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65화 (365/1,277)

##  365화

미하일 선생님이 손을 흔들었다.

“다음 레슨 때 보자꾸나. 타티아나.”

“예. 오늘 감사했습니다.”

가방과 외투를 챙겨 들고 레슨실 밖으로 나오자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12월의 모스크바는 해가 정말 빨리 진다.

난 노을이 깊게 들어선 복도를 걸으며 레슨 받았던 것들을 다시 되새겼다. 저번 연주회에 대한 피드백은 물론이고, 새롭게 만들어 놓아야 할 곡들도 많았다.

“송년 제야 음악회…….”

머릿속에서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던 주제가 빙글빙글 돌다가 입 밖으로 나왔다.

학교에서 하거나 내가 개인적으로 여는 연주회가 아니라 정부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였다. 수많은 연주자들이 함께하는 행사다. 아마 내가 겪을 연주회 중에 가장 큰 규모가 될지도 모른다.

홀로 복도를 걷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추위와 함께 목께를 맴돌았다.

선생님들 앞에선 씩씩하게 대답했고, 연주자로서 거기에 참가하겠다는 내 생각은 지금도 확고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약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난 올해를 이만 마무리하면서 연말은 가족들과 오붓하게 지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과 편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텔레비전에 내가 나올 거란 생각을 하니 문득 부담감이 마음에 파고든다.

“…….”

입을 꾹 다물고 앞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두서없이 느껴지는 그런 두려움들을 지워 버리고, 똑바로 허리를 폈다.

올해의 끝을 큰 무대에서 마무리하고, 그것을 아버지가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해 주실까. 난 내가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충분히 깊게 생각했고, 할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참가 의사를 밝혔다. 연주자로서 제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믿음이 날 일으켜 세우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든다. 결정을 내렸다면,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9학년 피아노과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난 내 결정에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졌다.

“타티아나.”

노을을 등 뒤에 두르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내 이름을 불러 주어서인지.

손을 슥 흔드는 에르네스트의 모습은 날 안심시켜 주었다. 추위와 함께 맴돌던 차가운 감정들은 들뜨는 기분과 함께 모두 증발했다.

난 옅게 웃으며 그의 곁에 가서 앉았다.

“에르네스트. 아직 안 가고 있었네요.”

“챙길 게 좀 있어서.”

“오후엔 무엇을 하셨나요. 연습? 레슨?”

“오늘은 레슨.”

“저도요.”

“그래? 엊그제 연주회 이야기했겠네. 어땠어?”

난 오늘 레슨 받은 부분들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인사차 물어본 것은 아니었는지 꽤나 진지하게 들어 주면서 몇몇 부분에 대해선 자기가 어떻게 들었는지 약간의 의견을 보태기도 했다.

상당히 깊고 섬세한 의견들이다. 그가 얼마나 집중해서 내 연주를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열심히 듣는 내 반응에 자극받았는지 에르네스트는 정말 열성적으로 자기 의견들을 말하고는, 할 말이 다 끝나고 나서야 갑자기 미안하다는 듯 덧붙였다.

“괜한 소리들을 해서 미안해. 그 꼼꼼한 미하일 선생님이 잘 레슨해 주신 건데.”

“아, 아니에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러면 다행이고.”

“음…… 에르네스트는요? 오늘 레슨 어떠셨나요?”

“나? 별것 없었어.”

“그럴 리가요?”

“그냥 평소랑 똑같았는데. 선생님은 내 손가락이 두 개쯤 더 돋아나길 바라시는 것 같았고.”

“평소에 그런 레슨을 받으세요……?”

현실주의자인 구세프 선생님이 비현실적인 걸 바라신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에르네스트에게 가지는 기대가 그만큼 큰 것 같다.

난 은근히 툴툴거리는 모습이 구세프 선생님과 닮아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렸다. 구세프 선생님이 그에게도 말을 전했다고 했으니 곧 나오겠지.

“뭐 그랬어. 다음엔 조금 더 고전으로 가 볼 건가 봐.”

“…….”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정말 자기 레슨 이야기만 마치고는 입을 닫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자 그 역시 의아해하는 눈을 했다.

그렇게 보실 때가 아니라, 에르네스트. 연말 음악회에 대해 하실 말 없으신가요?

“왜?”

