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60화 (360/1,277)

##  360화

열렬하게 박수를 치던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피아노에 앉음과 동시에 손을 멈추었다.

한 번의 커튼콜이면 충분히 감격스럽다는 듯, 타티아나는 바로 앙코르를 연주할 준비를 갖추었다.

“……음.”

저렇게나 완성도 높은 연주를 멋지게 연주했다면 굳이 앙코르를 연주할 필요는 없을 텐데.

에르네스트는 다리를 꼬았다.

그는 만약 자신이 방금 전 같은 연주를 마쳤다면 단 한 곡의 앙코르도 연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공적인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큰 그림을 지니고 있다. 청중들이 본편에서 충분한 감동과 여운을 느꼈다면 연주자가 괜히 단맛이 나는 디저트와 샴페인을 청중의 귀에 잔뜩 집어넣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과한 단맛에 중독된 청중이 홀을 나서면서 앙코르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순간,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연주자가 아니라 청중이다.

멋진 메인 디쉬가 아깝지 않은가.

“…….”

하지만 그 신념도 살짝 흔들린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니스트로서 자기 생각이 확고하고,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이미 충분히 배부르고 훌륭한 만찬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자 그녀가 무슨 곡을 연주해 줄지 기대되는 마음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청중의 입장으로 연주자의 앙코르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어 본 경험은 많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기대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앙코르 무대에 대한 기대로 좌중에 적막이 맴돌 무렵,

타티아나가 별안간 연주를 시작했다.

“!”

쇼팽의 에튀드 25-9. 사뿐사뿐 뛰노는 듯한 리듬이 매력적인 곡이었다.

이 곡을 타티아나는 노래하듯 명랑하게 쳐 나갔다.

조금 긴장이 풀어졌는지, 정확한 템포보다 살짝 느리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 곡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앙코르에서 힘을 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훔멜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니스트에게 엄청난 무게가 실리는 부담스러운 곡이다. 아무리 타티아나라도 조금은 지쳤을 것이다.

이런 귀여운 곡들로 앙코르를 몇 곡 연주해 주고 기분 좋게 연주회를 마무리 지으려는 모양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타티아나의 앙코르 첫 곡을 감상했다.

그리고 딱 1분 만에 그는 자신의 예상이 모두 틀렸음을 깨달았다.

“……하하.”

연주가 멎고 박수 소리가 조금 일어나기도 전에, 타티아나는 갑자기 돌변한 태도로 다음 곡을 연주했다.

쇼팽의 에튀드 25-12.

흔히 사람들이 부르길 대양이라고 부르는 이 곡은 방금 전 있었던 귀여운 노랫소리를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편안하게 방심하고 있던 청중들은 모두 반항도 하지 못하고 타티아나의 바다에 끌려 들어갔다.

에르네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간 타티아나와 몇 번이나 연습실에서 함께 곡을 주고받으면서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빠른 속주를 보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실제로 가능한 테크닉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속도의 양손 아르페지오.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 이해가 안 가는 깊이 있는 터치 테크닉.

순식간에 치고 지나가는데도 뭉개지는 음 없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떠오르고, 음악 전체는 넓은 바다의 너울을 그린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로 거의 마법을 부리듯 파도를 몰고 왔다.

에르네스트는 그 바다에 몸을 담갔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탄하다 못해 거의 넋이 나간 것 같다.

정말 대단한 연주였다. 앙코르로 내놓긴 아쉬울 정도로.

2분 남짓한 바다의 연습곡도 끝났다.

정신을 차린 청중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일어나서 다시 기립박수를 퍼부었다.

타티아나는 손을 내리고 잠시 이쪽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선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두 곡으로 끝난 건가?

“?”

끝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앙코르를 마치거나, 아니면 커튼콜을 받으려나 했던 타티아나는 그대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다음 앙코르를 연주하겠다는 모습이다.

타티아나의 자세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박수가 멎었고, 무대에서 폭사된 음악의 마력은 강제로 에르네스트의 모든 정신을 빼앗아 갔다.

카푸스틴의 콘서트 에튀드 3번 토카티나가 연주되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타티아나의 손이 건반을 유린했다.

한 건반을 세 개의 손가락이 번갈아 가면서 연타한다.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수십 번도 넘게 건반이 혹사당하며 레가토와 차원이 다른 소리를 자아낸다.

인템포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같은 곡을 연주할 줄 아는 에르네스트가 듣기에도 마술처럼만 들리는 음악이었는데 보통 청중들의 귀에 어떻게 들릴진 안 봐도 뻔했다.

