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악장 크리스티나는 의자에 앉아 엄숙하게 시간을 기다렸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수백 번의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거쳐 온 그녀는 긴장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이올린의 활을 들고 가볍게 위아래로 까딱이면서 그 무게를 손가락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익숙하면서도, 아직도 완전히 자유자재로 다루기 힘들다는 생각이 종종 드는 무게감. 한 번씩 까딱일 때마다 크리스티나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준비되어 간다.
“…….”
연주회 1부에 대한 찬사와 응원으로 조금 느긋해져 있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크리스티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원들은 모두 각각의 방법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자기 악기를 점검하는 단원, 두 손을 모아 쥐고 짧은 기도를 하는 단원,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고양이 사진들을 검색해 보는 단원까지.
“저게 도움이 되나……?”
크리스티나는 중얼거리다가 픽 웃었다. 정말 도움이 된다면 문제없었다. 나중에 한번 해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크리스티나는 수십 명의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
함께 협연하는 피아니스트, 타티아나는 의자에 앉은 채 한 팔로 반대쪽 어깨를 스트레칭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자기도 모르게 타티아나가 하는 스트레칭을 작게 따라 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단순한 동작인데도 도저히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대단하네.”
우아하게 몸을 비트는 유연함과, 팔의 각도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계산한 듯한 완고함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건 마치 타티아나의 연주와도 닮아 있었다. 올곧고 강인하면서도 짙은 페이소스를 담고 있는 연주. 그 피아노 소리에 크리스티나는 반해 버렸었다.
감탄하면서 보고 있자니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직 소녀인 피아니스트는 옅게 웃으며 친근감을 표시해 온다.
크리스티나는 마주 미소를 보내고, 일어나서 그 곁으로 갔다.
“어떠니? 타티아나.”
“좋아요.”
타티아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티나는 그간 그녀와 리허설을 가지면서 단 한 번도 그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다네르가 추태를 보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티나는 타티아나가 상관없다는 듯 대답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타티아나. 네가 우리를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는 만큼 우리도 널 믿고 있다는 건 알지?”
타티아나는 기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후후, 항상 절 봐주고 계신다는 건 알아요.”
“겸손은 됐어, 얘.”
어린 연주자들과 협연을 할 땐 오케스트라가 정말 협연자의 사정을 봐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기도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미 봐줄 필요가 없는 강렬한 피아니스트였다.
크리스티나는 그저 공통된 음악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에 약간의 긴장을 느꼈다.
타티아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크리스티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전했다.
“2부도 잘 부탁해.”
“예. 크리스티나 악장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다음의 대화는 무대 위에서 악기로 이어 나가면 될 것이다.
“…….”
잠시 기다리자 분위기가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대기실 밖의 홀에선 청중들이 자리에 앉는 소리와 사회자의 안내가 뒤섞이며 웅성거렸다.
그리고 단원들도 무대에 서야 할 시간이 왔음을 깨닫고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수백 번 무대에 선 연주자도 이 시간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시간인 것이다.
그때, 한 목소리가 대기실을 장악했다.
“준비들 되었나.”
지휘자 스타니슬라프의 카리스마 있는 한마디. 단지 그것만으로 이곳저곳에서 두서없이 느껴지던 긴장감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수십 명의 단원들이 보내는 긴장과 신뢰. 그것은 엄청난 압박감임이 분명함에도 스타니슬라프의 태도엔 흔들림이 없다. 크리스티나는 이런 멋진 지휘자와 함께 오케스트라를 꾸려 나간다는 것에 자긍심을 느꼈다.
준비된 오케스트라가 침착하게 무대를 기다리기를 몇 초, 대기실의 직원이 무대로 입장해야 할 순서임을 알렸다.
“가세.”
오케스트라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소리가 끝났다.
그대로 하나의 악기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케스트라는 무대로 향했다.
엄청난 박수가 그들을 환영했다.
***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은 무대에 올라선 바로 자기 자리에 앉은 뒤 보면대를 조절했다.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지만 단원들이 청중들에게 인사를 일일이 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지휘자와 악장의 역할이었다. 로만은 그렇게 대표에게만 인사를 시키는 건 참 합리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단원은 오케스트라라는 한 악기의 각 성부로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악기에 집중하던 로만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금빛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가 마지막으로 입장해서 악장, 지휘자와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
타티아나는 악수를 마치고 청중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차분하게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고 고개를 든다. 화려한 드레스는 종종 연주자의 이미지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타티아나의 드레스는 그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충실하게만 보였다.
