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62화 (362/1,277)

##  362화

연주회를 축하하는 연회는 저택 연회장에서 열렸다.

40명에 가까운 대인원이었지만 연회장은 이 인원들을 충분히 수용할 만큼 컸다. 대신 드미트리가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아버지의 주도로 건배사가 있었고 조금 늦은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난 연주에 쏟아부은 집중력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서 정신이 조금 멍한 상태였다. 식사도 않고 그냥 침대에 가서 자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날 위해 모여 준 분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순 없었다. 되도록 속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기름진 음식은 피해서 조금씩만 입에 넣었다.

만찬 뒤에는 술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 자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하진 못했다.

“먼저 돌아갈게, 타티아나. 오늘 정말 예뻤단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제일 먼저 파티는 우리끼리 즐기길 바라신다면서 사샤를 데리고 일어나셨다.

“우리도 이만 가마.”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도 내게 잘했다는 칭찬만 잔뜩 해 주시고는 아버지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돌아갔다. 연주회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학교에서 레슨으로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도 파티엔 불참했다. 그러면서도 다음에 같이 트리오 하자는 약속은 하고 갔다. 아나톨리와 류보비 두 사람도 늦은 시간까지 있을 수 없어서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파티까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아쉬웠지만, 모두들 자택까지 편히 갈 수 있도록 차량을 준비하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줄었지만, 굉장히 떠들썩한 파티가 벌어졌다.

“우리들의 연주회를 축하하며 건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저마다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주고받고 하고 있었다. 대체 몇 번째 들리는 건배사인지 모르겠다.

다들 내일 낮 비행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숙소를 따로 잡는 대신 저택의 남는 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왔더니 몇 사람은 피곤하다면서 먼저 방으로 들어가 쉬었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나와 있었다. 술에 취해 쓰러져도 바로 들어가 자면 된다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주량의 끝을 보려는 것 같다.

“건배!”

다시 한 테이블에서 건배 소리와 함께 청명한 유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약 3초 뒤에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이거 누가 탔어.”

“술 맞아? 구두약 같은 거 아니지?”

“으억, 웩.”

또 누군가가 특제 칵테일을 만들었다가 망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뒹구는 모습을 보며 웃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울 수는 없어서 결국 웃었다.

한곳에선 보드카가 아니라 우아한 와인 잔이 오가는 테이블이 있었는데, 술에 취한 한 명이 그 테이블로 다가갔다. 난 혹시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조야, 잠깐 와 봐.”

“왜.”

“네 첼로가 필요해. 다들 로망스 리듬이 엉망이야. 엉망.”

연회장 한쪽엔 연주가 가능한 작은 무대가 갖춰져 있었고, 거기에선 내키면 즉흥적으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모두 음악가 아니랄까 봐 너도나도 연주를 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경쟁률이 꽤 치열한 편이었는데, 다들 술에 취해만 있으면 음악이 안 되니까 이렇게 멀쩡한 사람을 스카우트하기도 하는 것 같다.

우아하게 와인 잔을 기울이던 첼리스트, 조야는 그 스카우트에 곧장 응했다.

“내 리듬이 필요하다 이거지? 그럼 가 줘야지.”

와인을 호쾌하게 다 마셔 버린 조야는 일어나서 무대로 향했다. 무대 위엔 첼로가 있었지만 첼리스트는 보이지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바로 첼로를 꿰찬 조야는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자마자 다른 두 명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바로 지시를 내렸다. 말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은 조야의 신호에 맞춰 연주를 시작했다.

이전까지 연회장의 공기에 섞여 흐르던 것과는 또 다른 음악이 퍼져 나갔다. 우아하고, 농후한 와인을 닮은 듯한 음색이다.

난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 작은 쿠키를 하나 집었다. 멋진 음악이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도 이 음악을 듣고는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무슨 음악이야?”

“나도 몰라. 어쨌든 듣기엔 좋다.”

“응. 아깐 진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연주하던 사람들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는데. 지금은 믿을 수 있겠어. 첼로 켜는 언니 누구지. 소리 너무 좋아.”

