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화
연주자가 한 무대를 끝내고 얼마나 휴식을 취해야 하는지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투어 공연을 하게 되면 거의 매일같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프로그램만으로 계속해서 연주회를 할 때의 경우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연주회라면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 프로그램부터 시작해서 곡 연습까지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연말까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어쨌건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라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구세프 선생님은 비어 있던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말씀하셨다.
“정부 주최로 하는 송년 제야 음악회다. 31일이니까…… 2주도 안 남았군.”
“정부 주최요?”
“그래. 왜, 연말이면 하는 각종 행사들 있잖나. 울긋불긋하게 거리도 치장하고 별 쓸데없는 짓들 좀 하고 그런 것들. 그중에선 그래도 꽤 의미 있고 비중이 큰 행사지.”
연말이면 모스크바의 온 거리는 정말 예쁘게 장식된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런 것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지 대충 말씀하시고는,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셨다.
“아무튼 거기에 초청받은 피아니스트들 중에 타티아나 네 이름이 올라갔다.”
“그…… 동명이인일 순 없나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가 러시아에 둘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앙음악학교 9학년 타티아나는 너 하나다.”
“…….”
괜한 소리를 해 봐야 소용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잘못 알고 오셨을 리도 없고, 지금 말씀하시는 소식은 전부 사실일 것이다.
구세프 선생님은 이어 미하일 선생님을 향해 말했다.
“미하일. 아마 큰 문제는 없을 테니 곧 자네에게도 공문이 갈 걸세. 지금 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미리 듣고 온 거라서 알려 주는 거고.”
“음.”
미하일 선생님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단지 안경을 슬쩍 매만졌을 뿐이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제자인 내가 큰 연주회 무대에 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고민이 되시는 걸까.
난 생각에 잠긴 미하일 선생님에게 조언을 해 달라고 하는 대신 구세프 선생님에게 보다 구체적인 것들을 묻기로 했다.
“선생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몇 가지 여쭈어도 되나요.”
“얼마든지.”
“꼭 참가해야만 하는 건가요?”
“아니, 전혀.”
구세프 선생님은 팔짱을 낀 채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키는 대로 하라는 투다.
“강제로 참가하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딱히 불이익이 있을 리도 없고. 컨디션 난조로 못 하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가요…….”
일단 강제성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기회라는 것은 확실했다. 정부에서 하는 연말 음악회라니, 그런 무대에 쉽게 오를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지금 거부한다면 나중엔 대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약간 어이가 없었다.
러시아는 예술 강국이었다. 세계에서 최고라고 인정받는 음악학교를 몇 개나 가지고 있었고 수준 높은 연주자들도 정말 많았다. 당연히 연말 음악회엔 내세울 수 있는 연주자들도 많다. 어마어마한 경력을 수십 줄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경력이랄 것도 별로 없는 겨우 열다섯 살의 음악학교 학생일 뿐이다.
“왜 저인가요?”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 물었더니 구세프 선생님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교수를 알고 있지? 타티아나.”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피메노프 교수님.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부터 시작된 인연으로 직접 내게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와주지 않겠냐고 제의해 주시기도 하셨고, 협연을 할 땐 프로그램과 연주회 준비 등에 도움을 주시기도 하셨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어요.”
“음악회 진행위원회에서 그 교수가 널 유망한 신예로 아주 강력하게 추천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의 우승자라고 말이지. 네 이름을 모르던 사람들도 아마 이번에 다 알았을 게다.”
구세프 선생님의 말을 듣고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약간 현실감이 없기도 하고, 멍한 기분이다.
“타티아나.”
“예?”
“혹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추천이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듣고 보니 약간 뜨끔했다.
그 감정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구세프 선생님이 대뜸 인상을 쓰면서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자격은 차고 넘치니까 혹여나 엉뚱한 생각 마라. 청소년 콩쿠르 우승 경력에 연주회 경력도 있는 너라면 연말 음악회 무대 정도는 얼마든지 오를 자격이 있어.”
“아,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 듣자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다. 현실을 말하는 거지, 현실을. 하지만 제대로 생각해서 결정해라.”
“결정요?”
“그래. 무대에 설지 말지 말이다. 일단 교수의 추천이 있었으니까.”
“…….”
