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71화 (371/1,277)

##  371화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사이 몇 명이 더 왔고, 15명도 넘게 모인 연습실은 한층 더 북적북적해졌다. 모두가 러시아 클래식계의 셀레브리티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음악가들의 시선과 관심은 묘하게 나와 에르네스트 쪽으로 쏠려 있었다. 난 이 정도로 많은 질문은 받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가장 어린 두 사람이 같이 앉아 있으니까 눈에 띄는 모양이다.

“그런데 중앙음악학교 교복은 왜 갈아입고 왔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맞아, 내가 안 그래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

“교복? 나 땐 없었는데.”

“작년부턴가 바뀌었대.”

“저번에 봤는데 예쁘더라.”

정말 교복 입고 왔으면 일어나서 연습실을 한 바퀴 돌 뻔했다. 사복으로 가라는 선생님들의 말을 들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교복에 대한 이야기 다음엔 자연스럽게 학교가 나왔다. 그리고 각각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거쳐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여기 모인 음악가들은 대부분 학교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왔지만, 태어난 고향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저 멀리 러시아 극동의 캄차카반도가 고향인 분도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난 혹시나 우리 집에 대한 약간 사적인 질문이 나오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무도 그런 걸 물어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날 위한 모두의 배려인 것 같았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았지만, 그래도 날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딸이 아닌 중앙음악학교의 피아노 연주자로 봐 주는 것 같아서 기뻤다.

이분들이 정말 관심 있어 하는 건 먼 후배라 할 수 있는 나와 에르네스트의 음악적 성숙도와 실제 실력이었다.

“레퍼토리는 어디까지 치고 있어? 요즘 애들은 현대음악도 좀 하나?”

아무래도 궁금한 게 정말 많으신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난 연습실 한편에 있는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긴말 할 것 없이 이분들을 앞에 두고 한 곡 연주해서 평가받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 사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피아노 앞에 앉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내가 나가서 피아노 앞에 앉으면 모두 조용해질 것이라 생각하니 약간 주저되었다.

아직 회의가 제대로 시작된 것도 아니니까, 실력을 검증받을 기회는 조금 이후에 있을 것이다. 지금은 참았다가 그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일단은 질문에 충실하게 대답하고 있는데,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갈색 머리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일찍 오신 분들이 많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난 한 번에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세르히 왔군.”

“이번 음반 잘나가던데? 축하해.”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칼루진은 싱긋 웃으며 인사와 축하에 응했다.

“모두 고마워.”

세르히는 190cm가 넘는 큰 키에 다부진 체격으로 강철같이 단단한 타건력을 보여 주는 피아니스트였다.

큰 콩쿠르 수상 경력도 있는데 묘하게 활동이 적어서 그동안 잘 모르고 있다가, 약 1년 전 텔레비전에서 처음 보고 나선 음반을 구매해 듣게 되었다. 그 후로 난 세르히의 음반을 꽤 자주 듣는 편이었다.

해석도 스타일도 참 마음에 들어서 언젠가 한 번 연주회를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다른 분들도 내게 있어선 텔레비전 속에 나올 연예인 같은 분들이었지만, 세르히를 보니 더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음반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사인이라도 받게. 하지만 다른 분들의 것은 받지 않으면서 세르히에게만 사인해 달라고 하는 것도 상당히 실례였다. 아예 미리 준비해서 모두에게 사인해 달라고 했어야 했다.

에르네스트가 가지고 있던 목록을 조금만 일찍 봤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한참이나 늦은 후회를 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는데, 세르히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쪽으로 왔다. 난 어떻게 인사해야 첫인상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괜히 바보처럼 굴지나 않기로 했다.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세르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맞죠?”

약간 당황했다. 내가 세르히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거꾸로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난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내 이름도 알아요?”

“예. 신보로 내신 음반도 가지고 있어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하하하, 그래요? 고마워요. 타티아나.”

그가 시원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보다 족히 한 마디는 더 클 것 같은 손이었지만 억세지 않다.

세르히는 손을 놓고 나와, 내 옆의 에르네스트를 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세르히를 잘 모른다고 했었으니 두 사람이 아는 사이는 아닐 것이다. 이제 인사하려나?

하지만 세르히는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물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

이야기?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난 이 자리에 초대받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고, 심지어 에르네스트 외엔 누가 오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뭔가 그를 실망시키게 될 것 같단 기분이 들었지만, 정말 모르는 걸 어떻게 할 순 없었다.

“어떤 이야기 말씀이신가요?”

“음…….”

세르히는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턱을 슥 만지더니 이윽고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데요?

아까부터 세르히의 태도가 약간 묘하긴 했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지금 내가 알 거라 생각하는 어투로 물어보는 것도 그렇고. 뭔가 미리 알고 있는 게 많은 것 같은 느낌이다.

무슨 일이냐고 분명하게 물어볼까 싶은데, 세르히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에르네스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의 분은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처음 뵙겠습니다.”

“난 에르네스트가 연주하는 모습을 종종 봤어요. 왜 사람들이 기대가 많은지 이해가 되더군요.”

“감사합니다.”

에르네스트는 깍듯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냥 잘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담백한 태도다. 역시 세르히의 음악성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다음에 음반을 빌려주기라도 해 봐야겠다.

세르히까지 합류하자 거의 모든 인원이 다 모였다.

누군가 물었다.

“지금 몇 시지?”

“3시 56분.”

슬슬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러저런 잡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이전과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음악과 관련 없는 이야기도 하고, 심지어 경제학 강의까지 하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큰 음악회를 준비하는 음악가들의 모습만 존재했다.

