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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366화 (366/1,277)

##  366화

에르네스트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 두 친구를 보며 알아서 눈치껏 비켜 주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여자애들의 거리감은 도저히 비집고 앉을 곳이 없을 정도로 가까웠고, 에르네스트는 그런 분위기 파악을 못 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일어서려는 것을 보고는 대뜸 시비조로 앉으라고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두 사람이 서로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괜히 어색하게 왜 앉으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오기가 생겼다. 앉으라면 못 앉을 줄 알고? 그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이 뭘 하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더니 가방을 뒤적거렸다. 잠시 후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작은 비닐 포장지로 포장된 무언가였다.

“자, 먹어.”

“뭔데.”

“그냥 먹어. 내가 너 못 먹을 걸 주겠니?”

그냥 질문에 곱게 대답해 주면 안 되냐? 에르네스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포장지를 벗겼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도 똑같은 것을 건네주었다.

“타티아나. 너도.”

“아, 고마워요.”

포장지 안에 있는 것은 작은 젤리였다. 에르네스트는 별생각 없이 젤리를 입에 넣었다. 젤리가 다 같은 젤리지 별다를 것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에 넣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달달하면서도 말랑말랑한 느낌이 거의 환상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시판되는 젤리는 아닌 것 같았다.

타티아나 역시 눈을 크게 뜨고는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맛있네요?”

“그치? 요전에 아빠가 선물 받은 건데 먹어 보니까 괜찮아서 가지고 왔어. 이거 본점이 신아르바트 쪽에 있다던데 오늘 같이 가자. 어때?”

“아…… 그럴까요?”

한 입 먹어 보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는 바로 넘어간 것 같았다. 해가 일찍 떨어졌을 뿐이지 저녁 식사 전까지 시간이 남아 있으므로 아나스타샤와 함께 놀러 가도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초콜릿 같은 건 못 먹지만 단것들은 은근히 좋아한단 말이지. 에르네스트가 웃으며 그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나스타샤가 돌연 고개를 돌려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 너도 갈래?”

“난 됐어.”

“왜? 별로니?”

에르네스트는 손을 내저으며 대충 대답했다.

“아니, 집에 가서 사샤 저녁밥 해 줘야 해.”

“……사샤는 좋겠네? 형이 밥도 해 주고.”

의외라는 듯 아나스타샤가 웃었고, 에르네스트는 착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덧붙였다.

“지금 가르쳐 놔야 나중에 걔가 내 밥 해 주지.”

“미쳤어 정말. 말하는 것 좀 봐.”

“뭐 어때.”

동생을 부려먹겠단 말에 경악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킥킥 웃었다. 역시 그녀와는 이런 말 같잖은 소리나 주고받는 게 재미있다.

아나스타샤도 에르네스트가 한참이나 어린 사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진 않다. 약간 풀어진 눈으로 그녀가 물었다.

“어쨌든…… 그럼 빨리 가야지 왜 지금 여기 있어?”

“네가 붙잡았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둘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궁금하네.”

약간의 위화감. 에르네스트는 잠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타티아나를 상당히 과보호한다. 정말 친한 친구로서 그렇게 챙기고, 이렇게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아나스타샤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도 당장 지금은 이 친구 관계에 변화를 불러일으킬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가끔,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상황을 그대로 설명하는 게 능사가 아닐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에르네스트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기묘한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할 때였다.

에르네스트는 쓸데없는 상념을 지우고 평범하게 이야기했다.

“연말 음악회 이야기.”

“아, 그거? 뭐야, 에르네스트 너 올해는 나가기로 했어?”

“어.”

“아하하하하, 작년엔 우리 타티아나 선생님에게 교육당하고 못 나갔었지?”

“야, 이상한 소리 할래?”

에르네스트는 낮게 윽박질렀다.

작년 연말 음악회에 죽어도 안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이유는 타티아나에게 엉망으로 져 놓은 상태에서 무대에 오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시 타티아나를 만나고, 조금 더 그녀를 잘 알게 된 후에야 에르네스트는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금 창피한 기억이었기 때문에 괜히 타티아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타티아나는 상황을 모두 이해한 듯 말했다.

“아…… 에르네스트. 작년에 혹시……?”

“…….”

“미안해요. 저 때문이었네요.”

“그걸 왜 네가 사과해? 아니…… 그땐 내가 미안했지.”

이 애는 도대체 뭘 미안해하는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훨씬 더 미안해져서 진지하게 사과했다.

아나스타샤는 킥킥 웃더니 물었다.

“아무튼, 그래서 에르네스트 올해는 나가게?”

“어. 타티아나도 같이.”

“……어?”

별생각 없이 대답했던 에르네스트는 순간 아나스타샤에게서 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여유와 느긋함, 아니면 관대함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어떠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거두어졌다.

관대함? 늘 틱틱거리던 아나스타샤가 지금까지 그런 것을 보이고 있었던 건가? 에르네스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서로 당황하기도 잠시, 아나스타샤가 눈을 깜빡인 순간 다시 분위기는 되돌아왔다.

아나스타샤는 그저 조금 놀랐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추천을 받을 만한 실력이 되니까 당연히…….”