박수가 잦아들고 침묵이 내려앉는다.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피아노를 보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스타니슬라프와 눈빛이 오가고, 오케스트라 전원의 호흡이 합쳐졌다.
스타니슬라프가 지휘봉을 들었다.
“…….”
빠른 팀파니의 롤.
침묵이 장악하고 있던 홀에 거대한 폭풍우가 몰려들었다.
로만이, 다네르가, 크리스티나가 그리고 모든 단원들이 그 폭풍우 가운데에 벼락을 꽂아 넣었다.
“!”
번쩍이는 벼락과 함께 나타난 타티아나는 재차 천둥과도 같은 소리를 폭발시키며 강렬한 메인 테마를 그려 냈다.
천둥 그 자체가 무대에 내려앉은 것처럼, 타티아나는 그렇게 음악을 크게 열어젖힌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op.16
19세기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는 노르웨이의 쇼팽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피아노곡들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리그는 소규모의 소품곡들을 작곡하는 데에 재능이 많았으며 거대한 대작을 쓰거나 논리적이고 치밀한 구성으로 작곡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평생에 걸쳐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을 1곡씩 남겼고 오페라는 아예 쓰지 않았다.
그러나 25세의 그리그가 젊은 패기와 음악가로서의 자신감, 노르웨이인으로서의 혼을 담아내 작곡한 단 한 곡의 피아노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인류 역사상 최고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
1악장 알레그로 몰토 모데라토. 매우 빠르지만 정확하게.
피아노가 4도 옥타브로 하행하는 웅장한 도입에 이어 영혼에 파고드는 듯한 호소력 깊은 선율로 윤곽을 그려 냈다.
스타니슬라프의 지휘에 따라 이어지는 오보에의 수심에 찬 소리, 클라리넷의 낮은 신음 소리.
1관 오케스트라이지만 목관을 더블링 하고 트럼펫을 강화한 이 구조에서 그리그의 음악은 한층 더 심원하게 울려 퍼진다.
천둥과 번개로 시작하여 북유럽 신화의 전설을 노래하는 듯한 깊고 웅혼한 소리다.
“…….”
로만은 악장 크리스티나의 선도에 따라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모든 것은 현악기들을 통해 격화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러시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정말 다른 분위기와 풍경을 지닌 곳이었다.
그 풍경을 직접 보기 위해 타티아나와 오케스트라는 단체로 노르웨이에 다녀오기도 했었다.
하나가 된 음악가들은 그때 보았던 아찔한 피오르드와 차갑고 건조한 바람, 노르웨이의 것들을 이곳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홀에 불러들였다.
피아노는 잔잔하게 흐르는 강을, 오케스트라는 그 주변을 둘러싼 것들을 하나씩 쌓아 올리듯 만들어 나갔다.
세기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가 스칸디나비아의 혼이라고 극찬을 했던 협주곡은 순식간에 홀을 피오르드 사이의 물결로 초대했다.
피아노가 그 사이를 안내하듯 생기 있고 변덕스러운 리듬으로 앞장서 나갔다. 충동적으로 들리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그 뒤를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앙증맞은 음색이다.
스타니슬라프가 지휘봉을 휙 흔들며 첼로 쪽을 이끌었다. 신호는 빠르게, 지시는 감정적으로. 첼로는 호소력 넘치는 음향으로 피아노를 뒤따른다. 그리고 그것을 피아노가 더 정교하고 알기 쉽게 그려 냈다.
열다섯 살의 연주자의 연주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섬세함과 완성도이다.
본래 수학과 출신인 로만은 수학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이 음향의 정체성에 대해 분석하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분석과 증명도 의미 없었다.
그저 자명하다.
타티아나의 피아노는 그 자체로 음악의 훌륭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어린 연주자의 음악에 오케스트라가 보낼 것은 경탄의 음악뿐이었다.
스타니슬라프가 보다 격정적으로 지휘하며 오케스트라를 피아노 쪽으로 밀어붙였다. 마치 지휘봉 끝에 모든 단원들의 신경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부분에 대해 크리스티나가 다시 주의를 주었다. 로만 역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역할에 충실하게 연주에 임했다.
협주곡은 피아노의 주제를 받은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합주가 점점 더 커지다가 트럼펫과 트럼본의 짧은 하이라이트로 마무리되고, 다시 되돌아갔다.
“…….”
노르웨이의 풍경과, 물결을 따라 흔들리다가 경쾌하게 통통 튀며 모두를 이끄는 피아노. 이 독립적인 주제는 되풀이되면서 보다 섬세하게 장식되었다.