내 짧은 경력으로도 신예로 무대에 서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 부분에 대한 불안함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남은 의문점은 아르카디 교수님이 왜 날 추천했냐는 점이었다. 그분과 아는 사이긴 하지만, 난 제자도 아니고 심지어 모스크바 음악원에 오라는 스카웃 제의를 두 번이나 거절해서 교수님의 인내심을 건드려 놓았을 텐데.
그런 내게 이렇게 선의를 베풀듯 기회를 주신 이유가 뭘까.
“…….”
고민은 그리 길 필요가 없었다. 큰 무대로 오지 않고 무얼 하냐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으니까.
미하일 선생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아르카디가 네 연주회를 감명 깊게 본 모양이구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
“그리고 네게도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 것 같다.”
선생님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 치며 이어 말했다.
“연말 음악회는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모이는 자리이기도 하지. 청소년 신예라고는 해도 따로 나누어 놓지 않고 다 같은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의 입장이란다.”
따로 청소년 연말 연주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주자로 선택될 땐 어린 신예들도 필요하겠다 싶어 추천을 받아 선택될 수 있지만, 무대에 오르면 성인과 동등하다는 뜻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 자리에서 성인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연주를 해 보라는 것 같구나.”
“바로 그거지.”
구세프 선생님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그 말을 받아서 이어 말했다.
그 말은 꽤나 직설적이었다.
“아르카디는 네가 건너뛸 수 있는 것들은 빠르게 건너뛰고 음악원으로 오길 바라고 있다, 타티아나. 그러니 스스로 한 번 느껴 보라는 거겠지.”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난 아르카디 교수님의 제의를 받고도 음악학교에 남아 있겠다고 의사 표시를 한 상태였고, 교수님은 내가 여기에 왜 남겠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시는 것 같다.
때문에 내가 성인들과 음악회에 나가 보고, 거기에서 어떠한 즐거움을 느낀다면 음악원으로 빨리 진학해서 빨리 배우길 바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잘못된 접근법은 아니었다. 실제로 난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베테랑 연주자들과 함께 협연을 하고, 음악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정말 굉장한 고양감과 기쁨을 느꼈으니까. 이 사람들과 많은 음악을 하고, 또 많이 배우고 싶다고 느꼈던 건 사실이었다.
“네가 혹여나 거기서 잘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더군.”
“타티아나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자네 지금 내 속 뒤집나? 그건 나도 알아.”
구세프 선생님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2주가 아니라 당장 2시간 뒤에 무대에 세워도 저 녀석은 뭐라도 쳐 내서 무대를 만들어 내겠지. 내가 열 받는 건 아르카디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거야.”
미하일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난 무대를 사랑하고, 언제나 무대에 서길 바라는 연주자였다.
선생님이 날 처음 보았을 때부터 한눈에 그걸 꿰뚫어 보았던 것처럼, 아르카디 교수님이 그러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추천했겠지. 저 녀석 사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사정이요?”
“그래.”
구세프 선생님이 정말로 화가 난 부분은 내 사정 부분인 것 같았다.
이렇게 화를 내 주시는 건 기쁘지만, 죄송스럽게도 난 그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다.
엊그제 연주회를 마쳤고, 준비할 시간이 적다는 건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겐 그만큼 열심히 할 의욕도, 도움을 줄 분들도 많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르카디 교수님이 내게 큰 기회를 던져 주면 마음을 고쳐먹을 거라 판단하신 것도 응당 그렇게 생각하실 만하다. 그분은 내 고민을 모르실테니까.
하지만 난 정말 심각하게 생각한 끝에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으로 남아 있다. 조금은 나약하고, 조금은 이기적인 이유일지 모르겠지만 난 그것이 이제 크게 부끄럽지 않다.
결단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 것 같아요.”
“알겠다고?”
“예. 연말 음악회에 참가하도록 할게요.”
“뭐?”
구세프 선생님이 한쪽 눈을 치켜세웠다.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현이다. 난 순간 웃어 버릴 뻔했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온 게 선생님이라는 건 기억하고 계세요?
난 천천히 설명했다.
“절 신예로 추천하셨다면 가지 않을 이유도 없는 것 같아요. 신예라면 경력이 일천한 게 문제가 되지 않고, 이 또한 모처럼 큰 기회가 될 테니까요.”
