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59화 (359/1,277)

##  359화

양손으로 마지막 음을 짚은 채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스타니슬라프는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피날레를 장식하는 거대한 화음을 지휘하다가, 절도 있게 지휘봉으로 허공을 베었다.

그가 벤 것은 이 공간에 맴돌던 음악의 끝이었다.

모든 관현악과 피아노가 동시에 멎었고, 1악장이 끝났다.

“……후.”

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숨을 고르며 잠시 어깨를 늘어뜨렸다.

멋진, 정말 멋진 오케스트라다. 스타니슬라프의 깔끔한 해석과 통제력. 거기에서 비롯되는 오케스트라의 정제된 합주력은 흠잡을 곳 하나 없었다.

난 이 대단한 오케스트라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잘했을까.

“…….”

스타니슬라프의 마무리 지시를 받느라 고개를 들고 있던 나는 갑자기 시선을 돌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뚝뚝하고 근엄한 지휘자 스타니슬라프는 잠시 날 내려다보다가, 드물게 눈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 눈웃음만으로도 충분했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니슬라프 역시 마주 답하고는, 지휘봉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들었다.

스타니슬라프는 사소한 부분도 아주 정밀하게 지휘하는 지휘자였다. 빠르고 폭발적인 음향이 필요한 악장은 지휘봉을 사용해서 매섭게, 느릿느릿하고 상냥한 지휘가 필요한 악장은 맨손으로 부드럽게 구분지어 지휘한다.

손끝이 치켜올려지는 것과 동시에 모든 악기가 준비되었다. 스타니슬라프는 한 번 오케스트라를 일견하는 것으로 확인을 마치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손의 궤적에 따라 음악이 샘솟아 난다.

“…….”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 조표는 내림라장조. 악장지시는 아다지오. 천천히.

따뜻한 현악기들의 소리가 풍성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원래 소리를 보다 작게 내기 위해서 현악기들에 약음기를 끼고 연주해야 하는 부분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이끄는 현악기들이 약음기 없이 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율을 연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난 딱 한 번 그녀의 연주를 들어 보고 승낙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제시하는 주제는 가늘고 소담하지만, 훨씬 길고 선명하게 뻗어 나가며 2악장을 품격 있게 그려 나갔다.

너무나 따스한 소리라서 가슴이 한편이 사르르 떨려온다. 난 가만히 손을 내린 채, 고개를 들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지금 이 음악들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

손끝으로만 오케스트라를 움직이는 듯한 스타니슬라프의 지휘에 따라 호른과 트럼본이 스며들어 음악의 색을 서서히 물들였다. 보다 황홀하게 느껴지는 음색이 흐른다.

나는 호흡을 천천히 갈무리하며 이 음악의 흐름에 집중했다.

해질녘의 갈대가 흔들리는 언덕. 기분 좋은 바람이 들판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나지막한 소리는 저녁식사를 알리는 듯하다.

들판에 앉아 평화로운 한때를 만끽하던 나는 호른의 소리가 스러질 때쯤, 스타니슬라프의 손짓에 따라 들판에서 일어섰다.

볼에 바람이 스치운다.

일어선 나는 그대로 두어 걸음 움직이고, 다시 몇 걸음 짧게 걷는다. 바람이 불어온다. 음악은 나를 데리고 간다.

보다 빠르게 달음박질하다가, 자리에서 춤을 추듯 손을 흔들었다.

플루트와 바순의 소리가 어둑하게 깔린다. 난 살며시 손을 들어 건반을 터치했다. 내 피아노 소리는 관현악이 선사하는 거대한 풍경 위에 몸을 싣는다.

조금 축소되었지만 아름답고 단정하게 이루어진 메인 테마. 기다란 아르페지오로 드라마틱하게 이어 나가며 노래한다.

천천히 움직이던 음악은 내 연주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피를 키워 나간다. 양손으로 건반을 누른다. 피아노가 아닌 음악 그 자체를 누르는 듯한 기분으로, 음악을 넓혔다.

악기들이 공명한다. 눈앞에 보이던 풍경이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간다.

장대한 풍경을 앞에 둔 감동은 억누를 수 없다.

나지막하지만, 동시에 열광적으로 노래하고 싶은 감정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호른이 나와 공명하듯 조금 더 커졌다.

“…….”

이쪽을 보고 있던 스타니슬라프가 나만이 느낄 수 있도록 짧게 신호를 주었다. 오케스트라와의 균형을 어느 정도로 맞추면 될지 정확하게 지시해 주는 것이다.

난 그 지휘에 맞춰서 조금 더 정갈하게 음악을 가다듬었다. 손끝의 감각에 더더욱 집중한다. 쉽지 않은 리듬이다. 오케스트라의 소리와 스타니슬라프의 지휘, 그리고 내가 다루는 피아노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으며 연주했다.