에르네스트는 또 의도치 않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나 타티아나와 다르게 아나스타샤 넌 그만한 실력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슬럼프 기간이 조금 있어서 그렇지, 사실 어디 가서 실력 없다 소리 들을 연주자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려서부터 봐 온 아나스타샤의 대단함을 늘 믿고 있었다. 지금 조금 드러난 실력 차이 정도는 훗날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덧붙였다.

“마냥 좋은 건 아니야. 이런 것도 다. 타티아나 봐. 엊그제 연주회 마쳤는데 보름도 안 되어서 또 무대 준비해야 하게 생겼잖아. 쉬지도 못하고.”

“흐응…….”

아나스타샤는 손으로 귀 아랫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니 의외로 그리 기분 나쁘게 생각하거나 오해하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무덤덤하게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 무언가 이해하고, 정리가 된 사람의 태도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근래 들어 엄청나게 열심히 연습을 하는 이유도 멀리 있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아나스타샤가 환하게 웃으며 다시 옆에 있는 타티아나의 손을 잡았다.

“아무튼 잘됐어. 두 사람 다. 축하해.”

“……고마워.”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뭘. 너희가 잘한 건데.”

아나스타샤의 말에는 한 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의 기회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강한 그녀의 모습도 드러났다.

“지금 콩쿠르 준비하고 있는 거 나도 열심히 해야겠네.”

“아, 아나스타샤 콩쿠르 준비하고 계세요?”

“응. 말 안 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나도 놀고 있는 건 아니다?”

“놀고 있다뇨, 그나저나 어떤 콩쿠르인데요? 응원하러 갈게요.”

“괜찮아. 괜찮아. 작은 거니까.”

타티아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와 주었던 아나스타샤를 위해 꼭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럽게 웃기만 하면서 대답을 피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습을 보며 아나스타샤의 강인함을 느꼈다. 작은 무대라 보여 주기 싫은 것이 아니다. 나중에 동등한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그 과정을 다 보여 주지 않고 최소화하겠다는 의미였다.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지금의 작은 차이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아나스타샤는 성큼 올라올 것이다.

그게 에르네스트는 기대되면서도, 긴장되었다. 왜 긴장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루라도 빨리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늘 수 있도록 도와주진 못할망정.

에르네스트가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의 작은 실랑이는 금방 끝났다. 아나스타샤의 고집이 이긴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살짝 토라진 듯한 타티아나와 팔짱을 끼고는 흔들거리면서 말했다.

“내 이야기는 지금 상관없고…… 너희 그래서 음악회 이야기 같이 하고 있었던 거구나. 프로그램 같은 건?”

에르네스트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꼈다.

“혹시 듀엣 같은 거 하니?”

평범하게 묻는 것 같지만, 아나스타샤는 예전 자선 연주회 프로그램을 짤 때 타티아나의 듀엣을 반대하다가 결국 에르네스트와 듀엣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주연인 타티아나에게 과한 부담을 지워선 안 될 이유가 분명했다. 지금과는 상황이 아예 다르다. 그렇지만 어쩐지 에르네스트는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에르네스트는 똑같은 말을 할 뿐이다.

“어. 우리 학교에서 피아노과 두 명이 나가는데 안 하는 게 이상하잖아.”

“그러네. 뭐, 처음 이야기 들었을 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어.”

에르네스트는 이번에도 아나스타샤가 필요 이상의 경계심을 보이며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지으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무대는 무대니까, 잘해. 어떤 피아노를 연주하는지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평범한 말이었지만 가볍게 듣고 넘기기엔 한없이 진지하게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장난스럽게 그 말을 받아 넘기지 못했다. 웃으면서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테니 신경 끄라고 했다간 정말 큰 실수를 하게 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슬쩍 창밖을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은 연습 안 할 거지? 이만 일어날까. 에르네스트 넌 집에 간다고?”

“그래야지. 놀러 갈 거면 먼저 가.”

“알았어. 내일 봐. 가자, 타티아나.”

“내일 봐요, 에르네스트.”

“잘 가.”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갔다.

가만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교실 문이 다시 닫히고 나서야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언제까지 참아 줄 수 있을까?

“……?”

정말 이상한 생각이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은연중에 아나스타샤의 인내를 느꼈다.

정말 오래 봐 온 친구고,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근래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자면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생각을 되짚었다. 몇몇 의심되는 상황이 있긴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타티아나를 과보호하는 아나스타샤가 이성 친구인 에르네스트와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한다는 가정이었다. 조금 입맛이 쓰긴 해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 가정은 시작부터 틀렸다. 개인적인 기대가 아니라 객관적인 판단이다. 왜냐하면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의 모든 이성 친구를 철벽처럼 차단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 그리고 발렌티나 등 친한 여자애들끼리 뭉쳐 다닌다면 말 한 번 걸어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지 않았다. 오늘도 에르네스트에게 다 같이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고, 평소에도 그녀는 타티아나의 단 하나뿐인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았다. 전학을 온 그녀를 위해 되도록 많은 친구들과 잘 사귈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줄 뿐이었다.

가장 간단한 가정부터 틀리자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

차라리 언젠가 다시 한 번 위화감을 느꼈을 때, 직접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혼자 생각해 봐야 소용없을 일들을 그만두고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때마침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저녁은 친구네 집에서 먹고 오겠다는 사샤의 메시지였다.

“빨리 좀 말하지.”

에르네스트는 투덜거리며 가방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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