

그리고 현은 4줄이지만 그 아래에 공명현이 5줄 있어서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같은 음향을 낸다는 등, 이러저런 설명을 해 주었지만 난 한시라도 빨리 저 하딩 휄러라는 악기의 소리가 듣고 싶었다.

앨런을 올려다보고 있자 그는 피식 웃더니 하딩 휄러를 어깨에 걸쳤다.

“참 변변찮지만……. 그래도 즐겁게 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앨런과 아네트의 하딩 휄러 듀엣 연주가 시작되었다.

경쾌한 소리가 쨍 하니 울려퍼진다. 잘 모르는 음악이다. 하지만 민요풍의 음악이 선상을 뒤덮자 이 악기가 정말 노르웨이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악보가 아닌 귀에서 귀로 이어져 내려왔을 무곡 리듬. 앨런은 발을 차고, 상체를 흔들며 하딩 휄러를 빠르게 연주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저 동작들에 새겨져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

그리고 앨런의 주 멜로디를 받아 아네트가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다른 변주였다. 아네트 역시 굉장한 실력자였다. 그녀는 활의 탄력으로 연속된 음들을 튕겨 연주하는 살타토를 거의 장난하는 것처럼 구사하고 있었다. 숙련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모두 할 수 있는 주법이긴 하지만 저렇게 빠르고 편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네트의 연주도 정말 인상적이었다.

난 두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서 노르웨이 민속음악에 대한 기초적인 틀부터 느끼고 있었다. 이 리듬과 색채감은 또렷하게 귓가에 남았다.

그리고 여기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피아노 연주자인 내가 아니라 다른 현악기 연주자들이었다.

“…….”

모든 단원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앨런과 아네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든 움직임을 기억하려는 것 같았다. 몇 사람은 가늘게 오른팔을 떨기도 했다. 머릿속으로 벌써 주법들을 따라해 보고 있는 것 같다.

앨런은 마치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모두 보여 주겠다는 듯 더더욱 신이 난 듯한 모습으로 활을 움직였다. 아네트 역시 러시아어를 못하는 만큼 악기로 전할 말이 많다는 듯 더더욱 크게 소리를 키웠다. 두 대의 하딩 휄러가 노르웨이의 바다를 음악으로 칠한다.

민속음악으로 들리는 한 곡이 끝났고, 박수와 환성이 터졌다.

“브라보, 브라보!”

“이거 안 듣고 돌아갔으면 완전 허탕 칠 뻔했네.”

“노르웨이의 음악인가.”

“연구할 거리가 많겠는데.”

“야, 앨런. 너 바이올린에서 언제 전공 갈아탔냐? 그거 금방 배우나?”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앨런이 난처한 듯 웃으며 하딩 휄러를 집어넣으려 했다. 여기서 주역으로 관심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딩 휄러를 막 케이스에 넣으려는 앨런의 행동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스타니슬라프였다.

“앨런 칼센이라고 했나.”

“예.”

앨런은 키가 정말 크지만 스타니슬라프도 그에 못지않았다. 덩치만 놓고 보면 두 배는 되어 보인다.

그런데 앨런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치를 살피는 사이, 스타니슬라프가 정중히 부탁했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조금만 시간을 내서 하딩 휄러의 보잉 테크닉 등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겠나.”

“아.”

“우리가 찾던 걸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한 연주자의 음악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거부하기 쉽지 않다. 앨런은 가볍게 웃더니 하딩 휄러를 도로 꺼내 들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남은 준비가 빠르게 이루어졌고, 앨런은 앞으로 나와서 하딩 휄러을 다시 시연해 보이고, 설명을 덧붙였다.

“보잉 테크닉의 팁을 가르쳐 드리자면 조금 더 가벼운 터치로 부드럽게, 그리고 비브라토는 적게 하는 것이 포인트죠. 아, 이 배음은 하딩 휄러가 아니면 나지 않으니까 첼로가 조금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앨런의 설명은 감각적이면서도 굉장히 직관적인 부분이 있었다. 원래 바이올린 연주자여서 그런지 각 악기의 특성과 차이점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 순간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경청했다. 난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딱 15분 정도 시연과 강의가 있었고, 그다음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딩 휄러 테크닉과 음향을 모사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은 소리들만 났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난 정말 깜짝 놀랐다. 모두가 소리를 하나로 맞추기 시작하자, 바로 얼마 전만 하더라도 스타니슬라프가 통일성이 떨어진다며 지적했던 부분들이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노르웨이에 와서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음악을 들은 것으로 벌써 이만큼이나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네르가 바이올린을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서 더 제대로 소리 내려면 연주회 전까지 죽자고 연습해야겠군.”

“아, 활도 조금 달라요. 현대의 활보다 가볍고 유연한 바로크 활이에요.”

“아니, 그건 진작 말해 줬어야지.”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한참을 웃고, 떠들고, 연습하고, 조언하고, 피드백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노르웨이까지 와서 같은 말을 쓰는 음악가를 만나서, 노르웨이의 민속음악과 악기를 직접 듣고 배울 수 있는 일이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기적을 오케스트라는 더더욱 큰 기적으로 만들어 낼 능력이 있었다.

난 옆에서 한 번 반복할 때마다 나아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으며 뒤쳐지지 않도록 심상 속 내 소리를 가다듬었다. 저 오케스트라에 따라가려면 나 역시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콕콕 찔렀다. 옆을 보니 아네트가 스마트폰을 내 쪽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 화면엔 번역기로 번역한 듯한 러시아어가 떠올라 있었다.

[오늘 정말 고마워요. 연주회 보러 갈게요.]

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이 기적을 우리가 어떤 결과물로 무대 위에 올려놓을지, 많은 사람이 봐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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