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68화 (368/1,277)

##  368화

연말이 다가오자 교내엔 은근히 들뜨는 분위기가 맴돌았다. 긴 휴일이 함께하기 때문에 그사이 여행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많고, 마음이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치열하게 보내고 있는 학생도 많다.

“……후우.”

난 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요 며칠간 연습했던 레퍼토리들이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아직 음악회 프로그램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의 추천에 따라 연습해 둔 곡들이다.

빠르게 모든 음악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수만, 어쩌면 수천만 명이 보게 될 무대에 올릴지도 모르는 곡이라고 생각하면 이 곡으로 괜찮을지 의구심이 든다.

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음악회에 함께할 다른 음악가들과 빨리 만나 보고 싶다. 음악가들, 그리고 콘서트 디렉터 등 연주회 관계자들과 만나서 각자 어떤 곡들로 음악회를 꾸릴 것인지 이야기하고, 프로그램을 정해야 했다.

미하일 선생님이 계속 일정을 물어보고 있다고 하시니 기다리면 될 일이지만…… 연말까지 며칠 남지 않은 시간은 그사이에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정해지지도 않은 프로그램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자꾸 다른 곡들이 끼어들어서 머리가 어지럽다. 잡스런 생각들을 치워 버리기 위해 연습을 다시 반복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저녁에 이어 하는 게 낫겠다.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연말 음악회뿐만이 아니었다. 내년 초에 있는 9학년 1학기 시험도 허투루 준비할 수 없다.

난 건반 덮개를 살며시 닫고,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와선 곧장 스터디룸으로 향했다.

스터디룸엔 한 명밖에 없었다.

“어, 타티아나. 오늘 안 올 줄 알았는데.”

“리처드.”

리처드는 공부는 안 하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머쓱하게 웃으며 펜을 잡았다.

난 현장을 잡은 형사와 같은 웃음을 띠고 그쪽으로 향했다.

“공부하고 계셨나요?”

“아니, 게임.”

“…….”

농담이나 조금 해 볼까 했는데 이렇게 빨리 인정해 버리니 달리 할 말이 없다.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반대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도 결국 웃어 버렸다.

“오늘은 우리 둘뿐이네요. 리처드.”

“다들 바쁜가 본데. 우리만 안 바쁘고.”

스터디룸엔 나와 리처드 둘뿐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연습이나 레슨, 다른 공부 등으로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리처드가 펜을 탁 놓더니 말을 잘못 했다는 듯 물었다.

“아니지, 우리가 아니잖아? 타티아나. 너 연말 음악회 준비는?”

“하고 있어요. 지금도 오후 연습을 마치고 온 거예요.”

“더 안 해도 되겠어?”

“프로그램이 아직 미정이라서 레퍼토리 몇 곡을 다듬었어요. 오후 연습은 이 정도로 하려고 해요. 공부도 소홀히 할 순 없잖아요?”

“대단하네, 모범생. 나 같은 건 상상도 못 할 마인드야.”

“놀리지 말아요.”

리처드는 별로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듯 픽 웃더니 다시 펜을 쥐고 이번엔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런데 아직 프로그램이 미정이라면 일정이 조금 촉박한 것 같은데.”

“인선이 정해진 것도 며칠 안 되어서요. 그래서 아직 어떻게 되었는지도 전달받지 못했어요. 사실 이렇게 늦어지는 일은 없다고 하는데…… 이번엔 약간 그렇게 되었네요.”

“어차피 선수들 모아 놓고 할 거니까 배짱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다른 연주자들 누군지는 알아?”

“아뇨, 아직. 조만간 연주자들 간 미팅이 있을 것이라 들었어요. 아마 곧 하지 않을까요?”

에르네스트와 나 말고는 누가 있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아마 언제라도 바로 무대에 올려도 문제없을 사람들만 모이게 되겠지.

레퍼토리도 실력도 출중하고 인기도 많고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도 뛰어난 실력자들.

