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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369화 (369/1,277)

##  369화

늘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오는 내가 오늘따라 일찍 귀가하자 로비에 앉아서 쉬고 있던 나제즈다가 깜짝 놀랐다.

“어쩐 일이세요, 아가씨?”

“오늘 연말 연주회 회의가 있어서요. 사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왔어요.”

“세상에, 세상에. 다른 음악가 분들도 오시겠네요?”

“그렇죠?”

나제즈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그렇다면 완벽하게 세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며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예전엔 정말 하나부터 끝까지 내 생활을 챙겨 주곤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내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자 간섭하거나 주의를 주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었다.

그런데 오늘 모습을 보니 그간 상당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편안한 자리는 아니시겠죠?”

“예. 하지만 너무 포멀할 필요는 없어요.”

“아하,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요. 실내에 계실 거죠? 그러면 아우터도 중요하지만 계속 입고 계실 옷에 신경을 써야겠어요?”

옷장엔 아나스타샤와 쇼핑으로 채워 둔 옷들이 가득했다. 나제즈다는 제대로 보고 꺼내긴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옷들을 휙휙 꺼내 침대 맡에 가지런히 깔았다.

괜히 쉬고 있는 나제즈다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가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길게 시간을 쓸 수는 없어서 약 1시간 남짓. 나제즈다의 도움으로 헤어 드라이도 마치고, 다시 거울을 확인했다.

“전 너무 마음에 드네요. 아가씨, 어떠세요?”

“저도 좋아요.”

따뜻한 하이넥 스웨터에 하얀 시어링 코트. 올해 핫 아이템이 될 거라면서 아나스타샤가 추천해 주었던 것들이었다. 너무 딱딱하거나 튀지 않고, 적절하게 캐주얼했다.

나제즈다는 행복하게 웃으며 내 어깨선을 매만졌다.

“오늘 잘 하고 오세요.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나제즈다.”

늘 이렇게 힘이 되어 주는 분들이 곁에 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나제즈다를 한 번 꼭 안아 주고는 마지막으로 밍크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왔다.

빅토르는 춥지도 않은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 뛰듯이 다가갔다.

“너무 늦었죠. 죄송해요.”

“아뇨, 아가씨. 무슨 말씀을.”

“춥지 않나요?”

“방금 나왔습니다.”

빅토르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지만 난 신경이 쓰였다. 날 기다릴 때면 어디 따뜻한 곳에서 기다려 달라고 그간 몇 번이나 말했는데, 도무지 들어주질 않잖은가. 예전부터 그건 정말 불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눈에 힘을 주고 올려다보아도 빅토르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난 결국 포기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아가씨.”

“……예.”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어디로 갈까요. 에르네스트 그 친구를 데리러 가면 되겠습니까?”

“예, 그렇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타시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뒷문을 열어 주었다.

난 차에 오르자마자 에르네스트에게 이제 출발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대로 곧바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가고 에르네스트는 따로 지하철을 타고 오게 둘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같이 가는데 그렇게 매정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잠시 후, 빅토르가 운전하는 차량은 에르네스트가 사는 3층집 앞에 도착했다.

에르네스트도 이 추운 날 밖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빅토르도 그러더니, 왜 이러는 거예요, 정말?

난 살짝 불만인 얼굴로 창문을 열었다.

***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조금 더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다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나가도 상관없겠지만, 찬바람을 쐬면서 머리를 조금 맑게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밖으로 나온 에르네스트는 눈 내린 도시를 바라보다가, 다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혼자 회의에 가는 것이라면 복장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타티아나와 함께 간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신발을 다른 걸로 신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

찬바람이 옆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에르네스트는 코트 자락을 여미며 숨을 내뱉었다.

타티아나와 큰 무대에 설 기회라서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이미 여러 번 큰 무대를 겪어 온 경험이 에르네스트를 진정시켰다.

타티아나야말로 겉으로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아도 큰 무대에 혼란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옆에서 잘 도와줘야만 했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고개를 들고, 차오르는 흥분과 기대감을 자제력으로 누르면서 타티아나를 기다렸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베르체노프가의 검은 차량이 에르네스트의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가 완전히 멈추고,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에르네스트는 숨을 죽였다. 타티아나가 창 너머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 표정이 심상찮다. 눈빛에 시니컬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춥지 않나요? 에르네스트.”

걱정이 걱정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이 영하의 날씨보다 훨씬 차갑게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당황했다. 언제나 그렇듯 웃으면서 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지금 타티아나는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에르네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신발을 갈아 신었어야 했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에르네스트는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추워.”

“…….”

타티아나의 얼굴에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이 스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춥다고 말하는 친구를 밖에 오래 세워 둘 사람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들어오세요.”

“고마워. 실례할게.”

문을 열자 타티아나는 좌석 안쪽으로 자리를 비켜 준 상태였다. 에르네스트는 히터가 켜져 있는 차 안의 훈훈함을 느끼며 탑승했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분위기는 그리 훈훈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당히 드문 자세를 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다리까지 꼬고 있는 것이다. 늘 곧게 앉아 있는 타티아나만 봐 왔던 에르네스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진짜 신발인가?

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타티아나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 계속 어색할 것만 같고, 이 어색함이 오늘 회의에 쭉 이어지면 전혀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 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머쓱하게 말했다.