기분 좋은 통일성이 느껴졌다. 난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무대의 천 배는 될 법한 들판을 산책하듯 천천히 걷던 음악은 먼 풍경을 그리듯 사라졌다.

“…….”

2악장의 여운이 가시기를 기다렸다가, 스타니슬라프는 조용히 지휘봉을 들었다.

목가적인 주제는 끝났다.

스타니슬라프가 오른손에 쥔 지휘봉으로 허공을 톡톡 짚었다. 마법이 터지듯 악기들의 소리가 톡톡 터진다.

정확한 리듬감으로 오보에가 울고 바이올린들의 피치카토가 함께했고, 지휘봉이 크게 치솟았다가 양손과 같이 떨어졌을 때, 난 손을 들어 건반 위로 내렸다.

양손으로 순식간에 격렬하게 치솟는 아르페지오를 선보이고, 막 가라앉으려던 음악을 끌어 올려 무대 위로 던졌다.

날것으로 무대 위에 떨어졌던 음악은 생동감 있게 살아 숨 쉰다.

리듬에 몰두했다.

3악장은 다시 가단조. 악장 지시에 붙은 마르카토marcato는 모든 음을 똑똑하게 강조함을 말한다.

분위기 있고 품격 있게.

음악의 질감을 다듬는다는 느낌으로 리듬을 연주해 나갔다.

노르웨이의 민속춤인 홀링에 기반한 2/4박의 연주가 경쾌하게 춤춘다. 오른손을 튕기듯 가볍게 움직이고, 스텝을 밟듯 한 건반을 찍고, 다시 되돌아간다.

민속춤은 대중적이어야 한다. 너무 빠르지 않게 노르웨이의 특징을 살려 음악성을 끌어올렸다.

익살스럽게 허리를 비틀다가,

발을 구른다.

폭발하듯 호응하는 오케스트라가 마치 수백 명은 되는 것처럼 무대 위에 등장했다. 무대를 무너뜨릴 거대한 걸음처럼 들리는 팀파니와 관현악의 조화. 어마어마한 음의 무게감이 날 덮친다.

난 가만히 받아들이고, 더 정교하고 우아한 음악으로 대응했다.

하딩 휄러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한 치만 어긋나도 엉망이 될 음악을 절묘한 균형감으로 키워 나간다.

이렇게 여러 악상들이 맞물리는 경과구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운 음악을 이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선 스타니슬라프와 며칠이나 회의를 거쳤던 부분이었다.

고심했던 만큼, 성과는 확실했다.

가단조에서 바장조로 이조되며 강렬한 대비를 보이는 음악은 어느 한곳 흐트러짐 없이 하나의 주제로 마침표를 찍었다.

“…….”

두 번째 주제는 조금 더 서정적인 관악기들의 합주로 시작되었다.

난 거기에 천천히 피아노 선율을 더했다. 오케스트라는 내게 자리를 비켜 주듯 양옆으로 스르르 물러났고, 곧 난 중앙에 설 수 있었다.

선율을 반복하면서 조금 더 섬세하게 주변을 묘사해 나갔다.

천천히 무대 위를 걸으면서 이쪽에 색을 더하고, 저쪽엔 꽃을 꽂았다. 과일 나무와 구름, 새소리가 함께한다.

장식된 무대 위에서 다시 한 번 춤곡이 시작된다.

피아노가 먼저 홀링을 추다가 발을 구르면 오케스트라가 따라붙는다.

난 집중해서 건반을 컨트롤했다. 첫 주제와 똑같았지만 결코 똑같지 않다. 이다음 찾아들 거대한 음악을 암시하듯 조금 더 화려하고 색채감 있는 소리를 끼얹는다. 아주 미묘한 뉘앙스 차이이지만 이 작은 흐름이 주는 영향이 청중들에게 어떻게 들리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음악은 전개되고 커져 나가면서 보다 큰 덩어리를 이루어 나갔다. 난 수십 명의 베테랑 연주자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실력을 거침없이 선보였다.

시야 저편에서 스타니슬라프가 격렬하게 지휘봉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가느다랗고 긴 봉에 불과하지만 정확하게 움직이며 리듬을 전달하고, 각 연주자들을 짚으며 필요한 소리들을 이끌어 내는 모습은 하나의 악기를 다루는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묘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다루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내가 마주해야 하는 하나의 대등한 악기였다. 난 보다 깊게, 더 깊게 피아노에 파고들었다.

“……!”

그리고 가장조로 이조하여 프레스토에 가깝게, 난 한 발자국 먼저 3/4의 템포로 보다 빨라진 춤곡을 연주했다. 노르웨이의 산악 지방에서 전해지는 무곡이다.

