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50화 (350/1,277)

##  350화

중앙음악학교의 피아노 선생 미하일은 레슨실에 앉아 홀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12월이었다. 한참 전부터 모스크바는 한낮에도 기온이 영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거리는 흰 눈이 덮여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미하일은 시간 참 빨리 가는 것 같다는, 늙은이나 할 만한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올리며 차를 홀짝였다.

그렇게 잠시 티타임을 즐기는 미하일의 레슨실에 느닷없이 한 남자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코트를 입은 커다란 곰을 연상케 하는 남자다.

“더럽게 춥군.”

동료 교사이자 오랜 친구인 구세프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미하일은 포트에 전원을 다시 넣었다. 방금 전에 끓었던 물은 금세 다시 끓기 시작했다.

“눈 많이 맞았군. 어디 갔다 오나?”

“음악원에. 노인네들이 바쁜 사람을 쓸데없이 오라 가라 하는군. 귀찮게.”

구세프는 라디에이터 앞에 의자를 끌고 가더니 거기에 턱 앉으며 대답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선 구세프를 상당히 예의 주시하고 있다.

바흐 음악의 권위자이자 명망 있는 피아니스트로서 구세프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어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몇 번이고 교수로 스카우트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그것은 계속 거절하고 가끔 도움이 필요하면 가서 도와주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로 가까이에 있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갔다 온 것 같았다. 중앙음악학교와 모스크바 음악원의 거리는 걸어서 왔다 갔다 하기에도 괜찮을 정도로 가까웠으므로 큰 부담은 없었지만,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엔 아무래도 투덜거림이 나오기 마련이다.

미하일은 투덜거리는 구세프의 입에 듣는 약은 따뜻한 차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받게.”

“고맙군.”

구세프는 찻잔을 기울이며 빠르게 조용해졌다.

두 선생은 잠시간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며 고즈넉한 시간을 즐겼다.

미하일이 물었다.

“올해는 유난히 더 추운 것 같아. 안 그렇나? 구세프.”

“눈도 많이 오고 말이지.”

구세프는 툭 내뱉었다.

“말세야 말세.”

“그런 말 말게. 선생인 우리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흠.”

“우리야 가면 그만이지만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확실히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구세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따뜻한 차로 목을 축이곤 짧게 되쏘았다.

“잔소리는.”

“하하.”

미하일은 웃으며 구세프의 투덜거림을 받아 주었다.

말도 행동도 험하고, 심지어 괴팍하다는 평가도 받는 구세프였지만 사실 그는 상대하기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구세프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더니,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아이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자네 제자들은 어떤가?”

“모두 잘 하고 있지. 난 요즘처럼 기쁠 수가 없다네.”

“흠, 그렇다면 뭐 되었고.”

구세프는 팔짱을 끼며 라디에이터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지만 미하일은 구세프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 학생들 중에서 자네가 궁금해할 만한 학생이라면…… 타티아나겠군.”

“별로.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할 아이인데 내가 왜 궁금해해야 하나?”

구세프는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미하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에도 대놓고 타티아나는 어떠냐며 찾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지극정성이었는데, 요즘 들어 구세프는 약간 차갑다고 느껴질 정도로 타티아나를 대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이 친구 또 이러는군. 저번에도 레슨 한 번 봐 달라고 하는 걸 굳이 거절하고 나가 버리고.”

“자네가 있잖나.”

“타티아나에겐 선생이 많이 필요하네. 난 내가 타티아나의 마지막 선생이 될 수 있다고 자만하지 않고 있네.”

“미하일. 지금 그 애가 저렇게 잘된 건 다 자네 덕이네. 데려온 것도, 키워 낸 것도. 자만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저 현실적인 판단일세.”

미하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지금 타티아나가 사사 중인 건 미하일이라는 선생이지만, 이전에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선생이 타티아나의 음악에 영향을 미칠지 미하일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음악들을 흡수하고 성장한 타티아나가 얼마나 대단해질지도 알 수 없다. 그 가능성을 이 작은 학교와 모자란 선생의 틀 안에 가둬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독점욕을 지닌 선생들도 있지만, 미하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미하일은 구세프가 타티아나를 가르치는 것 또한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구세프. 왜 점점 멀리하나?”

