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53화 (353/1,277)

##  353화

러시아는 매년 관광객이 3천만 명가량 찾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은 나라였지만, 그에 비해 여행객에 대한 편의성은 굉장히 뒤떨어지기도 했다.

차가운 북방의 사람들은 여행객에게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었고, 가는 길마다 영어로 병기된 표지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기본적인 키릴 문자는 읽을 줄 알아야 발음이라도 더듬거리며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어는 세계 여러 언어 중 난해하기로 손꼽히는 언어라서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습득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미국에서 온 여행객 올리비아는 러시아 모스크바 여행 이틀 만에 거의 학을 떼고 있었다.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티켓에 표시된 콘서트홀은 스마트폰의 지도를 사용해서 간신히 찾아왔다. 하지만 문제는 홀에 도착해서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콘서트홀이라면 당연히 영어로 된 안내 정도는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올리비아는 러시아어 외에 그 어떤 문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드넓은 로비와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올리비아는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의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아도 좋겠지만 무시당할까 싶어 고민되었다. 올리비아는 여행을 하면서 이틀 사이, 몇 명이나 되는 러시아인들에게 길을 물어봤다. 개중엔 분명 친절하게 영어로 답해 주는 사람도 있는 반면, 신경 쓰지 않고 인상을 써 버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올리비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쉽게 누구에게 물어보자니 겁이 났다. 그녀는 스스로 조금 더 찾아보기로 했다.

{어……디 보자.}

스마트폰으로 키릴 문자표를 띄운 그녀는 홀 여기저기에 있는 표지판들을 더듬거리며 읽고, 번역기로 그 뜻을 해석했다.

간신히 화장실이나 홀 입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카페테리아에 가서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주위를 둘러보던 올리비아는 용기를 내어 지나가던 한 여성을 불렀다.

“저기요.”

“?”

러시아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은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짧은 러시아어로 카페테리아가 어딘지 알고 싶다고 전해 보았다.

하지만 러시아 여성은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잠시 귀를 기울이는 것 같더니 고개를 저으며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욕을 먹거나 한 것도 아니고 말이 안 통한 것뿐이지만, 올리비아는 그것만으로도 맥이 빠질 정도로 지쳤다.

여행을 와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렇게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은 그녀에게 있어서 기분 좋은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일이었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고 여행객을 그리 반기지도 않는 것 같은 무뚝뚝한 사람들에게 몇 번 데이고 나니 낙천적인 그녀로서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살이 에는 듯한 추운 날씨.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빠르고 거친 러시아어. 거리에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싸늘하게 굳어 있는 표정으로 빠르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마치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나라처럼 이 나라는 정말 춥고 매서웠다.

그나마 올리비아가 불평불만을 쏟아 내지 않은 것은 모스크바에서 돌아본 관광지들이 너무나 예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도착한 이 차이코프스키 홀이라는 콘서트홀도 올리비아의 눈엔 거대한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미국에도 커다란 콘서트홀이라면 얼마든지 있지만, 클래식의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러시아에서 자신 있게 내세우는 이 홀의 웅장함과 고풍스러움은 미국이 따라할 수 없는 분야의 예술처럼 보였다.

{…….}

올리비아는 그냥 커피는 포기하기로 하고 눈앞에 보이는 안내소에 가서 팸플릿만 샀다. 문제는 팸플릿도 영어는 전혀 적혀 있지 않아서 러시아어뿐이었다.

이 러시아어까지 해석할 엄두가 나진 않아서 올리비아는 그냥 사진들만 봤다.

{……아.}

그렇게 사진을 보던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 그 협연자로 나온 어린 피아니스트는 정말 요정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예뻤다.

올리비아는 다시 키릴 문자표를 꺼내 들고 그 이름만 읽어 보았다. 타티아나라는 이름과 팸플릿의 사진은 그녀의 기억에 자리 잡았다.

로비에 혼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피아니스트 타티아나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았다.

타티아나는 아직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나오는 정보들은 아주 단편적인 것들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의 우승자로 아주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조금 더 기대를 가졌다.

그렇게 연주회 전까지 시간을 때우는 와중, 올리비아는 미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도 나누었다.