스타카토로 뛰노는 리듬이 무척이나 흥겹다. 양손이 빠르게 도약하면서 마치 리스트의 카덴차처럼 들리는 이 구간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구간이기도 했다.

모두를 이 음악에 빠뜨릴 수 있도록 온 신경을 쏟아붓는다.

오케스트라가 천천히 합류하면서 음을 쌓아 나갔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음들은 단단하게 응축되어 음악의 성이 되었다.

춤곡이 끝나고 드러난 화려한 성은 교향악이 보여 줄 수 있는 예술의 힘이다.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절로 고개가 젖혀진다. 거대한 위용과 아름다움에 자연스레 감탄이 나온다.

감동을 담아 그 감정을 폭발시킨다.

훨씬 더 강렬하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건반이 순간적으로 오케스트라의 견고한 성문에 파고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오케스트라는 날 거부하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나는 성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악단과 함께 이 음악의 마지막을 향해 간다. 치솟아 오르는 화성이 마치 오페라의 피날레처럼 홀을 울렸다.

오페라를 쓴 적이 없는 그리그였지만,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한 장대한 오페라는 바로 여기에 존재했다.

모든 악기의 소리가 한데 얽혀 공명하고, 스타니슬라프의 지휘봉이 내려가는 것으로 이 가슴 벅찬 음악은 마무리되었다.

“브라보!”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에 집중하고, 손을 떼자마자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커다란 박수와 환호가 일었다. 수많은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났음을 느끼고, 나는 탈력감을 느꼈다.

집중이 풀어진 뒤엔 피아노 너머의 현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파악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중요한 건 내가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고개를 들자 시야에 들어오는 단원들 모두 이 피아노 협주곡에 만족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타니슬라프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본다.

“스타니슬라프.”

비로소 난 입을 열며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스타니슬라프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포옹하고, 이어 자연스럽게 크리스티나와 포옹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오케스트라의 대표인 이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던 것처럼, 이번엔 청중들의 찬사 속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축하하는 포옹이었다.

그런데 크리스티나와 포옹을 마치고 나서도 난 한 사람이 더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타티아나.”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박수 소리 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분명히 내게 닿았다.

보통은 지휘자, 악장과 인사하면 끝이라지만, 로만은 그 고착화된 문화는 상관없이 나와 인사하고 싶은 것 같았다. 너무나 기쁘고 반갑다. 그렇다면 나도 딱딱하게 굴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난 로만에게 다가갔다.

수학과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그는 어떻게 보면 스타니슬라프보다 더 무뚝뚝한 표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정말 환하게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악수 요청을 무시하고 아예 포옹해 버렸다.

“!?”

로만이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난 바이올린 연주를 너무 멋지게 해 준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팔을 풀고 놓아주니 로만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스쳤다가, 곧 기쁨이 완연해졌다.

로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난 옆에 있는 모두를 한 명씩 다 포옹하며 우정과 친애를 표했다. 1관 편성의 오케스트라라 인원수가 적어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였으면 박수를 치고 있는 청중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할 엄두를 내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인사가 길어져서 혹시 실례가 되진 않을까 약간 염려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박수 소리는 줄어들긴커녕 더더욱 커져만 갔다.

“멋졌어요.”

총 23명. 한 명 한 명과 모두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다시 스타니슬라프에게 돌아갔다.

스타니슬라프는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고, 나는 왼손으로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무대 앞에 나란히 선 채 청중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브라보!”

“앙코르!”

다시 한 번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 청중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모두 보일 것 같다.

난 스타니슬라프를 돌아보며 웃었다. 협연을 준비하는 내내, 그리고 무대에서도 믿음직스럽게 모두를 이끌어 주었던 그에게 감사하다.

아직 모자란 점이 많은 내가 이렇게나 연주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게 함께해 준 동료 음악가들도 너무나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은 나 자신에게도 오늘만큼은 잘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잠시 나갔다 오세.”

끝없이 쏟아지는 박수 세례 속에서 스타니슬라프가 먼저 내 손을 살짝 끌며 에스코트했고, 난 그를 따라 무대를 빠져나갔다.

지휘자와 피아노 연주자가 무대 밖으로 나가니 박수 소리는 커튼콜이 되었고, 1700명이나 되는 청중들은 하나 된 호흡으로 천둥처럼 울리는 박수를 쳤다.

1부를 마치고 그랬던 것처럼, 난 그 커튼콜에 이끌려 무대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내가 무대 위로 다시 올라서자 함성이 일었다.

이 커튼콜은 몇 번 정도 더 즐길 수도 있었고, 그건 연주자의 권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존경하는 음악가들과 청중들. 같은 음악을 향유하는 이 고마운 사람들에게 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런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음악, 오직 음악뿐이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커튼콜 소리가 뚝 멎었다.

다행히 난 이 멋진 청중들에게 선물할 앙코르를 몇 곡이나 준비해 온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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