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2화
갑자기 끌어안는 그녀와 마주 안으며 난 심적으로 안도했다. 미리 와 있겠단 연락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놓인다. 12월의 추운 날씨 속에서도 아나스타샤의 온기는 따뜻했다.
포옹으로 인사를 나눈 우리는 곧 살짝 떨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손끝으로 내 앞머리를 정돈해 주고는 싱긋 웃었다.
“보러 왔어. 타티아나.”
“아하하,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고맙긴. 당연히 와야지. 만약 내가 연주회 하면 넌 안 올 거야?”
“예? 아뇨, 반드시 가야죠!”
“그런 거야.”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난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고마운 것도 당연한 거예요.”
“그도 그렇네.”
한층 더 밝아진 미소로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어깨를 다시 한 번 꼭 잡아 주었다가 놓고는 내 뒤편의 루슬란 오빠와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붉은 드레스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정말 아나스타샤가 아니라면 소화해 내지 못했을 의상이었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멋지고 당당했다.
“루슬란도 빅토르도 반가워요. 간만이네요.”
“음, 안녕. 아나스타샤.”
“안녕하십니까.”
아나스타샤가 생기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루슬란은 오늘도 멋지네요. 동생의 연주회라서 차려입으신 건가요?”
“뭐 그렇지.”
“넥타이핀도 타티아나가 저번에 골랐던 것 같은데. 맞죠?”
“예리하네? 아나스타샤.”
“제가 좀 그렇죠.”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폈다.
루슬란 오빠는 그제야 어떤 인사를 돌려줘야 할지 감이 왔는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아나스타샤. 오늘 정말 예쁘네.”
“어머, 고마워요. 루슬란.”
“무대에는 안 올라가는 거야?”
“제가요?”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더니, 고개를 저으며 그 손가락을 틀어 날 가리켰다.
“오늘 주인공은 여기 있잖아요?”
“혹시나 해서 말이지. 찬조 연주라든가.”
“이런 연주회에서 그런 자리를 만들긴 힘들죠.”
루슬란 오빠는 아나스타샤의 드레스 차림이 당장 무대에 올라도 될 것같이 보여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찬조 연주라는 것이 의상이 갖춰졌다고 해서 늘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재차 말했다.
“오늘은 청중의 입장에서 타티아나를 봐 줘야죠.”
“음. 고마워.”
루슬란 오빠의 감사인사에 미소로 답한 아나스타샤는 이어서 경쾌하게 내 팔을 낚아챘다.
“그런데 청중이 되기 전에.”
“?”
“타티아나, 네 친구로서 해야 할 일을 해 볼까?”
“……예?”
난 순간 무슨 말인지 몰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나스타샤는 팔을 살짝 잡아끌며 말했다.
“전에 섭외해 둔 헤어 스타일리스트는 이미 분장실에 와 있어. 자, 가자. 널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게.”
“아.”
그제야 난 내가 아직 드레스가 아닌 평상복 차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나와 아나스타샤만 놓고 보면 오늘 연주회의 연주자는 내가 아닌 아나스타샤처럼 보일 것이다.
지금부턴 연주자로서 내적인 부분만이 아닌 외적인 준비도 해야 했다.
난 아나스타샤를 따라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루슬란 오빠와 빅토르는 잠시 후에 아버지가 오시면 아버지를 모시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오빠에게 말했다.
“갔다 올게요.”
“그래.”
루슬란 오빠가 살짝 손을 흔들었다.
***
난 아나스타샤와 스타일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2시간 정도 걸려 거의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여기 좀 보시겠어요? 타티아나.”
“예.”
똑바로 서서 허리를 펴고, 턱을 당겼다.
분장실에 있는 두 사람이 한참을 날 바라보았다. 그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조금 부끄러워질 무렵, 스타일리스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완벽해요.”
“완벽이요?”
“예. 100점을 드리고 싶군요.”
스타일리스트는 이어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보았다.
“어떤가요? 아나스타샤.”
“50만 점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되나요?”
“언니는 최고점을 준 것이잖아요? 그럼 되었죠.”
아나스타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50만 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점수를 주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조금 황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나도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난 거울을 돌아보았다.
백금발인 내 머리색과 비슷한 금빛 드레스가 쇄골 아래부터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금색의 드레스는 너무 화려한 것이 아닌가 싶어 약간 걱정이기도 했지만,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올라갔을 때 이 협주곡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실하게 드러내려면 머리색과 통일되는 드레스만 한 것도 없다는 이유로 난 이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막상 입고 보니 정말 괜찮아 보였다. 과하게 반짝이거나 맨살이 많이 보이면 부담스러웠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마음에 든다.
그리고 무대에서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어깨에만 레이스 볼레로를 걸쳤고, 머리 역시 혹여나 방해되지 않도록 했다. 스타일리스트는 너무 학생 같아 보이는 건 지양하겠다며 내 머리카락을 땋아 올렸다.
