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70화 (370/1,277)

##  370화

모스크바 음악원 앞에 내린 우리 두 사람은 빅토르의 배웅을 받으며 음악원에 들어섰다.

“…….”

에르네스트의 뒤로 몇 걸음 떨어진 상태로 따라가면서 난 차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저번에 에르네스트에게 선물 받은 음반은 정말 소중하게 잘 듣고 있다. 하지만 그걸 당사자 앞에서 근래 제일 많이 듣는 음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어쩌면 그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말을 걸기가 무서웠다.

그런데 앞서 걷던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렸다.

“타티아나.”

“아, 예.”

딴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깜짝 놀라 멈춰 선 나는 그가 손짓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합주 연습실이었다.

“다 왔어. 들어갈까.”

바로 벌컥 열고 들어가지 않은 것은 내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이리라.

난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모두 마음 한쪽에 밀어 놓고, 눈앞에 마주한 현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오긴 했지만, 저 연습실 안에는 이미 연말 음악회 회의 건으로 음악가분들이 모여 있을지도 모른다.

난 목소리가 크게 울리지 않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안에 누구 계신가요?”

“몇 명 있나 봐. 말소리가 들리네.”

에르네스트도 덩달아 소곤거리며 대답하더니 킥 하고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니 약간 긴장도 풀리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작게 한숨을 쉬고, 문고리를 잡았다. 확실하게 내가 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들어갈게요.”

“그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에 섰다.

난 괜히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여기서 미 국채 장단기 금리 역전이 일어났죠. 이후 유동성 흐름에 대한 수학적 모델링을 다시 그려 보자면…….”

강의실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남자가 마커를 들고 화이트보드에 어지러운 수식과 그래프를 그려 가면서 무언가 설명하고 있었고,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앉아서 심각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 광경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 어떤 상황과도 맞지 않았다.

“……??”

당황해서 넋이 나간 사이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강의가 멈춘 이유를 찾는 눈빛이다.

순간적으로 당장 문을 닫고 나가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충동과 반대로 몸은 반사적으로 인사부터 했다.

“아, 안녕하세요?”

하지만 나와 달리 에르네스트는 솔직했다.

“강의 중이었네요. 죄송합니다. 나가 있을게요.”

“나가긴 어딜 나가, 이 친구야!”

앉아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면서 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 남자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턱 잡았다.

“여기 맞아. 연말 음악회 미팅 장소. 내 얼굴 몰라? 에르네스트.”

“알죠. 바실리. 근데 경제학 강의 중인 것 같아서.”

“이 음악원에 경제학 강의가 어디 있어? 그냥 재테크 이야기였어. 우리 나이쯤 되면 그런 것도 신경 써야 한다고.”

성인 음악가들이 모여서 음악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어쨌든 여기 모스크바 음악원 제대로 찾아온 게 맞긴 하구나…….

그제야 난 주위를 다시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저편에 있는 피아노와 보면대들. 연습실이 분명했다. 대체 얼마나 엄숙한 강의를 하고 있었길래 문을 열자마자 분위기가 경제학 강의실로 느껴졌던 걸까.

그런데 그 엄숙한 강의를 하시던 분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커를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그간 잘 지냈습니까.”

“잘 지냈죠! 저도 반가워요. 로만.”

헤어진 지 1주일 정도밖에 안 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만나니 반가웠다.

밝게 웃으며 다가가서 로만과 악수했다. 주변에서 나와 로만을 두고 의외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양반이 알고 지내는 학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로만 저번 주에 연주회 했었잖아. 거기 협연자.”

“아, 어쩐지 들어 본 이름 같더라.”

역시 피아노 연주자로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난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는지 살짝 고민했다.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에르네스트와 바실리라고 했던 남자가 앞으로 나와 내 옆에 섰다.

호탕한 인상의 바실리가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러다 어깨 빠지는 거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지만 저게 그가 보이는 친애의 표시인 듯했다.

바실리가 경쾌하게 말했다.

“자, 우리 최연소 두 명 소개부터 할까. 우선 이쪽은 에르네스트. 알 사람은 다 알 거야. 유명한 애니까.”