뭐냐는 듯 묻는 그를 보며 혹시 음악회에 불참하기로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난 구세프 선생님이 꽤 강력하게 그를 참가시켰으리라 믿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르쇠로 구는 이유가 뭘까. 일단 내가 참가한다는 것을 구세프 선생님에게 들었다면 이렇게 모른 척할 수가 없을 테니 내 참가 사실에 대해선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는 혼자 연말 음악회에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말해서 놀라게 할 생각인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니 이걸 역으로 이용하면 나야말로 그를 깜짝 놀라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어떻게 할까.

“…….”

하지만 어차피 무대에 서는 날까지 그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마 한나절도 못 버티지 않을까.

그리고 난 한시라도 빨리 그와 같은 무대에 오른다는 것을 알리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슬며시 다가서며 살짝 물었다.

“에르네스트.”

“응.”

“지금 숨기는 것 있지 않나요?”

“뭐?”

에르네스트는 정말 깜짝 놀라며 허리를 쭉 뺐다. 이렇게 물어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

내가 더 이상 묻지 않고 웃고만 있자 그는 길게 버틸 생각은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티 났어?”

“엄청요.”

“의외로 눈치가 빠르네? 타티아나.”

“의외로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사실 미리 정보를 알지 못했더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난 시치미를 뚝 떼고 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에르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듯 피식 웃더니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내가 원하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 정부에서 연말에 하는 음악회에 추천받아서 나가기로 했어.”

에르네스트는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그게 끝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내 이야기는 정말 아예 하지 않은 것 같다.

난 약간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잘 되었네요. 에르네스트.”

“글쎄…… 그 음악회 자체는 괜찮은데…… 난 이런 추천이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님들의 재촉으로밖에 안 들리더라고. 구세프 선생님이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거절하면 실례니까 반드시 나가라고만 안 했으면 그냥 거절했을 텐데.”

그는 묘하게 투덜거렸다.

이미 5년이나 아르카디 교수님의 스카웃을 거절하면서, 뻔뻔하게 레슨은 모두 받아 챙긴 에르네스트를 보고 있자면 그 소신과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역시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난 동질감을 느꼈다. 아르카디 교수님이 큰 기회를 준 것에 대해 빠른 진학으로 답해야 하는지, 그건 언젠가 교수님 앞에서 제대로 내 의사를 말해야 할 때가 오겠지.

하지만 일단 지금은 교수님에게 감사하다는 마음뿐이다.

“정말 잘되었어요. 에르네스트.”

“그러니까 그게…….”

“그 음악회에 저도 나가게 되었거든요.”

“……?”

에르네스트가 눈을 크게 뜨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얼굴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 놓고 싶을 정도였다.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기다리자 조금 당혹스러워하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너도 연말 음악회에 나간다고?”

“예. 맞아요.”

“청중이 아니라 연주자로 무대에 선다는 말이야?”

“예.”

“……잠깐만.”

그의 표정이 변화했다. 약간의 혼란과 의아함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감정이 맨 앞에 드러났다.

내가 안도와 기쁨을 느꼈던 것처럼, 그 역시 나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난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저도 처음엔 저 혼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함께해 줄 줄은 몰랐네요.”

“……나도 나 혼자인 줄 알았어.”

“잘됐네요. 그렇죠?”

“아까부터 잘됐다고 하던 게 그런 거였어? 다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예.”

“하하…….”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날 바라보았다. 궁금한 것이 많다는 표정이다.

“그럼 타티아나, 추천을 받은 거야?”

“예. 아르카디 교수님에게요.”

난 연말 음악회의 연주자로 추천받을 수 있었던 이야기를 에르네스트에게 전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에르네스트는 순수하게 친구로서 기뻐해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걱정된다는 듯 말하기도 했다.

“그분이 왜 그랬는진 알지?”

“물론이죠. 하지만 전 겨우 2년 만에 중앙음악학교를 떠날 생각이 없어서요.”

“그래, 이 이야기는 전에 했었지. 우리.”

우리 두 사람은 조기 진학을 할 생각이 없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바 있었다. 이제 와서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부분은 확실하게 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쿡쿡 웃더니 책상에 턱을 괴고 내 쪽을 보았다. 노을을 등지고 그렇게 앉은 에르네스트는 현실의 사람이 아니라 이 교실의 풍경을 담은 그림 속의 사람처럼 보였다.