- {올리비아! 러시아는 어때?}

그녀의 친구 케이시는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 왔다. 올리비아는 간만에 듣는 친구의 영어에 반가워서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추워. 케이시.}

- {파하하하하, 춥겠지! 러시아잖아!}

{내가 미쳤나 봐. 왜 이 날씨에 여길 오겠다고 했을까.}

친구에게 자연스레 투덜거리게 되었지만 이렇게 춥다는 건 미리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올리비아가 말하는 춥다는 말은 비단 날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외롭다는 듯 말하는 친구가 안쓰러웠는지 케이시는 조금 더 따뜻하게 물었다.

- {그래서 지금은 어딘데?}

{응, 콘서트홀인데……. 춥고 힘든 거랑은 별개로 꽤 기대 중이야.}

- {올리비아 너 클래식에도 관심이 있었니?}

{아니, 그냥 그래. 그래도 러시아에 왔는데 연주회는 듣고 가야지. 안 그래?}

- {그것도 그렇지.}

올리비아는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클래식은 잘 모르지만 러시아에 와서 아무 연주회도 안 보는 것은 독일에 가서 맥주도 한 모금 안 마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잘 몰라도 가 봐야겠다는 강박이 약간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온 연주회가 마음에 들길 바라며 올리비아는 친구 케이시와 즐겁게 이야기했다.

한참을 그렇게 통화를 하던 올리비아는 문득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아무튼 말 안 통해서 답답한 것 빼면 그래도……. 어라.}

- {왜 그래? 올리비아.}

{잠깐만. 연주회 시작인가.}

올리비아는 불안하게 눈을 돌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한산해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연주회 시작까지 몇 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러시아어로 방송이 몇 번 나오긴 했지만 그게 홀로 입장하라는 뜻인지 올리비아가 알 턱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다급히 말했다.

{나 가 볼게. 이따가 전화해.}

- {응. 알았어.}

빠르게 전화를 마친 올리비아는 정신없이 스마트폰을 가방에 집어넣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칫하면 시간에 못 맞춰서 홀에 입장하지 못할 뻔했던 올리비아는 간신히 제시간에 입장할 수 있었다.

홀에서도 헤매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 객석 안내인인 어셔가 올리비아의 티켓을 받아 보곤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그녀는 빠르게 자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주변은 알 수 없는 언어들로 시끌벅적했고, 영어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친구와 영어로 대화했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올리비아는 괜히 조금 더 주눅이 들 것 같았지만 그래도 티켓값을 내고 클래식 음악회에 온 청중으로서 즐기기로 했다.

안내 방송이 몇 번 있었고, 주위로 사람들도 몇 명이나 지나다녔다. 올리비아는 신경 쓰지 않고 연주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고, 청중석을 밝히던 안내 등이 한 번에 꺼졌다.

“…….”

순식간에 소음들이 확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조명이 집중된 무대 위로 쏠렸다.

잠시 기다리자 한 여성이 나와서 마이크를 쥐고 러시아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인사하고, 박수갈채가 일고, 또 억양으로 느끼기에 무언가 소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느껴졌기 때문에 올리비아는 눈치껏 옆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 따라서 치고 경청하면 경청했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사실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러시아어 안내가 마무리되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박수가 이어진 다음 오케스트라가 무대로 입장했다.

“…….“

보통 생각하는 50명 가까이 되는 대인원의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 그 절반쯤 되는 규모로 얼핏 보기엔 무대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한 명 한 명이 내뿜는 분위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올리비아가 보기에도 이 소규모 오케스트라는 러시아에서 굉장한 실력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마다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등 악기들을 든 연주자들이 무대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보면대의 각도까지 세심하게 조절했다. 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청중에게 따로 인사를 하진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단원들과 조금 차별화된 멋진 차림새의 여성이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 위로 입장했고, 바로 지휘봉을 든 큰 키의 노신사도 입장했다.

두 사람은 각각 오케스트라의 악장과 지휘자였다.

갑자기 우렁찬 박수가 쏟아졌고, 올리비아는 깜짝 놀라 그 박수에 동참했다. 악장과 지휘자는 박수에 짧은 묵례로 화답했다. 그리고 다른 단원들을 대표하는 악장이 잘 부탁한다는 듯 지휘자와 가볍게 악수를 했다.