로만은 집중력을 곤두세우며 연주했다.
그리그의 그림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선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엄청난 단결성을 요구했다.
십수 개의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마치 피라미드처럼 긴밀하게 응집하고 그 거대한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피아노가 올라가 있으면서도 위태롭지 않게 들려야 했다.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케스트라와 타티아나는 멋지게 해내고 있었다.
스타니슬라프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제각의 뛰어난 실력을 하나 된 카리스마 아래에 집중시켜서 가장 견고하고 화려한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타티아나는 특유의 박자 감각과 균형 감각으로 완벽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볼품없이 흔들거리거나 균형을 잡으려 팔을 휘젓지 않는다. 엄숙하면서도 진중하게. 마치 스칸디나비아의 음악은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듯한 태도다.
로만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견고한 음악을, 타티아나는 벌써부터 깨닫고 제대로 구사하고 있었다.
감탄과 감동.
그렇게 하나로 흐르던 주제는 오보에를 선두로 하는 오케스트라의 클라이맥스를 딛고, 피아노 카덴차로 향했다.
스타니슬라프의 팔이 멈췄다. 지휘봉이 내려가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팔도 멈췄다.
모든 관현악기들이 침묵하는 사이, 타티아나의 손만 빠르게 건반을 연주했다.
얇은 선율의 아르페지오로 높게 향하여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내려와서 서서히 시작한다. 작은 소리로 시작했던 피아노 솔로는 점점 커지다가, 양손의 옥타브로 쾅 하고 무대를 울렸다.
“!”
다시 한 번 노르웨이의 매력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첫 주제였지만, 이번엔 오케스트라가 함께하지 않았다.
피아노가 홀로 오케스트라 전체가 뿜어내는 음향을 그대로 그려 낸다.
일전에 타티아나는 혼자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 낸 적도 있었지만, 총보를 요약해서 협주곡을 홀로 연주한 것과 이렇게 작곡가가 무대에서 피아노에게 모든 책임을 집중되게 한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타티아나는 그 막중한 책임을 온전히 짊어졌다.
요령 부리지 않고, 비틀거리지 않고.
열다섯 살 연주자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타건으로 피아노를 내리찍고, 그 사이 오케스트라가 맡았어야 할 음향까지 세부적으로 모조리 다 묘사해 냈다.
‘보면 볼수록 엄청난 실력이군.’
로만은 멍하니 바이올린과 활을 늘어뜨린 채 타티아나의 피아노에 전율했다. 리허설을 할 때 봤던 것과 무대에서 보는 것은 또 다른 인상을 주었다. 타티아나는 무대에 올랐을 때 더더욱 강인해졌다.
피아노를 내려다보는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그 손끝엔 피아니스트의 정수가 맺혀 있다.
압도적인 기교와 영혼을 사로잡는 듯한 음색이었다.
로만은 타티아나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는 본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인정 이전에 선험적인 인식으로 이 음악을 이루는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영혼을 건반에 싣는 방법을 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타티아나의 양손이 잔상을 그리며 피아노에 닿을 때마다, 로만은 소름이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지독하게 어렵고, 화려하고, 짙은 피아노가 무대를 다른 모든 오케스트라를 집어삼키고 홀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뇌리를 잠식한다.
그 강대한 영향력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홀을 장악한 타티아나의 피아노가 점차 잦아들고, 스타니슬라프의 지휘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였다.
크리스티나를 필두로 모든 단원들이 다시 악기를 들었다.
“…….”
스타니슬라프가 천천히 지휘를 시작했다. 피아노가 홀로 보여 준 연주에 경의를 바치듯 시작된 관현악은 화려한 피날레를 위해 카펫을 깔고 꽃을 장식한다.
타티아나는 도도한 걸음으로 그 위에 등장해서는, 처음 보여 주었던 강렬한 하행 화음으로 시작하여 마치 무대 전체를 한 바퀴 빙 돌아 음악을 흩뿌리는 듯한 마무리를 짓는다.
로만은 그 마무리에 어울리도록 최선의 소리를 마지막까지 뽑아내었고, 정확하게 1악장을 마무리 지었다.
“…….”
곡이 끝난 것은 아니었기에 박수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청중석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로만은 청중들의 표정에 감탄과 놀라움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과학적으로만 따지고 들 순 없는, 정말 기적과도 같은 연주였다. 로만은 무대에서 이런 연주는 자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이 귀중한 기회를 맘껏 누리고 싶었다.
로만은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다음 악장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