“…….”

우린 잠시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린 서로의 음악으로 소통하듯, 이러한 침묵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주고받는다.

난 그의 눈에서 약간의 기대를 읽어 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해석하기도 전에, 에르네스트는 그간 오래 참고 있었던 것 같던 말을 분명하게 꺼냈다.

“타티아나. 우리 같이 듀엣 하자.”

난 그의 제안을 듣자마자, 내가 진정 원하고 있었던 것이 이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에르네스트와 그간 연습실에서 수없이 음악을 주고받았다. 그 음악들을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에서 주최하는 연말 음악회라는 커다란 무대에서 추구하기엔 조금 사적인 바람이다. 때문에 조금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던 기대였다.

그렇지만 뒤로 밀려나 있던 기대는 에르네스트의 제안을 받고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형태를 갖추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었다.

내가 약간 멍하니 있자 에르네스트가 설명을 이었다.

“아, 잠깐만. 네 무대를 줄이겠다는 건 아니야. 방송에도 나갈 음악회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상당히 타이트하게 짜이긴 하겠지만 미리 회의에도 참가한다면 한 곡 정도는 더 가져오는 것도 가능할 것 같거든.”

“미리 조정하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네요.”

“그래. 너만 괜찮다면…….”

언제나처럼 자신감 있는 태도로 말하던 에르네스트는, 순간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작게 말을 맺었다.

“……싫어?”

거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제안해 놓고선, 이제 와서 이렇게 물어 오면 도저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후후후, 싫을 리가요. 좋아요. 같이 하기로 해요.”

사실 그가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며칠 가지 않아 내가 그에게 듀엣을 하지 않겠냐고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난 그의 제안이 기뻤다.

“사실 큰 무대가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의욕이 생기네요.”

“……괜히 더 부담스러워진 거 아니야?”

“아뇨. 훨씬 나아졌어요. 그리고 듀엣이라면 저도 하고 싶었는걸요.”

“고마워. 잘 해 볼게.”

“에르네스트의 실력은 이미 잘 알고 있어요. 저야말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준비해야겠네요.”

“방해는 무슨 방해?”

에르네스트는 물끄러미 날 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제안에 정말 기뻐하는 내 마음을 알아준 것 같다.

이야기들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앞으로 2주 정도 후에 있을 연말 음악회에 연주자로 참가할 예정이고 듀엣 무대도 가질 생각이다.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해져 오지만 혼자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나 지났을까. 스마트폰을 넣어 둔 가방이 진동했다.

[타티아나. 집에 갔니?]

아나스타샤였다. 난 짧게 답장했다.

[아직요. 레슨 받고 교실에 있어요.]

[그래? 나도 교실 앞이야. 같이 가.]

같이 가자는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에르네스트와 별 이야기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 시간까지 연습실에서 집중하고 있었나 보다. 최근 그녀의 연습량이 부쩍 많이 늘어난 것 같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에르네스트. 우리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내일 더 이야기해요.”

“많이 늦었네. 그래, 그러자. 지금 가?”

“아뇨, 잠시 기다리려고요. 아나스타샤가 온다고 해서요.”

아나스타샤가 온다는 말에 에르네스트는 묘한 표정을 하더니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교실 문이 열리며 아나스타샤가 들어섰다.

“타티아나 혼자 있던 게 아니었네?”

아나스타샤의 롱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그녀는 활기차게 말하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에르네스트가 손을 휙 저었다.

“왔냐.”

“응. 아, 오늘 연습하다가 죽는 줄 알았네, 진짜. 타티아나. 나 힘들어.”

그녀는 내 팔을 붙잡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연습하다가 죽은 사람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것 같아서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힘들어하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핀다.

그런 우리를 보던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갈게. 둘 다 내일 봐.”

막 가방을 챙겨 드는 그를 아나스타샤가 붙잡았다.

“어딜 가? 이따 같이 가. 어차피 집에 갈 거잖아.”

“그건 그런데…….”

“맨날 그렇게 자리 피하지 말고 앉아 있어 좀. 누가 잡아먹니?”

“뭐? 피하긴 뭘 피해?”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시비를 걸자 에르네스트는 성질을 벌컥 내며 도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난 두 사람을 진정시켜야 하나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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