오케스트라라는 수십 명의 사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악기가 어떤 질서로 운영되는지 한눈에 보아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했다. 올리비아는 그 절도 있는 모습에 조금 감탄하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협연자가 입장했다.

“……!”

순간 올리비아는 물론 온 객석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협연자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사진으로 보고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지만, 실물로 보니 사진은 실물의 절반도 제대로 못 담아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그 머리색과 닮은 금빛 드레스가 완전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부담스러운 화려함이 아니었다. 은은하게 빛을 머금는 듯한 분위기는 고상한 기품을 드러내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자연스럽게 무대 위로 향했다. 예스럽게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자세는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가 아니라 런웨이의 모델처럼 느껴졌다.

잠시 넋 놓고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던 것은 올리비아뿐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침묵하고 있는 것도 청중들의 예절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인가 시작되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곧 그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박수 중 가장 큰 소리가 되어 타티아나에게 향했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박수 세례를 받으면서 타티아나는 당당한 태도로 무대로 올라섰고, 지휘자 그리고 악장과 차례로 짧게 악수와 미소를 나누고는 객석을 향해 살짝 돌아섰다.

그리고 마치 천사처럼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묵례를 전했다. 박수 소리가 폭발할 것처럼 커졌다.

올리비아는 벌써부터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쓸리듯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러시아 청중들의 반응은 강렬했다. 올리비아는 잔뜩 기대하며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쳤다.

잠시 후, 언제 어디서부터 박수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어디서부터 끝났는지 모르게 박수 소리는 잦아들었고,

곧 묵직한 침묵이 청중들 사이에 내려앉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자리를 점검하고 자세를 바로 했으며, 지휘자는 지휘을 든 채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엔 한 마디의 말도 없었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일련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눈빛과 긴장감이 오가는 무대를 보며 올리비아는 숨을 죽였다. 곧 연주가 시작될 분위기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었다.

“…….“

다시 마지막으로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막 연주회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이 클래식 연주회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벨소리가 침묵을 뚫고 터져 나왔다.

“……!?”

1700명이 숨을 쉬고 있는 공간에서 작은 벨소리는 정말 미약했지만 연주 시작 전의 긴장감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지휘자가 막 들어 올린 지휘봉을 모로 내려놓으며 객석을 휙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누구라도 목을 졸라 버릴 듯이 살벌했다.

그리고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올리비아는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을 느꼈다.

벨소리가 올리비아의 가방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등골이 싸늘했다.

가히 천 명은 되는 사람들의 비난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 시선은 거의 창칼처럼 올리비아의 전신을 꿰뚫었다.

야속한 벨소리는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올리비아는 숨도 제대로 못 쉴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가방을 쥐었다. 비난의 시선은 점점 살기 어린 시선으로 바뀌어 갔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퉁명스럽고 차가운 목소리들이 올리비아에게 날아들었다. 모두 굉장히 공격적이고 날카로웠다.

연주회장에서 스마트폰을 꺼야 한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급히 들어오느라 깜빡했고, 또 스마트폰을 꺼 달라는 러시아어 안내는 알아듣지도 못해서 까맣게 잊고만 있었다.

변명할 말은 있었지만 큰 실수 앞에 변명은 무의미했다.

안 그래도 싸늘하고 무뚝뚝했던 러시아인들이 여행객을 얼마나 더 한심하게 볼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올리비아는 울먹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스마트폰을 찾아냈다. 터치를 해서 전화를 끊으려는데 압박감이 너무 심해서 어떻게 화면을 눌러야 할지도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빨리 하려고 할수록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였다.

“!?”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대에서 연주되는 피아노에 모두가 깜짝 놀라 올리비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시선은 객석으로 향한 채 피아노로 벨소리를 즉석 연주했다.

간단한 멜로디의 벨소리는 두어 번 타티아나의 귀에 들린 것으로, 다시 그녀의 손에서 멋진 피아노곡으로 재탄생되었다.

1700명의 짜증과 분노는 순식간에 감탄과 웃음으로 바뀌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로 순식간에 청중 모두의 시선을 끌어들이며 악감정을 좋게 되돌려 놓은 것이다.

그사이에 올리비아는 빠르게 전화를 끌 수 있었다.

