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51화 (351/1,277)

##  351화

오케스트라와 거의 다 맞춰 놓은 합의와 해석을 고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신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그 해석들을 더 확실하게 피아노로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레슨해 주셨다.

해석을 바꿀 필요는 없었으니 마음은 편했지만 머리와 손은 힘들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은 혹독했다. 선생님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계셨고, 그보다 못한 연주를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나는 보다 높은 완성도를 위해 몇 번이고 피아노의 한계를 끌어내야만 했다.

딱딱한 피아노가 한계를 넘나들 때마다 나 역시 몇 번이나 한계를 맛보았다.

힘들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몇 번이고 한계를 넘어섰지만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은 늘 무겁게 날 짓눌러 온다.

하지만 이쯤이야 이미 익숙했다. 난 그만두지 않고 충실하게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건반을 연주했다.

아직 멀었다. 뛰어넘고 싶다. 더 잘하고 싶다. 그 생각만으로 레슨에 임한 지 2시간 정도.

“그만.”

“…….”

방금, 괜찮았던 것 같은데.

혼자 할 때와 다른,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했을 때와도 다른 음악이 확실하게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같은 해석이지만 수준 높고 강렬한, 아주 견고한 음악.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구세프 선생님이 손가락을 들어 옆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방금 그 소리는 기억해 둬서 나쁠 것 없을 게다. 타티아나.”

그 말은 내게 굉장히 큰 확신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오냐.”

“저……. 빨리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해 보고 싶어요.”

이 음악을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 이런 작은 레슨실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향을 낼 수 있는 홀에서 연주하고 싶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나도 기대되는군.”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레슨은 필요 없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은 미련 없이 일어나선 코트를 걸쳐 입고 돌아섰다. 레슨을 마치자마자 가시나 싶어서 올려다보고 있자니, 선생님은 내가 레슨 전에 드렸던 연주회 티켓을 들고 휙 흔들었다.

“꼭 가마.”

스케줄을 봐야 알겠다고 하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난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세프 선생님이 레슨실을 나가고, 조용히 계시던 미하일 선생님이 쿡쿡 웃음을 터뜨리시더니 말했다.

“오늘 레슨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선생님이 한 번 더 봐 주셔도…….”

“아니, 됐다. 옆에서 들어 보니 충분히 잘 하고 있다.”

옆에서 모든 레슨 과정을 다 보신 미하일 선생님은 내게 더 이상 레슨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선생님이 딱 잘라 말씀하셨다.

“난 이 다음은 무대에서 듣고 싶구나.”

“아…….”

“바쁜 구세프가 꼭 가겠다고 하니 나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가도록 하마.”

“좋은 무대 보여 드릴게요.”

“그래.”

선생님은 기대된다는 듯 미소를 지으셨다.

***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이미 식당 테이블에 앉아 날 기다리고 계셨다.

식당에 들어선 내가 인기척을 내자 태블릿PC로 무언가를 보시던 아버지가 눈만 들어 날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늦게까지 연습이로구나.”

“죄송해요. 아버지.”

“책하려던 건 아니었다. 열심히 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아버지는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며 맞은편으로 손을 뻗었다.

“앉거라.”

“예.”

난 루슬란 오빠의 옆자리에 앉았다. 루슬란 오빠가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연습은 잘 되어 가고 있어? 알아서 잘 할 테지만.”

“예. 잘 되어 가고 있어요.”

관심이 듬뿍 묻어나는 그 어투에 나는 기분 좋게 대답했다.

“지금은 완성도를 올려 나가는 중이에요.”

“어렵겠네.”

“예. 사실 지휘자님이 고생이 많으시죠. 최근에는 목관악기를 더블링 하기도 했어요.”

“더블링? 그게 뭐야?”

“연주자를 더 구해서 악기 편성을 기존에서 두 배로 올리는 것을 뜻해요.”

기존 1관 편성의 오케스트라라고 하면 목관악기는 각 1명씩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현악기와 금관악기의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목관악기를 2명으로 늘리면 2관 편성이 되면서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한 번에 불어나 버리지만, 특별하게 곡에 맞추어 지휘자의 판단하에 목관악기나 금관악기만 더블링으로 늘리는 경우도 많았다.