난 작년 연말 음악회를 봤었고, 이 음악회가 정말 러시아의 자랑이라고 할 만한 음악가들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 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분들이 함께할지 기대되네요.”

긴장감보다 기대가 앞선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마친 상태였다.

공영방송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을 시간에 러시아 전역에 생방송으로 나가게 된다는 점도 괜찮다.

어차피 청중을 두고 무대에서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해야 할 일도 똑같고.

리처드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긴장 같은 건 하나도 안 하는 것 같네. 대단해 너도.”

“긴장은 해요. 그보다 조금 더 기대될 뿐이죠.”

“그게 말이 돼?”

나는 리처드와 긴장과 기대가 함께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쓸모없는 토론을 나누었다. 결론도 딱히 없고, 왜 하는지 모를 토론이지만 난 이런 시간도 즐거웠다.

그런데 한창 이야기를 하던 리처드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이야기의 방향도 틀어졌다.

“에르네스트가 같이 가기로 해서 그런가?”

“에르네스트요?”

“같이 한다며? 듀엣도 하기로 했다면서.”

이미 교내에 나와 에르네스트가 연말 음악회에서 무대에 오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리처드의 입에서 그걸 들으니까 조금 생소하기도 했다.

요 근래 많이 친해진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서로 틱틱거린다. 하지만 확실히 예전하고는 서로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약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자 리처드가 픽 웃었다.

“조금 아쉽네.”

“아쉽나요?”

평소 이목을 끄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면서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물어보니 그가 이어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추천 못 받은 게 아쉽지. 이번에도 그 둘 듀엣 시키면 재미있었을 텐데.”

뭔가 했더니 저번 자선 연주회 이야기였다.

그때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듀엣으로 정말 멋진 연주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걸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니 리처드는 약간 다른 목적으로 그 두 사람을 붙여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농담 같은 어투였으니 농담으로 받아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난 그의 말에 대해 농담으로도, 진지하게도 대답할 수 없었다.

조용히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예민한 통찰력이 깃든 눈빛이 날 주시하다가, 살짝 휘어지며 미소를 이룬다.

“뭐, 재미있다고 해서 전부인 건 아니지만.”

살짝 회피하는 듯한 어투. 그는 지켜볼 생각이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안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음악회는 봐 주실 거죠? 티켓 드릴까요?”

“미안한데 나 연말에 잠깐 집에 갔다 올 예정이라서. 시험공부나 진득하게 하려고 했는데 자꾸 오라네.”

“아…… 그러신가요.”

“뭐, 영국에서도 인터넷으로 방송 찾아보면 되니까. 걱정 마. 거기서 볼게. 너나 그 자식이나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까 기대되네.”

리처드는 믿고 기대하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음악회 건으로 전달할 말이 있으니 레슨실로 오라는 미하일 선생님의 메시지였다.

“공부는 할 틈이 없었네요.”

“호출 왔어?”

“예. 가 봐야겠어요. 리처드.”

“그래. 나도 연습이나 하러 가야겠네.”

리처드도 혼자 스터디룸을 지키고 싶진 않은 것 같다. 우린 같이 스터디룸을 나와선 각기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연습 중인 수많은 악기 소리들이 아련하게 뒤섞이며 복도를 채웠다. 곧 리처드의 피아노도 여기에 섞일 것이다.

불협화음이지만 어쩌면 음악처럼 들리기도 하는 소리들을 하나씩 분석하며 걷다 보니 금세 레슨실 앞이다. 살짝 기다렸다가, 노크를 하니 들어오라는 말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찍 왔구나.”

“안녕하세요.”

레슨실 안에는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자, 타티아나.”

코트를 벗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자 에르네스트가 일어나선 차를 타서 가져다주었다. 내가 즐겨 마시는 캐모마일이었다. 난 감사를 표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온몸이 따뜻해졌다.

