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63화 (363/1,277)

##  363화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으…….”

온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무거웠다. 대체 몸 상태가 왜 이 모양인지 생각해 보다가, 어제 연주회를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앙코르로 다른 곡들은 몰라도 리스트의 초절기교 에튀드 8번은 연주하지 말 걸 그랬다. 그 곡은 앙코르로 확실하긴 하지만 체력을 너무 많이 빼앗아 간다.

다음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앙코르 탓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피곤한 건 연주회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제 연회장은 밤늦게까지 시끌벅적했다. 카드와 보드게임은 물론이고 온갖 파티용 게임들이 우리와 함께했다. 우리는 여섯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게임들을 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아마 예고르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밤을 새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조금 걱정하시는 것 같았는데, 다음부턴 알아서 자중해야겠다.

나는 반성하면서 몸을 일으키다가 곁에서 들리는 숨소리를 느끼고 옆을 내려다보았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잠들어 있었다.

“…….”

사이좋게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만 뜨면 험한 말도 주고받곤 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보면 정말 친하게만 보인다.

두 사람이 춥지 않도록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주고는 살그머니 침대에서 나왔다.

시간은 아침 7시. 아침 연습을 하러 가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시간도 애매하고, 몸이 아파서 제대로 하지도 못할 것 같다. 난 오늘 아침은 그냥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니 쌀쌀한 냉기가 옷 틈새로 파고들었다. 난 숄을 여미며 밖을 바라보았다. 12월의 모스크바는 하루 종일 하얗다. 어제도 내렸던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하아.”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심심해서 창문에 입김을 불어 보았다. 하얗게 김이 서린다. 뭘 그려 볼까 생각하다가 그냥 작은 스마일을 하나 그렸다. 지금 내 기분이다.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

멍하니 하얗기만 한 밖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거실로 들어왔다. 편안한 복장에 머리도 대충 헝클어져 있다. 이제 막 일어난 것 같았다.

오빠가 손을 들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늦게까지 놀던데.”

“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고. 노는 건 좋지만 약간 걱정이 되어서 말야. 몸은 괜찮아?”

얼굴을 보자마자 걱정부터 한다. 난 조금 미안하기도 해서 무조건 씩씩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

“사, 사실은 약간 팔이 아프긴 해요. 어제 조금 어려운 곡들을 연주하다 보니…….”

루슬란 오빠는 내가 연주를 하다가 쓰러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빠는 내가 어설프게 괜찮다고 해 봐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실직고를 하면서 동시에 변명도 조금 덧붙였더니, 난데없이 오빠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한참을 웃더니, 손가락을 까딱이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누가 들어도 많이 어려운 곡으로만 들리던데?”

“아하하.”

어쩔 수 없이 따라 웃다가, 난 곡들에 대한 내 기준을 약간 이야기해 주어도 괜찮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많이 어려우면 무대에 어떻게 올리겠어요. 똑바로 연주하지 못할 텐데 말이에요.”

“그것도 그렇네.”

결국 기준은 자기가 믿는 자기 실력에 달려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많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곡은 무대에 올릴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런 곡은 남들 앞에서 난 이런 곡도 손 댈 수 있다며 자랑하듯 꺼내 들 것이 아니라, 어두운 연습실에서 혼자 마주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많이 어려웠던 곡을 조금 어렵게 될 때까지 연습하는 게…… 제가 매일 하는 일이기도 해요.”

“그런가. 그럼 그 연습은 그러면 조금 어렵게 된 곡을 쉬워질 때까지 하는 거야?”

“아무리 해도 쉬워지진 않더라고요.”

“안 쉬워져?”

“아무리 연습해도 어렵기만 해요.”

“어렵거나, 조금 어렵거나, 많이 어렵거나?”

“예.”

“하하하.”

간단하게 내 기준에 대해 이야기 해 줬더니 루슬란 오빠는 짧게 웃더니, 몇 걸음 더 다가와서는 팔을 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내 어깨에 와 닿았다.

“쉬워지기도 할 거야.”

“그럴까요.”

“언젠가는.”

“기약이 없네요?”

별 기대 없이 킥 웃으며 말했더니 오빠는 대뜸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렇게 진지하게 열심히 하는데 쉬워지지 않으면 말이 안 되잖아? 피아노의 신이 있다면 그래선 안 되지.”