루슬란 오빠는 약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해도 돼?”

“상관없어요. 곡에 맞게 편성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은 그야말로 지휘자님의 권한이니까요.”

모든 곡이 요구하는 대로 정확하게 연주자들과 악기를 준비해서 연주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편성을 현실에 맞추면서, 곡의 완성도는 완성도대로 이루어 내는 것이 바로 지휘자의 역량인 것이다.

그 완성도를 위해 심지어 악보에 음표나 패시지를 가필해서 지휘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편성만 살짝 늘리는 건 보수적인 지휘자에 속했다.

난 간단하게 설명했다.

“지휘자님은 챔버 오케스트라로 어떻게 하면 이번 프로그램을 최대한 감동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하시는 듯해요. 목관의 더블링 역시 그 일환이에요.”

“음, 들어도 잘 모르겠는데.”

“말로 하는 음악 이론은 어렵지요. 가장 간단한 건.”

잠시 말을 끊고, 난 궁금해하는 루슬란 오빠에게 환하게 웃으며 연주회 티켓을 내밀었다.

“직접 오셔서 들어 봐 주시는 거예요.”

“오, 티켓이 나왔구나?”

“예.”

내 연주회에 와 주겠다는 약속은 이전에 받아 두었기 때문에 루슬란 오빠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서 티켓을 받아 갔다.

그리고 맞은편의 아버지도 내가 내미는 티켓을 받아 주셨다.

난 가족들을 연주회에 초대해서 내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려주는 것에 대해 약간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두 분 모두 와 주신다 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무슨 말이야. 무조건 가야지.”

당연히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투로 말하는 루슬란 오빠를 보며 약간 목이 메이기까지 했다. 앞으로도 이 당연함을 어떻게든 지켜 나가고 싶다.

아버지는 내가 건네 드린 티켓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말씀하셨다.

“자랑스럽구나. 타티아나.”

“예?”

평소 아버지는 칭찬이 인색하신 분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무엇을 칭찬하시는지 몰라 되묻자 아버지가 보일락 말락 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네가 여름방학에 만든 음반도 무척이나 성공적이라고 들었다.”

음반은 정말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4번이나 재판에 들어간 내 음반은 각 매거진 등에서 호평이었고, 인터넷 등에서도 좋은 평가가 줄을 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따라붙는 수많은 예측과 분석 등이 있었다. 유명 연주자의 녹음일 것이란 예측은 수백 가지도 넘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 음반의 스펙트럼을 분석했다면서 이것이 한 연주자의 순수한 음원이 아니라 러시아 정부에서 고도의 기술로 아주 정밀하게 편집하고 믹싱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 헛웃음밖에 안 나오는 주장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묻히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칭찬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게나 음반이 잘되어 가면서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년에도 할 수 있다면 두 번째 음반을 내자며 제안하기도 했다. 난 아직 결정을 내리진 않았지만 별일 없다면 그것도 수락할 생각이었다.

열다섯 살의 내가 이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말처럼 영생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면, 열여섯 살의 나 역시 그렇게 남겨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다 더 발전한 모습으로.

아버지는 깊고 진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학교생활도 허투루 하지 않고, 이렇게 연주회도 성사시켜서 잘 진행 중이고. 내가 미처 무엇을 도와주어야 할지도 잘 모를 정도구나.”

음반, 학교생활, 연주회. 그뿐만이 아니라 선생님들, 가족들, 그 외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 그 어느 하나 손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았다. 아버지는 내가 그렇게 잘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봐 주신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정말 기뻤다.

“아니에요, 아버지. 아버지께서 지켜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고맙구나.”

아버지는 조금은 미안하다는 투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고는 이어서 응원해 주셨다.

“이번 연주회도 네가 노력한 만큼 훌륭한 연주회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타티아나.”

“감사해요. 아버지.”

무조건 잘될 것이란 말이 아닌, 노력한 만큼 그에 따른 성과가 있으리란 말은 아버지의 입버릇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 말에 적극 동의한다.