“타티아나. 지금 진지하게 생각하…….”
“그리고 음악회를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레슨을 받을 거예요.”
그게 내 결정이었다.
귀한 기회이기도 하고, 약간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여기서 내가 피해 버린다면 겁을 먹고 피한 것이라 보일지도 모른다. 그건 내 선생님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이다.
당당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콩쿠르가 아닌 연주회이니 그저 내가 맡은 역할을 잘 해내면 되는 일이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피아노로 하는 일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난 내년에도 이 학교에 다녀야 하니까.
“……타티아나.”
“아르카디 교수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세요. 그렇죠?”
“…….”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새롭게 다시 모든 것을 배운 지 2년도 채 안 되었다는 것을 아신다. 때문에 항상 걱정이 많고 피아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신경을 정말 많이 써 주신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 피아노에 굉장히 복잡한 것들이 많이 끼어들어 있다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위태롭게 휘청거리던 날 붙잡고는 악역을 자처하면서까지 다시 피아노를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도록 지도해 주셨다. 개인적으로 나와 하신 약속은 아직 2년이나 기한이 남아 있다.
“전 아직 선생님들께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음악원으로 진학하는 것이 제게 득 될 것 같지 않아요. 건너뛸 것이 대체 어디에 있나요?”
일부러 조금 이해타산적으로 강하게 말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니라 선생님들이라고 분명하게 전했다.
“빠른 것보단 바른 것이 중요하죠. 그렇지 않나요?”
“…….”
바른 길을 찾고 싶다고 말해 놓고 나니까 조금 부끄러워졌다.
말 자체가 아니라,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빠르게 음악들을 되찾고 싶어서 거의 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강제로 시간을 늘리고 친구들이 내 시간에 여유를 만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장담하건대 난 피아노를 다시 이만큼 치기는커녕 아무것도 못하고 엉망으로 미쳐 버렸을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정말 큰 감사를 느낀다.
“정말 많이 컸군. 타티아나.”
“……예?”
갑자기 구세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서 깜짝 놀랐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니 구세프 선생님이 말실수를 했다는 듯 특유의 인상을 쓰고 있었다.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던 예전 같았으면 참 별 볼 일 없었는데 많이 컸다는 식의 비아냥으로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구세프 선생님이 날 기특하게 여겨 주시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빙그레 웃자 구세프 선생님은 더더욱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뭐, 네 마음대로 해라. 결국은 네가 결정할 일이니까.”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허락? 무슨 소리냐? 네가 가겠다면서?”
“가겠다고 말씀 드렸지만 허락은 받고 싶은걸요.”
거의 통보하듯 하겠다고 말했다고 해서 선생님들이 뭐라고 하시든 무시하고 내 멋대로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쨌건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다.
얌전히 기다리자 미하일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쓰시곤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라, 타티아나. 아르카디와는 내가 전화를 해 보고, 다른 세부적인 사항 같은 것도 네게 전해 줄 테니.”
“예. 일반적인 연주회와 크게 다르지 않겠죠?”
“곡도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일단은……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중 하나만 준비해 놓거라.”
“그렇게 할게요.”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라면 op.33과 op.39를 합쳐서 거의 전곡을 연주할 수 있다. 무대에 올릴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것은 5곡 정도. 난 빠르게 어떤 곡에 집중하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하일 선생님과 내가 연주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구세프 선생님은 그럼 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럼 난 에르네스트에게도 전해 주러 갈까.”
“……예? 에르네스트요?”
제가 연말 음악회에 나가기로 한 이야기를 왜 에르네스트에게 하세요?
거의 대놓고 물어볼 뻔했다가, 따지는 투가 될 것 같아서 참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셨다.
“그 녀석은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진 거의 전원의 의견으로 연말 음악회 연주자로 추천받았으니 말이다. 작년엔 절대로 안 하겠다고 거절했지만 이번엔 거절하기 힘들게다. 워낙 바라는 사람이 많아서.”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다른 연주자들도 많은 음악회고, 신예라면 나보다 확실한 에르네스트가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구세프 선생님은 왜 먼저 에르네스트 이야기를 안 해 주신 거야?
어쩐지 혼자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
하지만 조금 결연한 각오에 차 있던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