벨소리가 멈추고 나서도 타티아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

단순하게 시작되었던, 가벼운 코드와 함께했던 피아노 연주가 조금 더 화려함을 더해 가면서 두터워져 갔다.

타티아나는 홀에서 벨소리를 울린 청중에게 무안을 주기보다, 그 벨소리에서 영감을 얻어 멋진 즉흥연주를 선보여 주겠다는 듯 보다 빠르고 멋지게 연주를 해 나갔다.

청중들은 멀리서 들리는 벨소리를 한 번 듣고 바로 피아노로 재현해 내는 그 실력과 배려심에 감격했다.

오케스트라는 돌발 상황에 약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곧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어 올리자 바로 자신의 악기에 집중했다.

지휘자는 타티아나가 다시 한 번 벨소리 주제를 반복함과 동시에 먼저 바이올린 쪽으로 지휘봉을 향했다. 악장이 센스 좋게 피아노 소리에 맞춰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그 악장의 의도와 해석을 한 번에 알아차린 단원들이 곧바로 거기에 소리를 더했다. 마치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단원들은 하나처럼 움직였다.

보다 화려해진 즉흥곡은 타티아나의 두텁고 확고한 박자감과 화성 진행을 기반으로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소리들을 하나씩 더해 갔다.

어느 하나 빈 부분이 없었고, 비틀거리거나 어긋나는 부분도 없었다. 타티아나의 실력과 그것을 믿는 오케스트라의 멋진 협주곡이었다.

“…….”

모두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리허설 없이 즉흥연주를 하는 잼jam이 밴드가 아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실력 있는 음악가들이라면 즉석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연주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완성도 높은 연주는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즉흥연주를 들으며 울먹임을 멈추고 멍하니 그 음악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가방에서 울렸을 땐 악마의 목소리처럼 들리던 벨소리였지만, 이렇게 무대에서 연주되자 천사들의 하모니처럼만 들렸다. 같은 멜로디인데도 이렇게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이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한순간의 해프닝처럼 일어났던 연주는 마지막으로 타티아나의 엄청난 기교를 보여 주는 듯한 옥타브 아르페지오와 오케스트라의 화려함으로 클라이맥스로 치달았고, 눈빛만으로도 그 전부를 통제하는 지휘자의 지휘로 멋지게 마무리되었다.

“브라보!”

여기저기서 엄청난 환호성이 일었다. 웃음소리와 박수, 고함 소리가 홀에서 메아리쳤다.

몇 분도 되지 않는 짧은 곡이었지만, 그 어떤 곡도 이렇게까지 청중들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할 순 없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잔뜩 흥분한 청중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다가, 한참이나 멀리 있는 올리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 옆자리를 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올리비아는 확실하게 타티아나와 눈을 마주쳤음을 직감했다.

이 어두운 객석에서 청중들을 어떻게 구분하는진 알 수 없지만, 울먹이고 있을 때부터 타티아나는 올리비아를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

타티아나는 올리비아를 보며 양 손바닥을 포개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볼에 가져다 대었다. 무슨 뜻인진 분명했다. 스마트폰을 꺼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제스처마저도 귀여웠지만, 올리비아는 타티아나가 보여준 배려심에 더없이 감동했다.

크게는 연주회의 분위기가 저해되고, 작게는 올리비아가 부끄러움에 연주회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해프닝이었지만 타티아나의 재치 있는 대응으로 너무나 분위기 좋게 해결된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차갑고 무섭다고 생각하며 겁을 먹고 있던 올리비아는 이 러시아 피아니스트 소녀에게 너무나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는 당황과 창피함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던 것과 또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미 팬이라면 충분히 있을 것 같지만, 올리비아는 그녀의 열렬한 팬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한바탕 해프닝이 그렇게 지나가고, 다시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바라보는 것으로 객석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보았던 그 엄청난 연주는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고, 훨씬 더 엄청난 기대감과 흥분이 홀 전체에 꿈틀거렸다.

아마 그냥 연주를 시작하는 것보다 부담감은 배가 되었을 테지만,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곧게 폈다.

조용한 열기가 들끓는 홀에서,

지휘봉에 맞춰 모든 악기가 한꺼번에 울었다.

본무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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