1학기가 시작하고 나서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준비 중인 타티아나가 가끔 레슨을 요청하면 받아 주었는데, 한 달쯤 전부터 구세프는 태도를 바꾸었다.

구세프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타티아나가 사사했다고 할 수 있는 지도자는 내가 아니라 자넬세. 내 역할이 끝났다면 간섭하지 말아야지.”

“간섭한 순간부터 자네의 책임이 시작되었다는 건 모르겠나?”

“…….”

“오늘도 분명 궁금해했고 말일세.”

“글쎄.”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미하일에게 제자들의 안부를 물었을 때, 구세프는 타티아나의 근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발뺌해 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미하일이 은근한 미소로 압박하자 구세프는 인상을 확 쓰며 눈을 부라렸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오늘만큼은 구세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을 생각이었다.

평소 화를 내거나 고집을 부리는 일이 드문 미하일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럴 때일수록 무서운 면모가 있기도 했다.

말없이 바라보는 미하일을 힐끔거리던 구세프는 이윽고 항복했다는 듯 의자에 더 깊게 파묻히며 말했다.

“난 단지…… 그 애가 고집불통으로 어긋나 있을 때 되잡아 줘야 할 책임을 느꼈을 뿐이야. 그런데 지금 보게. 어긋나 있나?”

“전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정말 올바르게 자기가 있을 곳, 가야 할 곳을 바라보고 있지.”

타티아나는 정말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교과 학습은 물론이고, 주변 친구들을 챙겨서 일부러 스터디까지 만들어 이끌고, 개인 과제곡 연습도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면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 올릴 곡도 불과 2달 만에 엄청난 완성도로 만들어 냈다.

거의 살인적으로 느껴지는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타티아나는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작년에 위태로워 보이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감격스러울 정도로 많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피아노를 가장 우선시한다는 것은 작년과 다를 바 없었지만, 피아노가 미처 채워 주지 못한 빈 공간들이 요즘은 밝고 따뜻한 무언가로 채워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서히 완성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타티아나는 안정되어 있었고 급속도로 성장해 갔다.

그렇게 잘 하고 있는 학생을 미하일은 기특하게 바라볼 수 있었지만, 구세프는 그 행복 속에서 자신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무언가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생기는 그 고집 센 면모가 조금씩 엿보이긴 하지만……. 이번엔 굳이 고쳐 주지 않아도 될 고집이지.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나? 그 애랑 앉아서 하하호호 웃으며 레슨이나 할까?”

“그래. 그러면 되지.”

“아니. 난 그 애와 약속한 것이 있다네.”

구세프와 타티아나만의 약속. 미하일은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3년이라는 기한을 둔 그 약속이 타티아나를 지금 여기까지 멀쩡히 올 수 있게 한 이유 중 하나였다는 것 정도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 있어서 그 약속을 구세프가 어떻게 처리하는진 상당히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구세프는 심각한 눈빛을 하며 굳게 말했다.

“약속은 분명하게 지킬 생각이고, 또 그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건 온전히 내 책임이 되어야 하네.”

“구세프.”

“더 정이 쌓이게 되면, 지도에 차질이 생겨.”

미하일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그런 소릴 하나?”

“…….”

“그러니까 결국, 구세프 자네는 끝까지 타티아나를 책임지고 싶은 것뿐이로군?”

“난 그 정도로 자만하고 있진 않네. 그저 선생답게 굴 뿐이지.”

“선생답게라…….”

구세프에겐 그 나름대로의 교사상이 있을 것이다. 그건 아마 학생에게 악평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잘 되게끔 밀어 올려 주는, 그런 역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피상적인 역할만으로 구세프를 바라보지 않고 보다 깊고 순수하게 바라보았고, 때문에 구세프는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슨 상황인진 대충 알겠지만, 미하일은 얼마 전 타티아나가 구세프에게서 외면당하는 것 같다고 우울해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구세프는 그걸 알아야 했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을 써 주게. 지금 타티아나가 자네에게 가장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인진 잘 알지 않나?”