내가 한 만큼, 내게 허락된 만큼. 단지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다시 과묵해지셨고, 대부분 나와 루슬란 오빠가 나누는 일상 이야기와 잡담 같은 것들이었지만, 가끔 아버지는 우리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시고 의견을 내어 주시기도 했다.

루슬란 오빠는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저녁 시간에 다 함께 모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만은 않는 것 같았지만, 이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드미트리와 몇 명의 고용인 분들이 오늘의 저녁 식사를 내왔다. 차곡차곡 테이블 위에 식사들이 준비된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아버지가 짧게 식전 기도를 올렸다.

“타티아나의 연주회에 축복이 있기를.”

짧지만 진솔한 기도가 정말 축복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날 바라보셨고, 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들자꾸나.”

“예.”

저녁 식사는 그 어떤 때보다 훌륭했다.

***

큰 무대를 앞두고 준비해 본 적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부산했다.

“아가씨! 연주회까지 시간은…… 괜찮겠죠? 헤어는 가서 하신다고 하셨고. 어디 보자…….”

“나제즈다. 괜찮아요.”

난 약간 흥분한 것 같이 보이는 나제즈다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드레스를 입거나 스타일링을 받는 것은 홀에 가서 할 테니 지금 집에서 할 일은 별로 없었지만, 나제즈다는 내가 혹여나 시간이 부족하거나 준비를 제대로 못 마칠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몸 상태가 혹시 나쁘진 않느냐며 묻는 것이 세 번째쯤 되자 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나제즈다는 계속 걱정이 될 뿐이었다. 그건 사실 귀찮기보단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나제즈다와 오늘 연주회 준비를 하면서, 같이 가기로 한 루슬란 오빠는 언제쯤 오는 것인지 기다리고 있다 보니 이윽고 문이 열리며 루슬란 오빠가 들어왔다.

루슬란 오빠는 언제나 깔끔하고 멋진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한결 더 포멀하고 쿨했다. 오빠는 맞춤 정장과 코트 차림에 넥타이, 그리고 내가 저번에 사 주었던 넥타이핀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 핀을 유심히 보자 루슬란 오빠가 약간 난색을 표했다.

“왜 그렇게 봐?”

뭐라도 묻었나 걱정하는 투여서 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정말 멋있으세요.”

“내가 그래도 의미 없잖아.”

“그래도요.”

“고마워.”

그래도 멋지다는 칭찬에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었다.

루슬란 오빠는 보다 경쾌하게 말했다.

“가자, 타티아나.”

“예.”

난 막 방을 떠나려다가, 남아 있는 나제즈다를 돌아보았다. 나제즈다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며 말했다.

“다녀올게요. 나제즈다.”

“다녀오세요. 아가씨.”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난 오빠와 함께 밖으로 나와서 내 경호원들이 대기시켜 준 차량에 올라탔다.

“콘서트홀로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예. 소로킨.”

그렇게 우리는 오늘 연주회가 있을 콘서트홀로 향했다.

차이코프스키 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1700석 규모의 대형 홀로, 음향도 뛰어나고 굉장히 좋은 홀이었다. 때문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연주회를 할 때 자주 쓰기도 하고,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형 음악 콩쿠르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주된 홀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빌리기도 힘든 홀인 것이다.

난 차이코프스키 홀 같은 훌륭한 홀에서 첫 협연을 하게 된 것이 굉장히 자랑스럽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주곡인지라 어쩌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쪽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에이전트 베르너는 모스크바 쪽에서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모스크바에서 연주회를 하니 나는 편했지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상주하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땐 전용기라도 빌려줄 수 없나 한 번 아버지에게 여쭈어 봐야 할 것 같다.

잠시 후, 우리는 차이코프스키 홀 앞에 내릴 수 있었다.

“자.”

“고마워요.”

루슬란 오빠의 에스코트를 받아 나는 차에서 내렸다.

웅장한 규모의 콘서트홀이 보인다. 난 코트 자락을 여미며 홀로 향했다.

그리고 입구에 막 들어서자마자 가장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반짝반짝한 금발과 생동감 넘치는 몸짓.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미리 도착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

별로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내가 크게 소리쳐 부르자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라더니 날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났다.

“타티아나!”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날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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