“알다마다요.”

“실물이 더 잘생겼네?”

에르네스트의 인기는 그야말로 굉장했다. 15명이나 되는 음악가들 대부분이 알은체를 했고, 그중 몇 명은 안면이 있는지 에르네스트는 그들과 짧게 인사까지 나누었다.

어쩐지 에르네스트는 참가자 목록을 보면서도 별 반응이 없었는데, 두근거리고 있었던 건 나 혼자였던 거야?

약간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난 바실리처럼 친밀하게 소개해 줄 사람도 없으니 알아서 해야…….

“그리고…… 로만, 자네가 소개 좀 해 줘.”

그때, 내 쪽으로 시선들이 몰렸다. 그리고 난 그 시선들을 받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만이 바실리의 요청을 받곤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기대가 일다가, 가라앉았다.

로만은 바실리처럼 쾌활한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어쩐지 그가 날 대신 소개할 정도로 알진 못한다고 딱 잘라 말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가 친구 같은 관계는 아니니까.

하지만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로만은, 천천히 앞을 보며 말했다.

“여긴 중앙음악학교의 타티아나입니다. 저번 주엔 같이 훔멜과 그리그를 연주했었죠.”

“그리그? 쉽지 않았을 텐데.”

그리그라는 작곡가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확실히 쉬운 곡은 아니다.

약간의 흥미와 관심 등이 여기저기서 솟아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로만은 굳이 그 좋은 분위기에 한마디 더 얹었다.

“그리고 같이 연주해 본 제가 말씀드리는데, 타티아나는 만만찮은 피아니스트입니다. 피아니스트분들 긴장 좀 하셔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순간적으로 적막이 감돌았다.

난 로만이 갑자기 모두를 도발하는 듯한 말을 했다는 것에 놀라고, 또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가 내민 의견을 모두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척 봐도 피아니스트로 보이는 몇 명이 탐색하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이가 어리다는 첫인상을 바로 벗어던지고 피아니스트가 피아니스트를 재 보는 눈빛이다.

로만 도대체 왜 그랬어요. 절 죽이려는 건가요?

약간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난 저 사람들에게 제대로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고 싶기도 했다. 움츠러들지 않고 그들과 눈을 마주치자, 몇 초 안되어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되돌아왔다.

“또 무슨 소리야 로만, 당연히 항상 긴장하고 있지.”

“우리 좋은 무대 만들어 봐요! 타티아나.”

환영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어쩐지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난 그제야 아무도 보이지 않게 작게 한숨을 쉬며 로만을 돌아보았다. 로만은 당연한 말을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 자기 의견을 진지하게 냈을 뿐이었다.

소개에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인 것 같은데 감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난 모자를 벗으며 그에게 말했다.

“긴장은 제가 제일 많이 되는걸요. 로만.”

“괜찮지 않습니까?”

“……코트 걸어 놓고 올게요.”

벽 쪽에 있는 옷장에 가서 코트를 벗으며 살짝 옆을 보니 멀리 에르네스트는 이미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느라 바쁜 듯 했다.

여기서 난 안중에도 없냐며 그에게 불만을 가질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난 얌전히 코트를 걸어 놓고 다시 로만에게 갔다.

이 연습실에 막 들어섰을 때 로만이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로만, 강의는 안 하셔도 괜찮나요?”

“무슨 강의 말입니까?”

“저기 화이트보드에 쓰시던 거요…… 다른 분들에게 경제학과 투자에 대한 강의를 하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내가 말하면서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상황은 분명했다. 로만은 원래 음악이 아니라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피타고라스 음률에 흥미를 가지고 음악을 시작했다고 하니 알 만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경제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수학을 잘하면 경제학도 잘할 수 있는 걸까?

꽤 궁금해지는 주제였는데, 로만은 대수롭잖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저건 강의가 아닙니다. 그냥 단순한 원리를 설명하는 거죠.”

“…….”

저 화이트보드를 채운 수식들은 전혀 단순해 보이지 않는데요.

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옆에서 내 대신 반박이 들어왔다.

“강의 맞아, 우리 로만 박사님은 재테크의 귀재거든.”