내가 한숨을 내뱉으며 숨을 고르자 구세프 선생님이 불쑥 물었다.

“그간 연습은 많이 했나.”

내 레퍼토리를 전반적으로 다듬으면서 미하일 선생님이 저번에 말씀하신 라흐마니노프의 연습곡들을 준비하긴 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물어보시니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 머뭇거리고 있자 구세프 선생님은 호통을 치는 대신 말했다.

“하긴, 그렇겠지. 회의도 한 번 하지 않고 대체 뭘 하라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연말까지 시간이 없는데 뭔가 준비가 안 되는 것 같으니 구세프 선생님도 짜증이 나신 듯했다.

선생님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시곤 이어 말했다.

“어쨌든…… 빨리 프로그램 가이드라인 내놓고 연주자들 모아서 회의시키지 않고 뭘 하는 거냐고 몇 번 난리를 친 보람이 있는지, 오늘에서야 진행위원회에서 답변이 왔다. 오늘 4시까지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모이면 된다고 하더군.”

드디어 시작되었다.

난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슬슬 준비해서 가면 될 거다. 옷을…… 갈아입는 게 좋을까? 미하일.”

“교복을 입고 있다 해서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지만, 음…… 사복이 나을 것 같네.”

두 분 다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성인 음악가들이 즐비할 그 곳에 교복을 입고 간다면 아마 귀여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회의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차피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이란 것은 모두가 알겠지만, 단둘이 교복으로 튀는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구세프 선생님이 나와 에르네스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좋아. 둘 다 이해했나. 사복으로 4시까지다.”

“예, 선생님.”

“마음 같아선 같이 가 주고 싶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지? 되레 너희들이 제 목소리를 못 내고 불편해하기만 할 것 같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들이 대신 해 주실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다. 다른 음악가들과 프로그램 회의를 하는 것은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피아노 듀엣도 하고 싶다고 했었지?”

이번엔 미하일 선생님이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예. 같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생각이지만, 정해진 시간에 한 곡을 더 넣으려면 다른 음악가들이나 디렉터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겠지. 프로그램 가이드라인은 나와 있을 텐데, 앙코르 무대가 가능한 음악회도 아니고.”

연말에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음악회다. 프로그램은 타이트하게 만들어질 테고, 여유는 별로 없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가진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실력으로 따내겠습니다. 확실하게.”

“하하하, 어떻게든 잘 해낼 것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

미하일 선생님은 믿음직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셨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에르네스트의 태도는 이럴 때 정말 큰 힘이 된다.

구세프 선생님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자, 첫 회의니까 간단히 인사 정도 하고 프로그램에 대한 큰 틀이나 이야기하겠지. 하지만 오늘 대부분의 것들이 정해질 게다. 거기에서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 부딪쳐 보고 오너라.”

“예. 선생님.”

잘 준비해서 갔다 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와 에르네스트는 레슨실에서 나왔다.

“…….”

우린 말없이 서 있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갈까요.”

“그래.”

“집까지 태워다 드려도 될까요.”

“굳이 그럴 필욘 없는데.”

“괜찮아요.”

“……그럼 부탁할게.”

에르네스트는 두 번 거절하지 않았다. 4시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많은 것은 아니어서 차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란 건 분명했다.

그와 함께 주차장 쪽으로 내려갔다.

몇 걸음 앞장서서 내려가는 에르네스트의 뒷모습을 따라 걷다가, 난 문득 그를 불렀다.

“있잖아요, 에르네스트.”

“응.”

“이제 시작이네요.”

“그래. 지금부터 시작됐다고 봐도 되겠지.”

그간 여러 무대를 준비해 봤고, 또 에르네스트와 함께 연주회를 꾸려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여러 음악가들 사이에서 우리가 주연은 아니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친다.

난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잘 부탁드려요.”

에르네스트는 별말을 다 한다는 듯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올해 마지막까지.”

이제 보름도 채 남지 않았지만, 그사이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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