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72화 (372/1,277)

##  372화

예카테리나의 연녹색 눈동자가 날 바라보았다.

영재원 소속이니 나이는 나랑 비슷할 텐데 키는 그녀가 더 컸다.

난 지금 뭔가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음을 눈치챘다. 그런데 짜증을 느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제어가 잘 안 된다.

새어 나간 감정이 그녀에게 닿은 것 같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거기에 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야기가 꼬인 것 같은데?”

지금 나도, 에르네스트도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것에 대해 이해가 안 간다는 투였다. 대충 상황 파악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 처리가 안 될 수 있는지 그 자체에 어이없어 하는 것 같다.

에르네스트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꼬인 것 없고요. 미안하지만 전 당신이랑 듀엣 할 생각 없어요. 그리고…… 파트너는 이미 구했으니까요.”

“음, 사적인 거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둘이 연인 사이에요?”

“……!”

난데없이 진짜 사적인 부분을 물어오는 바람에 에르네스트도 나도 말문이 막혔다.

예카테리나는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호기심이 아니라. 만약 연인 관계라서 같이 무대에 서고 싶다는 거면 이해를 못할 일도 아니라서요. 왜, 원래 19세기에도 그런 거 유행이었잖아요?”

약간 당혹스러웠다. 무대에 연주자를 세우는 기준에 있어서 연인 관계 같은 기준은 상당히 뒤쪽으로 보내야 하는 기준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았다. 에르네스트와 함께 무대에 서고 싶은 것은 맞다. 하지만 그건 그와 무대에서 함께 연주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먼저 대답한 것은 에르네스트였다.

“그건 아닌데요.”

“그래요? 그럼 그냥 선약이 있었던 거죠?”

같은 음악회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그렇다면 듀엣을 하자고 했던 건 약속이었다. 오늘 갑자기 에르네스트의 듀엣 파트너라고 주장하는 예카테리나보다 빠른 약속.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연인 관계가 아니라면 정해진 대로 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어쩌죠, 우리 둘이 듀엣 하는 게 더 빨리 정해졌을 텐데. 이쪽이 선약일걸요?”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했다.

우리가 음악회에 참가한다고 승낙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제안이 들어온 시점에 이 음악회의 인선과 각본 등이 정해져 있던 것이다.

난 콘서트 플래너 같은 직책의 사람들이 어떻게 음악회를 기획하고 진행하는지 대충이나마 알기 때문에 이런 일도 흔히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이해하기 싫은 듯했다.

“어이가 없네. 누가 그래요?”

“음, 글쎄요. 위원회분들이겠죠? 알리셰르라던가. 이런 결정에 참여하실 분들이니까.”

“모르는 사람들이네요. 그럼 내가 알 바 아닌데.”

똑똑한 그가 이해 못 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막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예카테리나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바보인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 같았다.

“음…… 에르네스트? 지금 짜증 나 있다는 건 알겠는데요. 저한테 짜증 내지 마요.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

“애초에 이 인선에 착수했을 때부터 정했었다고 하니까, 대본대로 하자는거죠. 제 생각엔 당신과 제가 듀엣을 하는 걸 바라는 사람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다시 말하는데, 제가 바란 건 아니고요.”

정부에서 주최하는 음악회다.

이미 많은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그저 정해진 대로 에르네스트와 듀엣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건 연주자로서 훌륭한 태도다.

에르네스트는 예카테리나를 보더니 조용히 사과했다.

“사과할게요.”

“어…… 이해는 해요. 보니까 여기 이분이랑 같은 중앙음악학교니까 저번 주부터 같이 연습도 좀 하셨을 것 같고…… 연습한 게 아깝겠죠.”

“타티아나예요.”

“아, 이름 알려 줘서 고마워요. 타티아나.”

난 예카테리나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고,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알고 있을 또 한 명의 사람을 찾았다.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한 가지 여쭈어볼 게 있어요.”

“뭔지 알겠네요.”