“진짜 웃기는 꼬맹이지. 대체 날 왜?”

“자네가 잘 가르치니까?”

“지도 선생인 자네가 그런 식이니까 그 녀석이 자기 지도 선생의 눈치도 안 보고 내게 레슨을 해 달라는 소리를 하는 것 아닌가?”

미하일은 말문이 막혔다. 이제 와서 레슨을 해 주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렵고 해선 안 될 일이라기에는 구세프는 타티아나에게 해 준 레슨이 너무 많았다.

뭔가 타당한 근거를 대자니 역설적으로 과거와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미하일은 약간 어이가 없기까지 했다.

구세프는 목이 마른지 연거푸 차를 마셨다. 미하일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눈치를 왜 안 보겠나? 타티아나가 얼마나 섬세한지 아직도 모르나? 내가 실망하거나 자네를 질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늘 내 심기를 살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일세.”

“……그렇다면 대체 왜?”

“그래도 자네의 피아노 역시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더 큰 것이겠지.”

타티아나는 선생에 대한 의리와 신뢰가 정말 강한 편이었고, 때문에 혹여나 지도 선생인 미하일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말이나 음악은 지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구세프가 레슨을 해 주지 않겠다고 밝혔을 때만큼은, 정말 실망감을 대놓고 드러내었다. 그만큼 타티아나는 구세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피식 웃으며 구세프에게 부탁했다.

“아무튼 한 번쯤 봐 달라고 하면 봐 주게. 지도 선생인 내가 허락하는 거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했잖은가.”

“뭐 어떻나?”

미하일은 평소 음악 외의 다른 것들은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난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 생각하네.”

“…….”

미하일은 이런 대책 없이 긍정적인 말을 구세프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지만, 그러면서도 얼마나 믿고 싶어 하는지 역시 잘 안다.

다 잘 될 것이란 말에 구세프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두 선생은 다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따뜻한 차와 이야기 나눌 상대가 있다면 시간은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간다.

두 번째 잔이 다 비워져 갈 때 쯤, 작은 노크 소리가 레슨실 문을 통해 들렸다.

“타티아나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너라.”

대충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학생들도 많은데, 타티아나는 언제나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하고 허락을 구해 온다.

그리고 허락을 받은 타티아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옅은 백금발의 소녀는 코트를 입고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미하일은 새삼 1년 전의 타티아나를 떠올렸다. 병약한 외모에 스산한 우울감을 휘감고 있었던 모습은 이제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키도 더 큰 것 같고, 에너지도 넘쳤다.

타티아나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미하일 선생님. 아……! 구세프 선생님도요.”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는 구세프를 발견한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미하일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구세프의 표정을 똑똑히 목격했다. 웃음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친구의 명예를 위해 미하일은 시치미를 뚝 떼고 인사를 받았다.

“잘 왔다, 타티아나. 와서 앉거라. 차를 내어 주마.”

“감사합니다. 선생님.”

타티아나는 코트와 베레모를 벗어서 옷걸이 아래쪽에 반듯하게 걸어 놓고는 라디에이터 쪽으로 다가왔다.

구세프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인사했다.

“왔느냐.”

“예. 선생님.”

“…….”

심술궂게 한마디 하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타티아나의 얼굴을 보고는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미하일은 쓴웃음을 흘리며 타티아나에게 차를 끓여 주었다.

감사 인사를 하며 찻잔을 받아 쥔 타티아나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막 생각났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가방을 열었다.

“저기, 드릴 게 있어요.”

타티아나가 꺼낸 것은 두 장의 티켓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티켓을 내밀었다.

“제 연주회 티켓이에요. 이제 받았거든요.”

“오, 그렇구나.”

미하일은 감탄하며 그녀의 티켓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가 모스크바에서 하는 연주회의 티켓이다. 협연자의 이름엔 정확하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타티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미하일은 그녀의 지도 선생으로서 1년가량 있었지만 콩쿠르에도 연주회에도 가서 봐 주지 못했다. 늘 딱 바쁘게 일정이 겹친 탓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생각이었다.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일정은 없을 것 같구나. 가도록 하마.”