발렌티나가 너무 좋다는 듯 무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설명했다.

“지금 연주하시는 분들은 바이올린 다네르, 미샤. 첼로는 조야. 모두들 대단한 분들이에요.”

“너 이름도 다 외웠니?

“물론이죠.”

“대단하네.”

원래 난 사람 이름이나 얼굴을 잘 외우지 못했다. 얼마나 심했냐면 심지어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도 잘 못 외웠다.

긴 이름이 어려운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음악 말고 사람에 대해서 그리 큰 관심이 아예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니 해결할 수 있었다. 난 스무 명도 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데에 세 번 정도 만나는 것으로 충분했다.

난 무대를 바라보다가 문득 재미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웃으며 물었다.

“다네르가 아까 정말 대단했었는데요. 발렌티나는 못 보셨죠?”

“아까?”

“예. 잠시 로비에서 마지막 인사 나눌 때요. 후후후.”

그때 난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에르네스트만 발견했었다. 다른 분들은 내가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던 것 같다.

내가 자꾸 웃기만 하자 발렌티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뭘 했는데?”

“바이올린을 빠르게 켜서 현을 뜨겁게 만든 다음 그걸로 담배에 불을 붙이시더라고요.”

“뭐? 그게 돼?”

“예. 저도 처음 봤어요. 정말 불타는 듯한 연주가 그런 걸까요.”

물론 평범한 연주는 아니었다. 온도를 올리기 위해 거의 한 현만 가지고 연주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네르는 선율을 만들어 내면서 분명히 연주를 행했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마지막이 살짝 웃기긴 했지만.

발렌티나는 살짝 입을 벌린 채 연주 중인 다네르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로비에서 그런 건 왜 보여 줬대? 그때도 술 마셨었어?”

“아하하하, 아니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 다네르가 술이라도 마신 줄 알 것이다. 난 오해를 풀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일이 있었어요.”

“응?”

“그…… 기자분이 한 분 계셨는데 퍼포먼스를 보여 달라고 하셔서요.”

발렌티나에게 파리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해 줄 수도 있었지만 딱히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난 그것까지 상세하게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할 일도 없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 기자네.”

“기자로선 능력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능력도 있고, 마지막에 다네르의 의도를 받아들여 준 걸 보면 융통성도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

발렌티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보여 달라고 해서 보여 주는 사람도 참……. 뭐 저만큼 잘 하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만.”

“아하하.”

난 테이블 위로 팔을 괴며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다네르가 날 위해 나서 주었던 것은 상당히 인상적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기분 좋게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내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눈치챘다.

“에르네스트?”

“응? 어.”

“왜 그러세요?”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가 날 보고 있다가 내 부름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살짝 틀었다.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잠시 기다렸더니 그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피아노로도 똑같이 담뱃불을 붙일 수 있나 궁금해져서.”

“……예? 갑자기 그건 왜요?”

“궁금하잖아. 바이올린으로는 했다고 하니까.”

에르네스트는 로비에서 다네르가 바이올린으로 한 퍼포먼스를 봤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자존심이 굉장히 높은 그는 바이올린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피아노로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엽기도 해서, 나는 진지하게 피아노로 가능한지 생각해 보다가 그리 멀리 갈 것 없이 예시를 하나 찾아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보셨나요?”

“응. 봤지. ……아.”

“기억하시죠? 재즈 피아니스트와 대결 장면.”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에르네스트는 내 기억 속에 있는 장면과 같은 장면을 똑같이 떠올린 것 같다. 역시 피아노 연주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장면이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나인틴헌드레드는 유명 재즈 피아니스트와 피아노로 대결을 하게 된다. 재즈 피아니스트의 실력도 정말 만만찮았지만, 나인틴헌드레드는 엄청난 기교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마지막으로 달궈진 현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딱 에르네스트가 원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는 역시 현실주의자였다.

“그렇네……. 그런데 그거 영화잖아?”

“영화죠.”