목이 시원하게 드러나서 조금 허전해 보이는 부분은 늘 하고 다니는 가넷 목걸이가 액세서리로서 활약해 주었다.
그간 많은 연주회를 하면서 드레스도 정말 많이 입어 보았지만, 오늘이 내 마음에 가장 드는 것 같다. 첫 협연 무대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의상으로 설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스타일리스트가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튼…… 이 드레스에 정말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깜짝 놀랄 정도네요. 타티아나. 사실 뭘 해도 잘 어울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지만요.”
“다 꾸며 주신 분들의 실력이 좋은 덕분이지요.”
“아뇨,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정말이라니까요.”
내가 겸허하게 말하자 스타일리스트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타티아나처럼 비율도 좋고 자세도 곧은 분은 찾기 힘들거든요. 발레를 하시는 분들만큼이나 자세가 좋으신 것 같아요. 무슨 옷을 입고 어딜 가든 돋보일 수밖에 없겠죠.”
“전 발레가 아니라 왈츠도 못 추…….”
“얘는 왜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걸까?”
아나스타샤가 급히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몸치에 가깝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중요한 건 네가 오늘 주인공으로서 확실히 돋보일 것이라는 것뿐이잖아. 안 그래?”
그녀는 분명 그렇게 되리라 믿는 듯했다. 난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후후, 사람들이 깜짝 놀랄 생각 하니 벌써부터 재미있는데. 그럼 나가 볼까? 유리 아저씨도 지금쯤 오셨겠지?”
“아, 그럴 거예요.”
“가 보자.”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분장실에서 나왔다.
“…….”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기다리고 있을 로비로 향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대부분 포멀하고 정갈한 복장들을 입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나와 아나스타샤의 드레스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그간 몇 번이나 무대 경험이 있지만 그래도 수많은 시선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난 움츠러들지 않고 똑바로 걸었다. 옆에 피아노는 없지만 곧 무대에 올라가면 그때 저분들이 내 청중이 된다. 밖에서부터 잘해야 한다.
난 지금부터 연주자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로비에 가자 몇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확 띄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가장 먼저 우리를 알아봐 준 것은 사샤였다.
“타티아나 누나! 아나스타샤 누나!”
곧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았고, 놀라움과 감탄이 눈빛에서 전해져 왔다.
난 사뿐히 다가가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살짝 들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는 놀라워하는 눈빛을 거두시곤 자상하게 말씀하셨다.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타티아나.”
“기뻐요.”
그렇게 아버지를 시작으로 다른 어른들과 한 분씩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아는 분들이 모두 다 오시진 못했다. 바쁘신 분들이 많아서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와 미하일 선생님, 구세프 선생님만이 와 주셨다. 하지만 난 이 분들이 와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기뻤다.
인사를 하고, 격려와 감사를 주고받았다.
특히 선생님들은 나와 강하게 악수를 해 주셨다. 평소보다 조금 더 억세고, 길었다. 손에서 손으로 어떠한 힘을 건네주시는 듯했다. 명망 있는 피아노 연주자인 선생님들의 힘을 두 분에게서나 받으니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른들과 인사를 나눈 후엔 학교 친구들의 차례였다.
가장 먼저 발렌티나가 감탄하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아나스타샤 작품이지? 쟤가 진짜 다른 건 몰라도 보는 눈은 조금 있다니까?”
“아하하, 맞아요. 발렌티나.”
발렌티나가 몇 번이나 그렇게 칭찬했고 나 역시 기쁘게 그녀에게 칭찬을 되돌려 주었다. 오늘 연주회에 맞게 발렌티나 역시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와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 리처드와 한승우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었다. 모두에게 티켓을 주면서 혹시라도 안 오면 어쩌나 생각했던 것은 모두 기우였다.
난 웃으며 말했다.
“와 주셨네요.”
“응. 귀 호강하러 왔어.”
“와야죠. 타티아나 후배님의 연주회인데.”
“티켓까지 받았으니까.”
그간 나와 몇 번이나 연습을 해 주었던 막심 선배는 당연히 결과물을 확인해야겠다는 투로 씩 웃었고, 니콜라이 선배와 리처드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한승우는 물끄러미 날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듯한 그를 보니 조금 재미있으면서도 기대되는 부분이 있었다.
“정말 예쁘다. 타티아나. 오늘 연주회 잘했으면 좋겠어.”
“……아, 고마워.”
어쩐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서 난 살짝 당황하기까지 했다.
한승우는 학기 초에 있었던 사건 이후로 날 훨씬 더 편하고 자신감 있게 대해 주고 있었다. 이전엔 같은 학교 친구로서가 아니라 유학생으로서 어쩐지 할 말을 제대로 못 하거나 조심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젠 전혀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와의 관계에 대해 어떠한 정리가 된 것 같다.