“난 스케줄을 봐야 알겠는데.”

하지만 그에 대조되는 목소리로 구세프가 말했다. 물론 바쁜 음악학교 선생의 일정이라는 것이 어찌 될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딱히 타티아나를 괴롭히려는 말은 아니었지만, 대번에 타티아나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은 조금 안쓰럽기까지 했다.

타티아나는 티켓을 내민 손 그대로 그것을 거두지도 못하고 있었다.

구세프는 그것을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줘 봐라.”

어쨌건 티켓을 받아 들자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구세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타티아나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구세프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구세프 선생님?”

“오냐.”

“그, 저번엔 죄송했어요. 제가 레슨으로 억지를 부려서요.”

“……뭐?”

뜬금없는 말에 구세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레슨 관련해선 구세프가 살짝 거리를 둔 것이 사실이었으나 타티아나는 거기에 대해 딱히 억지를 부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대체 무엇을 사과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구세프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이어질 타티아나의 말이 지금까지 억지로 레슨을 해 주고 있었다면 앞으론 필요 없다는 말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구세프가 앞으로 바라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타티아나가 먼저 이렇게 말을 꺼낼 것 같자 조금 심란하기도 했다.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구세프가 바라보는 사이, 타티아나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이어 말했다.

“그래도…….”

타티아나는 간절하게 청했다.

“가끔이라면 제가 어떤 피아노를 치고 있는지 들어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한 달…… 아니면 반년에 한 번씩만이라도요.”

“…….”

“안 될까요?”

구세프는 어디까지나 타티아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그녀가 잘해 나가고 있는 지금도 구태여 레슨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타티아나는 구세프가 왜 레슨을 이어 나가려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거절당했다고 생각할 만한데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되레 스스로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예?”

“아니다.”

구세프는 옆머리를 짚었다가, 손을 내젓다가, 다시 이마를 짚었다.

미하일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오늘은 구세프에게 레슨을 받도록 하려무나. 타티아나.”

“예?”

깜짝 놀라는 타티아나에게 미하일은 손가락으로 귀 부근을 톡톡 치며 말했다.

“내가 오늘 약한 감기에 걸린 것 같아서 말이다. 귀가 막혀서 소리가 잘 안 들리는구나.”

“코가 막혀서 냄새를 못 맡으시는 게 아니라요……?”

“난 체질이 조금 특이해서.”

황당한 소리나 다름없었지만 변명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미하일은 구세프에게 말했다.

“어쨌든, 구세프. 오늘 부탁함세.”

“……하.”

구세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지만 결국 사제의 부탁에 무너져 내렸다.

“다 마시고 봐 주마. 타티아나.”

“정말이신가요?”

“그래.”

타티아나는 다시 그렇게 약속을 받자마자 빠르게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찻물이 아직 너무 뜨거웠는지 화들짝 놀라며 혀를 내밀었다. 구세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건 레슨을 하기로 했다면 제대로 봐 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무서운 선생의 역할에 걸맞게 겁을 줄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짐짓 매섭게 말했다.

“준비 중인 협주곡, 얼마나 완성되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할 테니 각오나 하거라.”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 말에 반색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리고 차를 후후 부는 타티아나를 보면서 구세프는 패배감마저 느꼈다. 다른 학생들은 이렇게 대놓고 깐깐하게 굴겠다고 말하면 시작하기도 전부터 벌벌 떨기 마련인데, 음악을 놓고선 아무리 엄하게 해도 타티아나를 겁먹게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잘 알고 있었는데, 무슨 바보 같은 짓인지 모르겠다.

“자네 아직도 저 애를 모르나?”

“…….”

미하일이 조금 놀리는 투로 말하자 구세프는 레슨이고 뭐고 집어던지고 싶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타티아나만큼이나 빨리 레슨을 해 주고 싶었다.

독주곡 레퍼토리엔 천재 말고는 달리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강한 면모를 보이면서, 유독 협연에만 약했던 타티아나가 이젠 협연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것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것은 선생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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