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아나스타샤와 난 신아르바트 거리의 한 과자가게에서 1시간도 넘게 쇼핑했다.
이것저것 맛있어 보이는 것들은 죄다 담으면서 아나스타샤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난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카페인이 들어간 것들을 제외한 다른 종류들을 몇 가지 집었다. 그것들만 하더라도 양이 엄청났다.
각각 한 바구니씩 되는 과자들을 빅토르에게 부탁해서 맡기고, 시간을 보니 슬슬 저녁때였다.
“아나스타샤.”
“응?”
“오늘 저녁도 밖에서 같이 드시겠어요? 제가 사 드릴게요.”
그 이유는 딱히 붙이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연말 음악회에 나가게 된 기념 삼아 사겠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난 그저 아나스타샤를 지금 집에 돌려보내기 싫을 뿐이었다.
스스로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으로 그녀에게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아니, 오늘은 안 돼. 집에 가자.”
“왜요……?”
“오늘은 유리 아저씨에게 전해 드릴 기분 좋은 소식이 있잖아. 안 그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빨리 전해 드려야지.”
난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생각이 깊은지 새삼 깨달았다. 지금 바보같이 구는 건 내 쪽이었다.
괜한 신경을 쓰는 것은 아나스타샤를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난 속으로 그녀에게 사과한 뒤, 어두운 표정을 보이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바로 차에 올랐다. 이대로 아나스타샤를 집으로 데려다줄 생각이다.
난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정말 많이 산 것 같아요.”
“나도.”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었다. 난 솔직히 과자들을 너무 많이 사서 저걸 다 혼자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집에 돌아가면 다른 분들에게 나눠 드릴 생각이다. 나눠 줄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나눠 줄 사람이 별로 없어도 그리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금방 다 먹을걸?”
“단거 너무 많이 드시면 건강에 안 좋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피아노 앞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까 간단히 집어먹을 만한 게 필요하더라고. 넌 안 그래?”
나도 종종 별관에서 연습을 하다가 보면 쿠키 등을 집어먹을 때가 있다.
“저도 그래요.”
“그렇지?”
아나스타샤는 역시 그렇지 않냐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언제나처럼 빛나고 있었지만, 고된 연습으로 조금 피로해하는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다.
콩쿠르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었고……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어떠한 의무감이 그녀에게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난 이런 눈빛을 한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얼마나 매진하고 있는지 잘 안다. 정말 아나스타샤가 피아노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정말 열심히 하는 아나스타샤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할 수도 없었고, 쉬엄쉬엄 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연습 힘내세요. 아나스타샤.”
“응. 타티아나 너도.”
아나스타샤가 활짝 웃자, 그녀의 얼굴에서 피로감이 확연히 옅어졌다. 난 그녀의 힘이 되어 준 것만 같아 기뻤다.
아나스타샤는 별안간 생각났다는 듯 앞좌석의 빅토르를 불렀다.
“아, 맞다. 빅토르 그거 아세요? 타티아나가 연말 음악회에 나가기로 했다는 거?”
“무슨 말씀이십니까?”
빅토르가 물었고, 아나스타샤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웃으며 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빅토르가 축하를 건넸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빅토르.”
“유리 님께서 기뻐해 주시겠군요.”
오래전부터 나와 아버지를 지켜봐 왔던 빅토르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난 미소로 답했다.
그 후로도 우리들은 이러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아나스타샤의 집이 조금만 더 멀면 좋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프리스넨스키 지구의 주상복합아파트. 그 앞에 차가 멈춰 섰고, 아나스타샤는 차에서 내렸다. 나와 빅토르가 따라 내렸다. 빅토르는 짐을 들어다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바구니를 몇 번 들어 보이면서 거절했다.
“갈게. 덕분에 편하게 왔어.”
“안녕히 가세요. 아나스타샤.”
“빅토르도 태워다 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아나스타샤 아가씨.”
“아하하하, 집 앞인데요 뭘.”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더니 손을 한 번 흔들고는, 뒤돌아 계단을 올라갔다. 아파트 문으로 들어서기 직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는 싱긋 웃는다.
난 그녀가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지켜봐 주었다.