난 이전의 쭈뼛거리던 그도 좋았지만, 이렇게 보다 확실하게 가까워진 느낌을 받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세 명의 아이들도 있었다. 류보비와 아나톨리, 사샤가 올망졸망 모여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이야 말로 평소엔 나와 더없이 친밀하게 지내던 아이들인데 오늘은 굉장히 쭈뼛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드레스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세 분은 이리 오세요.”
“네?”
류보비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다. 난 더 말하지 않고 다가가서 세 명을 한 번에 껴안았다.
류보비가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언니! 드레스!”
“괜찮아요.”
아무래도 괜찮았다. 난 이 어린 친구들을 껴안아 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오늘 와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데요! 차도 보내 주시고.”
“저도요.”
“아하하.”
난 즐겁게 웃으며 아이들을 강하게 안아 주었다. 작은 호흡들이 내 앞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렇게 안아 주기도 힘들겠지. 하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안아 주고 싶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있다가, 팔을 풀고 허리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에르네스트였다.
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르네스트.”
“타티아나.”
에르네스트는 턱시도에 넥타이의 말쑥한 차림이었다. 그는 본래 슈트가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원래 나이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일 정도로 성숙한 모습이다.
난 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했다. 그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깜짝 놀랐어.”
“……? 왜요?”
“아, 그게……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려서.”
오늘 차림새와 달리 그 말투는 내가 아는 에르네스트 그대로였다. 난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난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호출이 오기 전에 시간에 맞춰서 말했다.
“이만 연주자 대기실로 가 볼게요.”
“음.”
아버지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렇듯 이젠 아버지의 손이 닿지 않는, 무대 위로 내가 올라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느끼신 것이다.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 긴 말씀을 하시는 분은 아니셨다. 단지 짧게 굵게, 응원하겠다고 해 주실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도 내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무대에서 봐.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그렇게 모두에게 응원을 다시 받고, 에르네스트가 나와 악수해 주었다.
그는 훨씬 더 진심을 담은 어투로 말했다.
“오늘 잘해.”
“예.”
“난 네게 마법 같은 것을 걸어 줄 줄은 모르지만…… 지켜봐 줄 테니까.”
나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이미 충분히 마법이나 다름없어요.”
지금 내가 잠깐 동안 이 소중한 사람들에게 건네받은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 에르네스트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게 있어서 분명히 마법이 되어 줄 것이다. 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난 빅토르만을 대동하고 연주자 대기실로 향했다.
“…….”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난 서서히 연주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들떠서 살짝 올라갔던 어깨는 자연스럽게 내려왔고, 빠르게 뛰던 심장도 편안하게 릴랙스되었다. 난 차분하고 냉철하게 내 몸의 컨디션을 확인했다.
연주자 대기실의 문 앞에 서서, 빅토르는 마지막으로 날 배웅했다.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예. 빅토르.”
난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대기실 문을 열었다.
“…….”
그간 몇 번이나 리허설을 하면서 지켜봤었다. 때문에 내심 소란스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2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기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각자 저마다 개인적인 준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편하게 풀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기강이 완벽하게 서 있다. 연주회를 앞두고 모두들 긴장하거나 흥분하는 대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 어느 한 명도 프로가 아닌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턱시도를 입은 커다란 남자가 날 돌아보았다.
“왔는가. 타티아나.”
“예. 스타니슬라프.”
지휘자 스타니슬라프는 근엄한 얼굴로 날 유심히 바라보더니 대뜸 물었다.
“컨디션은 어떻지?”
“완벽해요.”
“그리 보이는군.”
협연자의 컨디션이 가장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간 준비한 것들을 한 순간에 모조리 쏟아 내야 하는 연주자라는 직업상, 사소한 컨디션 난조가 연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내 컨디션은 최고로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친다.
내 눈빛을 확인한 스타니슬라프는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짧은 준비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오케스트라와 자네는 가깝고 긴밀하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늘 훌륭한 연주회로 그 결과를 모두에게 보여 주도록 하세.”
단 한 번의 기회로 그간의 노력과 우리의 유대를 모두에게 증명한다.
그때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오늘의 청중들은 금빛으로 번뜩이는 섬광이 검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겠군.”
무뚝뚝하고 근엄한 러시아 남자 그 자체인 스타니슬라프가 종종 쓰는 시적인 표현은 꽤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스타니슬라프가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들.”
그 한 마디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문제없나?”
마치 지휘자의 지휘에 반응하는 악기들처럼, 칼같이 맞춰진 듯한 대답이 뒤따랐다.
“예. 지휘자님.”
“좋아. 차분하게 기다리세.”
다시 대기실은 조용해졌다.
무대를 앞둔 연주자들이 내뿜는 호흡과 집중력이 하나로 엉켜서 크게 뭉쳤다.
그리고 이번엔 이 거대한 프로들의 고요에 나 역시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