내가 시선을 돌리자마자 세르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겁니다. 원래 나는 타티아나와 피아노 듀엣을 할 생각이었어요. 위원회와 감독들이 그렇게 그림을 미리 그려 놨다더군요.”

보다 확실해졌다. 나와 세르히, 에르네스트와 예카테리나. 피아니스트 네 명은 그렇게 각각 듀엣을 하는 것으로 인선이 정해졌던 것이다.

세르히가 이어 말했다.

“예전에 타티아나의 연주를 본 적이 있어서 흥미도 있었고, 그래서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오늘 보자마자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이미 친구와 약속도 한 것 같고.”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난 연주자들끼리 한 약속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요. 무턱대고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해 봐야 거절당하기밖에 더하겠어요?”

난 세르히가 지금 날 굉장히 배려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반대로 예카테리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갑자기 살짝 열받네요? 난 잘못한 것 없는 거 같은데.”

“이쪽도 잘못 없어요. 미리 말을 하던가요.”

“오늘 보고 이야기하려고 했었거든요?”

“그쪽한테 하는 말은 아닌데요.”

에르네스트의 말에 예카테리나가 못 참겠다는 듯 따지고 들려다가, 이래 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한 번 설득조로 말했다.

“에르네스트. 그냥 나랑 할 생각 없어요?”

“싫다니까요.”

“왜요?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하면 전체적인 음악회 완성도는 훨씬 나아질걸요?”

“?”

에르네스트는 의아함을 표했지만 예카테리나의 어조엔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당연한 말인데. 중앙음악학교의 두 분이 무대에서 한 곡을 전부 쓰는 것보단 나나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같은 사람들이 한 명씩 맡아서 듀엣을 하면 더 나을 것 아니에요?”

그녀는 최연소자 두 사람을 한데 붙여 무대에 올리는 건 위험이 크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자존심 강한 에르네스트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에르네스트가 대꾸했다.

“뭘 맡아요? 내가 지금 여기 누구한테 맡겨져서 끌려다니려고 온 줄 알아요? 어이가 없네.”

“이 인선과 프로그램 준비한 디렉터들의 생각은…….”

“그딴 거 관심도 없고, 틀렸다니까요.”

“틀렸다고요?”

“완전히 틀렸죠.”

에르네스트는 완전히라는 단어를 완고하게 발음했다. 실제로 콘서트 플래너나 콘서트 디렉터가 직접 이 자리에 오더라도 에르네스트는 똑같이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조금 실망이라는 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봐요, 지금 이 정도 되는 규모의 음악회가 학교 장난처럼 보여요?”

“…….”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데요?”

“아 나…….”

고집이라는 단어에 에르네스트가 다시 반응했다.

난 지금 그가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왜 예카테리나와 듀엣을 하면 어른스럽고 진지한 선택이고, 나와 듀엣을 하면 애들이 하는 장난처럼 비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따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난 에르네스트가 문장을 내기 전에, 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

“……왜.”

“화내지 마세요.”

“지금? 여기서?”

“그럴 일이 아니에요.”

“…….”

내가 다시 한 번 말리자 그가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그랬듯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눈동자. 하지만 지금은 그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영민한 사람이다. 이 상황을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내가 위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자고 할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예카테리나와, 나는 세르히와 듀엣을 하게 된다.

그가 오해할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곳에 올 때부터 세르히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하는 티를 많이 내고 있었다. 음반 추천도 했었고. 그런데 실제로 만나는 것을 넘어서 듀엣 기회까지 눈앞에 다가왔으니, 이대로 내가 승낙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금 슬펐다. 내가 이렇게까지 신뢰가 없었나……?

“아직 절 잘 모르시네요? 에르네스트.”

“뭐?”

에르네스트가 되물었고, 난 희미하게 웃었다.

세르히와 듀엣. 물론 하고 싶다. 난 그의 팬이었고, 그처럼 대단한 피아니스트와 이만큼 큰 무대에서 듀엣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난 그보다 에르네스트와 더 듀엣을 하고 싶었다.