건반을 연타하고,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서 선율을 짚고, 다시 건반을 두들겨 부술 것처럼 연타한다. 오른손이 정말 미친 듯이 건반을 연타하는 사이 왼손은 주선율을 깔끔하게 그려 내면서 이 곡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시킨다.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면 언제 양손의 역할이 바뀌었는지도 깨닫기 힘들다. 이번엔 왼손의 손가락들이 한 건반을 집중적으로 연타하고, 분산되었다가 다시 집중하고, 도약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요구되는 엄청난 테크닉들도 그녀는 가볍게 구사한다.

타티아나는 19세기의 낭만 음악에 자신 있어 하곤 했지만, 이렇게 현대 클래식이라 할 수 있는 곡들도 충분히 소화해 내곤 했다. 도대체 레퍼토리가 얼마나 넓은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에 곡이 끝났다. 다시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브라보!”

이 세 곡의 총 연주 시간은 대략 5분 정도.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느끼는 감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빨랐다. 타티아나의 속주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앙코르 무대에서 자유로운 연주를 마음껏 보여 주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일반적인 연주에선 보일 일이 없는 비르투오시티를 보여주자 청중석에선 열기가 점점 더 뜨거워졌다.

타티아나가 일어나서 인사하자 거의 광기에 찬 환호성이 울렸다. 에르네스트는 박수만 쳤다.

이 엄청난 열기를 한 몸에 받은 타티아나는 약간 과열되는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싶은지 지휘자에게 살짝 눈짓했다. 길게 말이 오갈 것도 없이 눈빛만 몇 번 오갔고, 곧 악장과 첼로 연주자 한 명이 타티아나의 앞으로 나왔다.

“……!”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의 트리오가 4번째 앙코르를 연주했다.

슈베르트의 군대 행진곡.

피아노 트리오로 편곡한 군대 행진곡은 본래의 웅장한 행진곡에서 절도 있는 경쾌함만을 살려 내고 있었다.

이 곡은 청중들의 마음에 스며들어서 조금 무분별하게 들끓던 열기에 질서를 만들었다. 행진곡 특유의 리듬은 무질서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게 조금 점잖게 흘러가나 했더니,

바이올린과 첼로가 물러간 뒤 곧바로 이어진 5번째 곡은 리스트의 초절기교 에튀드 8번 사냥이었다.

“…….”

이 애는 기어이 청중들을 광기에 미치게 만들 모양이다.

강렬한 화음이 심장에 파고들었고, 청중들은 숨을 멈추었다.

손가락으로 짚은 건반을 통해 그 무게가 피아노를 누르고, 무대가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엄청난 타건력이다. 대체 협주곡을 두 곡이나 치고도 이만한 힘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그 작은 체구로 큰 음량을 만들기 위해 힘을 집중시키는 테크닉을 얼마나 연구하고 연습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 기술이 집약되면 어떤 일까지 벌일 수 있는지 들은 바 있었다.

지금도 피아노 현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어디까지나 연주자였고, 절대로 피아노에 문제가 가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뽑아내고 있었다.

지옥같이 어려운 패시지를 단칼에 무찌르고 거침없이 나아간다.

옥타브 아르페지오가 펼쳐진다. 사냥이라는 이 에튀드의 부제는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마왕을 사냥하러 떠나는 용사의 모험담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타티아나는 건반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부수고 승리의 끝으로 향했다. 이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검을 땅에 박아 넣는 듯한 마무리로 음악이 끝났을 때, 몇 번인지도 모를 기립박수가 다시 쏟아졌다.

“…….”

에르네스트가 살짝 주변을 보니 거의 클래식 연주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나마 다들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아서 점잖게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여기저기서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열기를 꾹꾹 눌러 참다가 거의 광기로 화하고 있는 단계인 것 같았다.

“너무 후한 것 아니야……?”

에르네스트는 약간 걱정이 되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온전히 본 프로그램의 여운만 느낄 수 있도록 앙코르를 연주하지 않는 것은 에르네스트의 신념이자 고집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사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타티아나에게까지 그렇게 하라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 훌륭했던 본 무대가 조금 퇴색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염려되었다.

약간 복잡한 마음으로 에르네스트는 무대를 지켜보았다.

“……!”

하지만 그 걱정은 다시 한 번 크리스티나가 나와서 타티아나와 함께 벨라 바르톡의 루마니안 포크 댄스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연주엔 기대와 찬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무대 위의 연주자들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즐거운 음악들을 청중들에게 전해 줄 수 있을지, 그것밖에 머리에 없다.

메인 디쉬의 아쉬움을 메우기 위함이나, 개인적인 과시욕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마음가짐은 음악을 통해 확실하게 전해졌다.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저 디저트가 아니라 또 하나의 훌륭한 음식을 맛보는 기분을 느끼며 에르네스트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음악에서 느껴지는 드높은 자신감.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무대였다.