“아하핫, 피아노의 신께서 일부러 쉽지 않게 해 놓으셨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신 데려와.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상담 좀 하게.”

위협적으로, 하지만 장난스럽게 말하는 오빠를 보면서 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기약도 기대도 상관없었다. 정말로.

다시 올려다보니 루슬란 오빠가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말했다.

“아무튼…… 아침은 네 친구들이랑, 오케스트라분들과 함께 하게 되겠지?”

“예. 마지막까지 잘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그래. 적당히 시간 맞춰서 사람들 깨워 달라고 내가 집사한테 부탁해 놓을게.”

“고마워요.”

“그 전까진 차나 한 잔 마실까. 아, 앉아 있어. 내가 갔다 올 테니까.”

루슬란 오빠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잡아 소파에 앉혀 버리곤 주방 쪽으로 향했다.

난 멀거니 앉아서 식탁을 내려다보다가, 지금 재스민 차가 마시고 싶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지만 어쩐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루슬란 오빠가 재스민 차를 끓여 올 것 같단 믿음이 들었다.

***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은 일찍 떠났다.

“학교에서 봐, 타티아나.”

“예. 학교에서 봬요.”

주말이니 오래 있어도 괜찮을 텐데. 그래도 피곤한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빨리 자리를 피해 주겠다는 것 같다. 모두가 합심이라도 한 듯 일찍 가겠다고 하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나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신 분들은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전용기를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때마침 전화로 에이전트인 베르너가 공항까지의 전세 버스와 비행기의 시간을 알려 왔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프로 연주자들이니 굳이 내가 무언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떠날 채비는 금방 갖춰졌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전원은 응접실에서 잠시 버스를 기다렸다.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난 단원들과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친밀해졌다. 악수를 나누고, 다음에 또 함께 협연을 하기로 약속했다.

가장 격렬하게 다음 협연을 원하던 건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내게 오케스트라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약간 어려운 일이겠지만, 난 그런 그녀의 마음이 기뻤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최선의 무대를 펼쳤음에도 결국 아쉽다는 듯 인사가 오가길 잠시.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예고르가 헤어져야 할 때를 알렸다.

지난 몇 달간 정말 친해졌고, 어제는 말 그대로 음악적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었다.

나 역시 아쉬워져서 바라보고 있는데, 스타니슬라프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스타니슬라프.”

“자네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난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스타니슬라프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음.”

우리는 굳게 쥔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스타니슬라프는 내 손을 놓자마자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지갑을 꺼냈다.

순간적으로 난 용돈이라도 주시려는 건가? 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

“받게.”

내 앞에 내밀어진 것은 한 장의 명함이었다.

이걸 아무나 쉽게 받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명함을 받아 들고 고개를 들자 스타니슬라프가 무뚝뚝하지만 진지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라도 우리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필요하다면 연락하게나.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약속하지.”

“아……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함께 공유해 온 것들을 밀집시킨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지금, 스타니슬라프가 날 완전히 인정해 주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언젠가 에르네스트를 건방진 친구라고 불렀던 것처럼, 나중에 또 다른 연주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를 친구라고 말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세.”

스타니슬라프는 모두를 이끌고 응접실을 떠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다음 무대를 향해 떠난 것이다.

“…….”

난 그들이 세계 어디에서든 훌륭한 무대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기를, 기도했다.

***

일요일 내내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시간은 흘러가고 월요일은 찾아온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면 학생은 학교에 가야 하고, 선생님을 마주해야 한다.

“……음.”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 앞에 서서, 난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괜히 복장이 잘못되거나 머리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체크하게 된다.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17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괜찮은 평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오늘 선생님에게서 무슨 평을 들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한 음악이지만 어쨌거나 내게 조금 어려운 음악이었다. 조금 어려운 음악을 완전하게 구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음악엔 아직 구멍이 많았다.

조금 어려운 음악은 보다 덜 어렵게 될 여지가 있고 난 그 길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은 연주자로서 내가 한 걸음을 더 내딛게 해 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두려워해선 안 된다.

“후.”

그래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작게 한숨을 쉬고, 문을 노크했다.