***
간단히 씻고 편한 옷으로 식당에 가자 루슬란 오빠만 혼자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퇴근은 하셨는데 약간 늦으시는 것 같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루슬란 오빠가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오늘 메뉴는 양고기 스테이크래.”
“기대되네요.”
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나와 루슬란 오빠는 실없는 잡담을 나누었다. 잡담이라고 해 봐야 텔레비전도 잘 안 보고 겹치는 취미도 없는 우리 남매가 할 만한 이야기는 학생으로서 겪은 학교 이야기 정도뿐이었지만, 할 이야기는 많았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특별한 소식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연말에 하는 제야 음악회에?”
“예.”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 추천으로 송년 제야 음악회 무대에 신예 음악가로 설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 주자 루슬란 오빠는 정말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단하네…….”
그 목소리는 분명 축하의 뜻을 담고 있었지만, 머뭇거리는 고민 또한 담고 있었다. 무언가 복잡한 표정이다.
분명 좋은 소식을 전한 건 맞다. 큰 무대에 오를 기회이니 가족인 오빠가 기뻐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난 루슬란 오빠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심스레 물었다.
“루슬란 오빠?”
“응.”
“음악회에 오지 않으실 건가요?”
“무슨 소리야? 가야지.”
갑자기 목소리를 키우는 오빠를 보며 약간은 안심했다.
루슬란 오빠는 단어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고르는 듯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네 연주회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음악회라니…….”
“…….”
“아니 뭐, 네가 무대를 놓치고 싶어 할 리 없으니까 말리거나 할 생각은 없는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오빠는 여러 생각으로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말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냥 연말엔 집에서 같이 쉬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오빠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난 가족들과 연말을 지낼 수 있는 기회와 큰 음악회의 무대에 설 기회를 저울질한 끝에 결국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음악회를 선택했지만, 연말을 가족들과 보내고 싶어 하는 것은 루슬란 오빠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많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괜히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루슬란 오빠가 더 머리 아파할 것 같아서, 난 짧게 이야기를 정리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저…… 조금 어려울 뿐이죠.”
저번에 오빠와 했었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언제나 무대는 어렵고 힘들다. 난 쉬운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기가 힘들고 규모가 부담스럽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혹이 있더라도, 난 모든 것을 감수하고 무대에 서기로 결정했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리고 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억지로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무대에 서고 싶다는 내 의지가 반영된 선택이다.
그만큼 난 무대를 사랑하고, 내가 서 있는 무의미한 자리를 무대로 만들어 주는 청중들을 사랑한다.
그런 내 생각은 제대로 루슬란 오빠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오빠는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타티아나 너한테 조금 어려운 무대가 얼마나 대단한진 저번 주에 봐서 잘 알지.”
“기대해 주세요.”
“알았어.”
루슬란 오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무겁게 말했다.
“음…….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나오실지 모르겠네.”
“아버지요?”
멍하니 되묻자 오빠가 이어 말했다.
“예고르한테 들었는데, 아버지가 이번 연말에 이런저런 걸 준비하신 것 같더라고. 원랜 공휴일에도 바쁘신 분이 이번엔 휴가를 내셨다고 하시고. 그런데 일단 연말엔 네가 없을 것 같으니까…….”
“…….”
난 방금 전 루슬란 오빠가 내 소식을 듣고 보였던 반응을 떠올렸다.
늘 내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해 주시는 아버지라면 자랑스러워해 주실 거라 막연히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단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연말을 함께 보낼 스케줄까지 짜고 계셨다면 정말 미리 전화를 해서 허락을 구하는 게 옳았을지도 모르겠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앉아 있자 루슬란 오빠가 킥킥 웃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별수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오빠가 이어 말했다.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말고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루슬란 오빠는 내 걱정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선 늘 성심껏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저번 녹음을 할 때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오빠는 내 편이 되어 주려 했다.
“고마워요.”
나지막이 감사를 표하자 오빠가 손을 내저었다. 이제 와서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장난이나 조금 더 쳐 볼까 생각하던 와중, 문이 열렸다. 막 들어오던 아버지가 우리 두 사람을 보더니 눈을 마주쳤다.
“오셨어요.”
“그래.”