“……올겨울 좀 춥네.”

“그게 다 체력이 약해지셔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응?”

“이번 주현절에는 입수라도 해 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타티아나가 툭 던지듯 말했다.

1월 19일 주현절은 정교회에서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러시아에선 찬 얼음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뭔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멀거니 물었다.

“너 화났어……?”

“아뇨? 제가 왜요.”

시치미를 뚝 떼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가려지진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고민에 빠졌다. 보기만 해도 추워지는 그 행사에 왜 참가해 보라고 한 걸까? 잘 버틸 것 같아서? 아니, 분명 춥다고 말 했는데.

아리송한 기분으로 에르네스트가 입을 열었다.

“아니 뭐…… 그럼 정말 입수해 볼까. 진짜 어릴 때 말곤 해 본 적 없는데.”

“……정말 하신다고요?”

“죽기야 하겠어? 옆에 앰뷸런스도 다 불러 놓고 하는데.”

어릴 때 얼음물을 뒤집어써 본 적은 있어도 아직 주현절 행사에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번쯤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들도 종종 나온다지만 설마 죽기야 할까.

그런데 타티아나는 조금 새파래진 안색으로 말렸다.

“하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

밖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었더니 오자마자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더니만, 이젠 막상 해 보라는 걸 하겠다니까 잘못했다면서 말린다.

에르네스트는 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타티아나가 자신을 얼려 죽일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했다.

타티아나는 약간 맥이 빠졌는지 팔짱도 풀고 다리도 바로 하고 앉았다. 에르네스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기운 나게 할 화제를 던졌다.

“얼음물에 입수하는 거 말고 우리가 지금 관심 있어 해야 할 이야기나 할까.”

“관심이요?”

“나 목록 받았거든.”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르네스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번에 참가한 연주자들 목록.”

“정말이신가요!?”

단번에 만면에 화색을 띠며 그녀가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구세프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화면에 띄우며 말했다.

“읽어 줄게. 알렉세이, 율리야…….”

“같이 봐요.”

그런데 한 줄 읽기도 전에 타티아나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의 옆으로 다가왔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고 싶다는 듯 내민 머리가 에르네스트의 어깨에 살짝 닿았다.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감에 약간 당황했지만,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타티아나 쪽으로 기울여서 그녀가 쉽게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달리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함께 연주자들의 목록을 읽어 나갔다.

그중엔 두 사람이 아는 이름도 있었다.

“로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소속의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저도 알아요!”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는 분을 또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아 기쁘네요.”

“……그래?”

에르네스트는 스스로가 정말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밝게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은 언제나 좋다. 하지만 아는 음악가를 찾아내서 잘됐다고 생각하다가도, 순수한 진심으로 같이 웃어 주기 어려웠다.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약간의 이기심 등을 눌러 버리곤 그녀에게 말했다.

“또 아는 사람 있어? 봐 봐.”

두 사람은 다시 연주자들을 살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마지막으로 발견한 한 이름에 집중했다.

“세,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칼루진……? 정말 이분이 오신다고요?”

그게 누군데?

에르네스트가 묻기도 전에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여한이 없네요…….”

“세르히 세르게예비치가 누구야? 난 모르겠는데.”

진짜 누군지 모르겠다. 그런데 누군진 몰라도 약간 싫어지려 한다.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제가 최근에 듣게 된 음반의 연주자예요. 저번에 에르네스트에게도 추천해 드렸었는데. 기억 안 나시나요?”

“잠깐만…….”

가만 생각해 보니 저번에 말해 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땐 가볍게 생각하고 나중에 들어 보려 했었는데, 이렇게 타티아나가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한번 들어나 볼 걸 그랬다.

타티아나가 다시 물었다.

“기억나셨나요?”

“어…… 응. 기억났어.”

“다행이에요. 세르히 세르게예비치의 음반은 정말 훌륭하거든요. 제가 요즘 가장 많이 듣…….”

다시 한 번 좋아하는 음반을 추천하려는 듯 말하던 타티아나는 순간 숨을 멈추더니,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가장 많이 듣는 음반은 다른 음반이네요. 그다음으로 많이 들어요.”

“……? 가장 많이 듣는 건 뭔데.”

“……글쎄요.”

그녀는 두리뭉실하게 중얼거리다가, 에르네스트와 너무 가까이 앉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슬금슬금 좌석 저편으로 멀어졌다.

너무 기뻐했던 게 살짝 부끄러워진 것 같았다.

“역시 정부에서 주최하는 음악회라서 그런지 대단하신 분들이 많이 오시는군요. 세르히 세르게예비치도 있고…… 물론 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이름만 알 뿐이지만요…….”

타티아나는 멀리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분명 아까보다 거리는 멀어졌는데, 멀어진 것 같지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유치한 감정 등은 아무것도 아닌 연기였던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타티아나가 좋아하는 연주자라면 좋아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를 향해 말했다.

“왜 그래, 타티아나. 지금까진 우리가 알아봐야 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이젠 아니잖아. 그쪽에서도 우리 이름을 알겠지.”

“……아.”

“이번에 인사하면 되겠네.”

에르네스트가 별것 아닌 간단한 일이라는 듯 말하자 그제야 타티아나는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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