앞서 말했듯 이만큼 큰 무대에서의 듀엣이라면, 아직 잘 모르는 세르히보다는 서로 음악적 문법에 익숙하고 믿을 수 있는 에르네스트가 좋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번엔 약속을 지켜야 하기도 했고.

“예카테리나.”

“타티아나는 이해가 밝은 분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이번만 친구 저한테 양보해요. 음악회 잘 하고 싶잖아요?”

예카테리나는 철저하게 연주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친구와 듀엣을 할 기회 정도는 다음으로 미루고 보다 나은 선배 연주자와 멋지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선약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

예카테리나는 또 그 이야기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번엔 슬쩍 짜증을 내비쳤다.

“그게 언젠데요? 그래 봐야 저번 주 아니에요? 인선을 마친 건 그보다 한참 전부터……”

“저번 주가 아니에요. 반년도 넘었어요.”

난 그녀의 착각을 고쳐 주었다.

에르네스트와 처음 듀엣을 했었던 건 지난 3월. 그리고 그다음 제안받은 건 자선 연주회 프로그램을 정할 때였으니 4월이었다. 정말 반년도 넘었다.

물론 그 약속을 꼭 지금 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 결정적인 논리가 되어 주진 못한다. 하지만 일단 예카테리나는 약간 말문이 막혔는지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지금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전 사적인 이유만으로 많은 분들께 폐를 끼칠 생각이 없어요. 이 음악회의 무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이해하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제 말대로 하는게 어때요?”

난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만들어진 각본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엉망진창이 되란 법은 없지 않나요? 위원회 분들도 만족하실 만큼 해낸다면 괜찮으리라 생각해요.”

애초에 이 프로그램 미팅 자리가 있는 이유가 그런 이유였다.

누가 인선을 정했는진 잘 모르겠지만 저번에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님들이 만장일치로 에르네스트를 뽑았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일단 음악원 교수님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막강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교수님들은 기본적으로 클래식 애호가이시다. 콩쿠르 심사로 심사위원석에 앉으시는 일도 많다. 난 우리가 잘 해내기만 한다면, 교수님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내 말에 예카테리나는 그리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래요……?”

그녀는 살짝 늘어지는 투로 대답하며 눈을 내리깔더니, 곧 매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우리 연말까지 시간 별로 없는 것 알죠?”

“예.”

“하다가 중간에 잘 안되어도 바꿀 시간도 없단 뜻이에요. 게다가 생방송이라고요. 다른 연말 방송들처럼 녹화 방송이라면 문제 생겼을 때 편집이라도 하지, 우리는 그럴 수도 없어요. 알고 있어요?”

“잘 알아요.”

내가 짧게 대답하자 예카테리나는 더더욱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가를 일그러뜨리더니,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건 무대에요. 타티아나는 무대 경험이 몇 번이나 있나요?”

“……실내악 한 번 협주곡 한 번이에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네요.”

2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난 솔리스트에서 협연까지 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 위해 속도를 내어 달려왔고, 또 그에 따른 성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열다섯 살에 저런 커리어를 지닌 연주자들은 정말 많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내 커리어는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날 바라보다가, 생각을 정리했는지 조금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튼 연주회 횟수로만 보면 제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공적인 무대의 조건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하는 건 오만이고, 여기 훨씬 대단하신 분들이 많으시니까……”

예카테리나는 조용히 우리 쪽에만 집중하고 있는 다른 음악가들을 쭉 둘러보고는, 마지막으로 그 시선을 내게 향했다.

그녀가 경쾌하게 말했다.

“심플하게 하죠. 저랑 피아노 쳐서, 이긴 사람 말대로 하는 걸로 해요.”

“……”

문제가 조금 있었고, 그것도 다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에르네스트에게 이번엔 얌전히 파트너 바꾸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말하는 예카테리나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녀가 싫어지려 하고 있었는데, 실력으로 정하자는 단순명료한 해결책을 내놓는 걸 보고는 한순간에 생각이 바뀌었다.

난 이러한 상황에서, 피아노를 모든 기준의 윗줄에 놓는 사람을 싫어할 수 없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승부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난 같은 연주자로서 예카테리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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