평소 말씀이 그리 많지 않은 아버지에게서 그 이상 말은 없었다. 아버지는 큰 걸음으로 척척 걸어와 식탁 앞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기다리기라도 한 듯 드미트리가 저녁 식사를 내왔다. 뭔가 말할 틈도 없다.
“들자꾸나.”
짧은 기도가 있었고, 곧 아버지가 먼저 포크를 들었다. 바로 식사를 시작하시는 것 보니 꽤나 시장하셨던 듯하다.
난 주춤거리면서 물컵만 만지작거리며 타이밍을 살폈다. 그냥 기분 좋게 말씀드리려고 했던 소식이었는데, 왜 이렇게 눈치를 살피게 된 거지?
머뭇거리는 내 태도가 느껴졌는지 루슬란 오빠가 살짝 눈짓했고, 그 모든 상황을 아버지가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본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라는 것 같다.
“아버지.”
“그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해 보거라.”
아버지는 들고 계시던 식기를 내려놓으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진지하게 들어 주시겠단 모습이다.
진짜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되었지. 조금 더 가볍게 말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입을 여는 순간까지도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난 천천히 말했다.
“연말에 음악회에 나가려고 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늘 내가 하는 일들을 믿어 주고, 응원해 주시는 분이지만…… 어쩌면 겉으로 표하진 않으셔도 내심, 정말 약간이나마 실망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은 큰 변화 없이 평온했다. 되레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을 즐기시는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툭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거라.”
“!”
“내가 반대라도 할 줄 알았느냐? 타티아나.”
“아뇨, 그게…….”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말꼬리를 흐리자 아버지가 드물게 웃음을 보이며 와인 잔을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네가 적어도 내년 네 생일까진 무대에 서지 않고 쉬리라 생각했다.”
“……원래는 그러려고 했어요.”
나도 모르게 약간 변명조로 말이 나왔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연말 음악회에 나가기로 한 건 오늘 갑자기 정해진 일이었으니까.
내 바보 같은 소리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고, 아버지는 와인 잔을 살짝 흔들고는 이어 말씀하셨다.
“하지만 깊게 생각한 끝에 무대를 선택했다면, 아비 된 입장으로 난 당연히 널 응원해야지.”
“아버지…….”
“연말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 준비가 힘들진 모르겠다만…… 충분히 생각하고 하겠다 한 것이겠지?”
계속 바보처럼 머뭇거리기나 하고 뒤늦게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 이 믿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해 드릴 차례였다.
“예, 할 수 있어요. 잘 할게요.”
“알았다.”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하다는 듯, 아버지는 와인 잔을 기울였다. 잠시 끊어진 대화 사이로 따뜻한 저녁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돌아온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 무대는 내 것이고 내 판단으로 서는 것이 당연했지만, 앞으로 가끔은 날짜를 봐 가면서 생각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잔을 내려놓은 아버지는 다시 나이프를 들기 직전,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잘되었구나. 조금 공교롭기도 하고.”
공교롭다니요?
“루슬란, 타티아나. 난 원래 너희를 데리고 그 음악회에 가려고 생각했었다. 티켓도 미리 말해 뒀지.”
“……예?”
“음악가들의 축제도 즐기고, 특히 타티아나 네가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텔레비전으로 음악회를 꽤 흥미롭게 보고 있었던 것 같고.”
난 그제야 아버지가 무엇을 준비하고 계셨는지 깨달았다.
눈을 크게 뜨자 아버지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1년이 지나 내가 너희를 그 음악회의 청중석에 데려갈 생각을 하는 사이, 청중석이 아니라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었구나. 타티아나.”
그 따뜻한 눈빛과 목소리는 조금 남아 있던 약간의 불안감도 모두 날려 버렸다. 음악적 실력이 인정받아 기분이 좋은 것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끌어안고 있는 의무와 책임 그 모든 것이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어 표현하고 싶었는데, 목 안에 무언가 가득 차올라 있는 것 같아서 되레 말하기 힘들었다.
아버지가 다시 한 번 가볍게 날 격려했다.
“피아니스트로서 올해를 잘 마무리 짓길 바라마.”
“……예.”
난 천천히 숨을 내뱉듯 대답했다.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