“미하일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들어오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익숙한 레슨실이 눈에 들어왔다.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와 책상, 은은한 차 향기. 날 기다리고 계시는 미하일 선생님.

“어서 오려무나.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인사를 마치고도 난 쭈뼛거리며 섰다. 들어오기 전에 걱정을 좀 해서 그런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하, 하하하.”

“……?”

미하일 선생님은 나지막하게 웃으시더니, 안경을 고쳐 쓰시곤 손짓했다.

“차부터 한 잔 마시자꾸나.”

선생님이 직접 차를 끓여 주시는 사이에 나는 가방을 놓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따뜻한 허브차가 내 앞에 놓였다. 난 조심스레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추위에 조금 얼어 있던 몸이 따뜻해졌다.

미하일 선생님 역시 차로 목을 축이시고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저번 연주회를 마쳤을 때도 넌 그런 자세를 하고 있었지.”

“자세……요?”

“그래. 그렇게 잘했다는 평을 많이 받았는데도 결국 레슨실에 들어오면 레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듯한 자세.”

그 말대로였다. 선배들과 했던 자선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난 레슨실에 올 땐 레슨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여러 부분에 대해서 레슨을 받기도 했고.

미하일 선생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학생으로서 성실한 자세고, 내 역할은 그런 네게 부응하는 것이겠지. 그래도 난 일단 잘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구나. 그러니 긴장하지 않아도 된단다.”

“잘한 이야기라 하심은…….”

작게 웃으면서 선생님이 손가락을 들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있었던 트러블도 네가 정말 깔끔하게 잘 대응해서 아무 문제 없이 시작할 수 있었지. 그런 건 누가 가르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무대를 생각하고, 당혹스러워하는 청중을 생각해서 연주자인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미하일 선생님은 내 순서를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앙코르도 준비했던 것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서 모두를 만족시켜 주려 애썼지. 마지막까지 아무도 몰랐겠지만 난 안다, 타티아나. 체력적으로 힘들었지?”

“……네 약간. 그래도 아쉬움이 없도록 했어요.”

“그래, 잘했다. 무대에선 그렇게 해야지.”

연주자라면 응당, 무대에서 가진 바 모든 힘을 쏟아 내야 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이 하하 웃었다.

“이것 봐라, 연주자로서 칭찬할 부분이 정말 많지.”

“선생님…….”

“타티아나. 나는 좋은 연주자가 꼭 음악적으로 완벽한 곡만을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네가 지금처럼만 무대를 사랑해 준다면 사람들도 널 사랑해 줄 테고, 앞으로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 내 장담해 주마.”

“…….”

“넌 이미 좋은 연주자다. 타티아나.”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했던 일들은, 미하일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나오자 차곡차곡 내 긍지로 쌓여 갔다.

처음부터 그랬다. 선생님은 날 처음 데려가려고 했을 때도 엉망인 내 실력보다 응접실을 무대처럼 대하는 내 태도에 더 주목해 주셨고, 그 후에도 몇 번이고 날 믿어 주셨다.

그러한 믿음의 결과로 지금의 내가 있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난 완전하지 못하고 곡은 늘 어렵다. 그래도 난 무대가 좋았다.

“물론 무대를 더 완벽하게 만들려 하는 그 자세도 좋은 연주자의 귀감이지. 자, 그럼 레슨을 시작해 볼까?”

미하일 선생님의 말씀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레슨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긴장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훔멜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 부족했던 부분들, 그리고 앙코르로 자유롭게 연주했던 곡들에 대해서도 상세한 레슨이 있었다.

앙코르 곡까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은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논해 주셨다.

그렇게 레슨을 받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이, 미하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레슨실 문이 열렸다.

두터운 코트를 입어서 그런지 한층 더 커 보이는 구세프 선생님이 날 보더니 묘한 표정을 했다.

구세프 선생님 역시 연주회 레슨으로 내게 하실 말씀이 있나 싶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은 그저 무미건조하게 한마디 툭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좋은지 나쁜지 모를 소식이 있다.”

“소식이요?”

“그래. 네가 연말에 있을 음악회에 나가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

난 기겁해서 되물었다.

연말까진 2주도 안 남았다. 내가 무대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틀 전에 연주회를 마치자마자 이렇게 빨리 다음 무대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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