예시로 생각이 나서 말해 본 것이지만 사실 영화적 연출이라 생각하는 편이 낫다. 활로 직접 현을 마찰시키는 바이올린과 해머로 현을 때리는 피아노엔 엄청난 구조적 차이가 있다.

난 피아노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어렴풋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 두드렸다.

“가능한지 재현해 볼까. 그런 걸 현실에 재현하는 게 우리 일 아니겠어?”

실제로 해 보지 않았으니 어쨌거나 해 보고 싶다는 것 같았다. 나도 에르네스트가 할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그를 말렸다.

“하지 마세요. 에르네스트.”

“그냥 종이로 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 영화처럼 연주하면 피아노에 불필요한 무리가 가잖아요.”

그가 진심으로 나선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이올린처럼 적당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음악성을 도외시하고 테크닉만으로 피아노를 다루어야 하겠지만, 현을 끊어 버릴 정도로 강한 충격량을 주지 않고 정확한 힘과 속도를 유지해서 영화의 연출을 그대로 재현해 낸다면 정말 굉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피아노를 괴롭히는 일이다.

난 파리에서 현을 아예 끊어 버린 일도 있었지만, 결코 그 때의 일을 잘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퍼포먼스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먼저 예시를 가져온 주제에 이제 와서 진지하게 말리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에르네스트는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지 그저 희미하게 미소만 지었다.

“언제나 피아노 걱정이네. 타티아나.”

“바이올린이야 현만 교체하면 되지만 피아노는 무리가 가면……. 생각하기도 싫어요.”

건반과 해머, 그리고 그 사이를 이루는 액션 모두를 손봐야 할지도 모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아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다.

살짝 진저리를 치며 말했더니 에르네스트가 괜한 소리는 이쯤 하겠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 무리 같은 건 안 할게.”

“잘 생각하셨어요.”

퍼포먼스 같은 건 강렬한 음악으로 충분하다. 굳이 현을 고문하거나 하지 않아도 나는 에르네스트가 음악가로서 충분히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매번 그에게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

새삼 보면, 예전의 참을성 없던 모습은 이젠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봐서 잘 몰랐는데 아까 전 로비에서 다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보니까 키도 예전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더 크려는지 모르겠다.

그가 라흐마니노프처럼 2미터씩 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금 키면 충분하다. 충분해.

친구의 키가 그만 자라길 바라는 건 조금 나쁜 생각일 것 같지만, 내 마음속 소리는 어차피 그에게 들리지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난 속으로 킥킥 웃으며 어떻게 하면 에르네스트를 오늘 늦게까지 못 자게 만들지 생각했다. 일찍 자면 키가 더 큰다고 하니까, 못 자면 그 반대겠지?

난 오늘 연주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피곤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감내할 마음이 들 만큼 의욕이 생겼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온 사이 다들 뭐 하고 있어, 심심하게?”

“아!”

갑자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리처드가 씩 웃고 있었다. 한승우도 함께였다.

리처드가 고개를 슥 들이밀며 말했다.

“야, 너희들 설마 오늘 연주회에 대한 평을 진지하게 교류하는 자리라든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럼 나 그냥 갈려고.”

“맞는데? 와서 앉아, 리처드. 그리고 3천 자 내외로 감상평 발표해. 빨리.”

“즉흥으로 하라고?”

“왜, 못해? 우린 다 했는데.”

아나스타샤가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고 리처드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인상을 썼다.

황당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안 하셨잖아요…….”

“마음속으로 했으니까 괜찮잖아? 안 들렸니?”

“드, 들렸어요.”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리처드와 한승우는 테이블에 각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테이블 한 가운데에 네모난 상자를 탁 올려놓으며 말했다.

“다들 심심해 보이는데 우리 트럼프나 하자. 카드 빌려 왔어.”

“난 저번에 했던 젠가 재밌던데.”

“그것도 나중에 하면 되지 뭐.”

상관없다는 듯 대꾸하며 리처드는 카드들을 섞기 시작했다. 무슨 게임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난 리처드의 현란한 손놀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늦게까지 무언가 하려고 하지 않아도 이 애들은 일찍 잘 생각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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