안경을 쓴 검은 머리의 여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로만과 상당히 친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만 박사님.”

“학위도 없는 사람을 박사라 부르면 안 되지.”

“아이구.”

로만다운 딱딱한 대답에도 농담이 이어졌다.

“우리 교수님이 강의를 더 하실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럼 다른 이야기나 할까. 아, 내 이름 소개도 안 했구나. 율리아 안티노바 레스코브스카야야. 율리아라고 불러 줘.”

“아, 반가워요. 율리아. 타티아나예요.”

“응.”

율리아가 밝게 웃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로만과 율리아를 기점으로 내 주변에도 내게 관심이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몇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아르템이야. 악기는 피아노고.”

“난 밀리차. 나도 피아니스트야.”

아까 피아니스트로 보였던 사람들은 역시나 진짜 피아니스트들이었다. 이미 연주회도 수십 번이나 하고 음반도 몇 집이나 낸 프로 피아니스트들.

얼굴을 봐선 잘 몰랐지만, 이름을 제대로 듣고 인사를 하고 나니 이 분들이 냈었던 음반들이 하나 둘 머리에 떠올랐다.

줄곧 음반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내 앞에 앉아 있다. 인사를 하고 웃어 준다.

난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드보르작 작품집 내시지 않으셨나요? 유모레스크와 소품들이요.”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 음반 샀거든요. 해석이 너무 좋아서 연구할 때 자주 듣곤 했어요.”

“와우…… 그건…… 정말 영광이네. 고마워.”

아르템이 말했다. 정말 기뻐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빈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별로였으면 기억도 못 했다. 실제로 정말 좋은 명반들이라서 기억에 잘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난 밀리차가 냈었던 베토벤 소나타 음반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면서, 금방 이 음악가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지한 감상과 물음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온다. 난 내가 좋게 들었던 음악의 주인들과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 신선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비로소 음악회 회의를 하러 온 기분이 든다.

아까 강의 장면을 봤을 때의 충격이 이제야 가시는 것 같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에르네스트가 슥 끼어들며 말을 걸었다.

“타티아나. 여긴 무슨 이야기 하는 중이야?”

난 짧게 대답했다.

“음악 이야기죠.”

“무슨 음악?”

그냥 이야기에 흥미가 있다기보단, 내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괜찮은지 궁금해하는 투였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 앉으세요.”

난 옅게 웃으며 에르네스트에게 바로 옆자리를 권했다. 에르네스트는 별말 없이 내 옆에 앉았다.

가만히 우릴 보고 있던 율리아가 물었다.

“두 사람 혹시 별로 친하지 않나 했는데 그렇진 않나 봐?”

“예?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렇게 보일 줄은 몰랐다.

이곳에 오자마자 에르네스트와 떨어져 있었던 건 그와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그냥 어쩌다 보니 따로 있었던 건데, 율리아가 보기엔 같은 학교의 같은 전공인 우리가 떨어져 있는 게 약간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난 그녀가 걱정할까 싶어서 말했다.

“친한 사이예요…….”

그런데 막상 내 입으로 친하다고 말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손발이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살짝 에르네스트를 보니 그도 견디기 힘든 듯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난 3초 전의 나를 원망했다.

그런 우리를 보던 율리아가 히죽 웃었다.

“그래?”

“……예.”

“그럼 가장 좋지. 이제 조금 있으면 프로그램 회의 시작할 건데…… 우리 콘서트 디렉터가 가이드라인을 어떻게 잡아 놨는진 몰라도 아마 오늘의 주인공은 너희 둘이 되지 않을까?”

“그, 그럴 리가요?”

“안 될 건 또 뭐야? 난 타티아나 네가 밀리차랑 이야기하는 거 보고 딱 깨달았어.”

밀리차와 나눈 이야기는 그저 음악에 대한 서로의 견해 정도였지만, 그녀는 확신한다는 듯 말했다.

“여기 추천받을 만해서 왔다는 걸.”

옆에 있던 밀리차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난 이런 기대를 받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적어도 문전박대 당하는 것 같진 않아서 조금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