15명 남짓. 한 나라의 연말 음악회를 장식하기엔 조금 적은 수가 아닌가 싶지만 사실 여기에 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합쳐질 예정이다.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로 솔로 혹은 실내악으로 음악회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모여 있다.

그 말인즉슨, 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크게 밀리지 않는 음악을 할 수 있는 러시아 최고의 음악가들인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이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음악가들인지 새삼 깨닫고 나자 이 자리에 내가 있어도 되는지 살짝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에르네스트와 듀엣을 하기로 약속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나도 서서히 음악가로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준비하고, 기다렸다.

“안 온 사람 있나?”

그 질문에 로만이 나서서 주위를 슥 훑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인원을 모두 파악한 것 같다.

“두 명. 한 명은 피아니스트고…… 한 명은 콘서트 디렉터군.”

“아니, 가장 중요한 콘서트 디렉터가 아직도 안 오면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전화해 볼게.”

이 음악가 집단에 대표라 할 만한 사람은 없었지만 은연중에 로만이 대표처럼 하는 모양이다. 그는 스마트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했다.

잠시 콘서트 디렉터로 추정되는 사람과 전화를 한 그는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차에 문제가 생겨서 조금 늦는다고 하네.”

로만의 입에서 늦는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불만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 지금 상황은 약간 달갑잖다.

콘서트 디렉터는 이 음악회의 준비와 진행을 모두 감독하고 지휘하는 책임자였다. 그 밑으로 수많은 엔지니어와 매니저 등 연주회 관계자들을 두고 있지만, 연주회 내용이나 프로그램 등을 상의할 땐 반드시 직접 참석하는 것이 옳았다. 실제로 프로그램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콘서트 디렉터일 것이고.

그런데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면 회의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불만이 나올 만 했다.

“와, 정말 우연찮네? 안 그래?”

“일단 프로그램 가이드라인을 보내 줄 테니 그거 보면서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있으라는군. 잠시 기다려 보면 되겠지.”

“일 참 편하게 하네. 내가 진짜 처음 연락받았을 때부터…….”

조금 더 날카롭게 불평을 하려던 한 음악가가 순간 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만 잘 하면 되겠지 뭐.”

난 약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굳이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는데.

살짝 흉흉해진 분위기에서 음악가들은 다들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한 마디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는데,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율리아가 넌지시 말했다.

“바쁜 사람들 불러 놓고 뭐 하는진 모르겠는데…… 어차피 늦을 사람 두고 스트레스 받지 말죠? 가이드라인은 그래도 정해 놨다고 하잖아요? 크게 문제는 없을걸요. 다들 프로인데.”

율리아의 말대로 프로그램에 대한 전체적인 큰 그림이 이미 나와 있다면 그걸 완성시키는 건 이 사람들에게 별로 큰일도 아니다.

이 음악가들의 레퍼토리를 모두 합치면 대체 몇 개나 되는 프로그램을 완성시킬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다들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는지 이 이상 화내는 사람은 없었다.

“한 명 더 안 왔다며?”

“몰라. 그냥 정확하게 4시까지만 기다려보고 우리끼리라도 진행하지? 그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럽시다.”

늦은 사람에겐 발언권도 없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렇게 모두들 4시 정각이 되길 기다리며 시계만 노려보았다. 3시 59분. 초침이 한 바퀴만 돌면 된다. 슬슬 카운트다운을 세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누군가 복도를 뛰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정확한 시간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4시가 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내가 마지막이에요?”

문간에 서 있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숨을 헥헥거리며 연습실 안을 좌우로 둘러보았다. 애쉬그레이 색의 머리칼이 확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내 또래로 보이는데 콘서트 디렉터는 아닐 것 같고, 아무래도 그녀가 마지막 피아니스트인 것 같다. 연주자들이나마 제때 다 모여서 다행이다.

로만이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마지막이긴 한데 늦진 않았군요.”

“와, 다행이다…….”

그녀는 문고리를 붙잡고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저대로 넘어지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되었지만, 곧 그녀는 똑바로 척 서더니 상쾌하게 인사했다.

“여튼, 여러분 안녕하세요. 모스크바 음악원 영재원…… 내 입으로 영재라니까 좀 그렇네. 어쨌든, 피아니스트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입니다. 잘 부탁해요.”

그녀의 인사에 모두가 저도 모르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마지막으로 온 것이 마치 주인공처럼 된 것 같다.

난 그녀의 소개를 들으면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어려 보인다 싶었는데 모스크바 음악원의 영재 클래스 소속이라면 아직 열여덟 살 미만이었다.

모두가 바라보는 상황에서 위축될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도 당당하게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하는 모습이 멋졌다. 그녀 역시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약간 기대된다.

“반가워요. 예카테리나.”

“많이 뛰었나 봐요? 숨 좀 골라요.”

콘서트 디렉터가 늦는다고 하여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사람들도, 뛰어서까지 제시간에 온 예카테리나가 기특한지 저마다 한마디씩 건넸다.

예카테리나는 붙임성 좋게 모두를 대하면서 한 걸음씩 걸어왔다. 그 방향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

조금 전 세르히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예카테리나는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의 이름은 워낙에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말은 조금 이상했다.

“내가 예카테리나예요.”

“……그런데요?”

“이야기 못 들었어요?”

“뭐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지 에르네스트는 살짝 짜증스레 답했다. 잠깐만, 아까 내가 겪었던 상황이랑 비슷한데?

혼란과 당혹감이 섞여 있는 가운데, 예카테리나는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당신이랑 나랑 피아노 듀엣 파트너예요. 이상하네? 왜 모르는 것 같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데요?”

에르네스트는 진짜로 벌컥 짜증을 냈다.

그리고 그제야 예카테리나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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