마치 제3부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이 앙코르 무대는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이 열기가 잠깐 동안 본 프로그램의 여운을 침식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이 연주회의 목적을 뒤집어 버리진 못한다.

훔멜의 피아노 협주곡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그대로 각각의 훌륭한 무대로, 그리고 지금 보여 주는 화려한 앙코르 무대는 이 자체로 청중들에게 큰 기쁨이 되어 줄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지닌 자존심과는 또 다른 일종의 자신감이 그대로 음악에서 드러났다.

“하하…….”

주변에서 느껴지는 즐거움과 행복이 뭉실거리며 떠다녔다. 이 분위기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흠잡을 곳 없이 멋진 음악을 들려주고도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듯 또다시 음악을, 더 많은 음악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싶어 하는 연주자였다. 어떻게 해서든 한 곡이라도 더 많이 전해 주려 늘 애쓰고 노력한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정말 아름다웠다.

작게 웃음을 흘리며, 에르네스트는 걱정을 내려놓고 아예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타티아나의 연주를 길게 들을 수 있어 기뻤다.

***

몇 곡이나 쳤지?

“아…….”

모르겠다. 준비한 곡은 다섯 곡 정도였는데 어쩌다 보니 몇 곡 더 집어넣은 데다가 크리스티나와 짬을 내어 맞춰 보았던 소품들도 연주하기도 했다.

그냥 떠오르는 기억은 앙코르 무대에 집중하면서 청중들의 기대와 열기에 보답하려 애쓴 것과, 연주가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가 터져 나와서 나도 매번 일어나서 답례 인사를 했던 기억뿐이었다.

연주를 하고, 일어나서 인사하고, 다시 앉아서 연주하고, 또 앞으로 나가 인사하고. 몇 번이나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앙코르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가능하다면 쓰러질 때까지 피아노를 연주하고 또 연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끝낼 때가 왔다. 스타니슬라프가 이쯤 하면 충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난 한 번 더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 전신을 울리는 듯한 박수 소리를 등으로 받으며 스타니슬라프와 먼저 대기실로 돌아왔다.

커튼콜이 끊이지 않고 쏟아졌지만 이번엔 스타니슬라프가 막으며 말했다.

“정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더군. 타티아나.”

연주회가 끝났다는 것을 딱 정해 주자 그제야 집중이 풀어지고 고조되었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끝났다.

“스타니슬라프.”

“훌륭한 무대였네.”

내가 무어라 하기 전에 스타니슬라프가 먼저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난 밝게 웃으며 그 악수를 받았다. 강철처럼 억센 손이지만, 이 손이 지휘봉을 쥐면 얼마나 든든한지 나는 잘 안다.

“타티아나!”

뒤이어 크리스티나와 다른 단원들이 순서대로 대기실로 들어왔다.

크리스티나는 바이올린을 어디 놓을 생각도 않고 손에 쥔 채로 그대로 내게 다가와서는, 덥석 끌어안았다.

“아, 나 어떡해. 진짜.”

“크리스티나……? 우세요?”

“안 그러게 생겼니?”

조금 놀라고 있었는데, 날 놓아준 크리스티나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처음에 차갑게만 보였던 그녀는 훌쩍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짧은지 모르겠네, 정말. 그래도 오늘은 끝났어도 앞으로도 자주 만나자 우리. 알겠지? 타티아나.”

“크리스티나.”

“약속한 거다? 아, 아예 졸업하고 우리 오케스트라에 안 들어올래?”

난데없는 스카우트 제안에 당황하기도 잠시, 로만이 찬물을 끼얹었다.

“관현악단에 웬 피아노입니까. 크리스티나.”

“시끄러워 로만. 피아니스트 데리고 있는 오케스트라도 많아.”

로만은 듣고 보니 그렇다는 듯 약간 눈빛을 달리했다. 늘 냉정하고 논리적이었던 로만이 저런 눈빛으로 날 보니까 조금 무섭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갈등하고 있자 스타니슬라프가 중재에 나섰다.

“타티아나를 곤란하게 하지 말게. 크리스티나. 더 많은 오케스트라와 많은 협연을 해 줘야 할 피아노 연주자를 한 곳이 독점하다니, 말도 안 되지.”

“……냉혈한들.”

크리스티나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하지만 난 스타니슬라프가 냉혈한이라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크리스티나가 왜 내게 오케스트라에 들어오라는 무리한 말을 하는지도.

난 지금 내 마음도 보다 확실하게 말로 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여러분.”

이렇게 만족스러운 협연은 나 역시 처음이다. 앞으로도 난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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