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73화 (373/1,277)

##  373화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할 거죠?”

“…….”

타티아나는 말없이 예카테리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막 문을 열고 들어와서 타티아나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던 타티아나는 이 쟁쟁한 음악가들 중에서도 꽤 두드러졌다.

척 봐도 인기 많게 생겼다 싶긴 했다. 물론 피아노도 잘 치니까 이 자리에 있겠지만, 저렇게 관심을 많이 받는 건 아무래도 저 용모의 덕을 많이 본 것도 있겠지.

별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중앙음악학교의 최연소자 두 명이 이 음악회의 귀염둥이가 되리란 건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귀염둥이 둘이서 듀엣을 하겠다며 미리 정해진 기획을 무시하고 멋대로 굴려고 하는 건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다시 물었다.

“어떡할 거예요?”

기획에 대한 전달을 못 받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듀엣을 하자고 정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합리하다고 따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젠 현실감각을 되찾아 주어야 할 때다.

여기 모인 음악가들은 작은 친목 음악회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에서 기획하고, 적어도 수천만 명이 볼 거대한 음악회엔 수많은 전문가들의 의견과 주장이 총집합 되어 있다.

큰 테마에 맞추어 나온 프로그램, 시나리오, 그리고 인선에 따라 캐스팅된 연주자들은 대체로 거기에 따라 주는 편이 좋다.

배우가 대사를 애드리브로 하듯 연주자가 자신의 연주에서 즉흥적인 표현을 할 순 있지만, 각본을 입맛대로 뜯어고치려 하는 것은 문제인 것처럼.

‘자기 고집은 혼자서 하는 리사이틀에서 부리는 것으로 충분해.’

물론 두 사람이 왜 주장을 굽히지 않는지 짚이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인 사이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 분위기가 서먹하거나 건조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걸 용인해 주려면 최소한의 실력이 되는지 봐야 했다.

에르네스트의 실력은 꽤 유명하니 괜찮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라는 이름을 오늘 처음 듣는다.

이 세계에서 이 정도 되는 곳까지 초대받으려면 이름 정도는 들어 봤어야 정상인데,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

궁금하기도 하고, 살짝은 골려 주고 싶기도 했다. 때문에 예카테리나는 일부러라도 타티아나를 피아노 앞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약간 도발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하하…….”

그런데 가만히 있던 타티아나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무표정할 땐 조금 서늘하게 보이던 푸른 눈이 이채를 띄기 시작했다. 왜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뭔가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카테리나가 생각하기에 지금 상황은 타티아나가 좋아할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약간 이상한 애라는 생각을 할 즈음, 타티아나는 다시 목을 바로 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피아노로 결정짓자는 말은 나쁘지 않게 들리네요. 음……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요.”

“할 건가요?”

“후후, 하지만 다른 분들이 회의가 늦어지는 걸 허락해 주셔야…….”

살짝 고개를 돌린 타티아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허락을 구할 것도 없음이 명명백백했다.

주변 사람들은 안 그래도 콘서트 디렉터도 늦고 심심하던 차에 이게 무슨 볼거리인가 싶어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40대도 훌쩍 넘는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는 것이 거의 무슨 연애 드라마 보는 듯한 눈빛이다.

수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음악가들의 유치한 면면을 보면서 예카테리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이 재롱을 부리는 기분이 드는 데다, 지금 이 상황에선 아무리 봐도 자신이 악역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발 물러서서 콘서트 플래너나 디렉터가 와서 권위로 해결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 정해 준 위치이긴 하지만 이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실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타티아나.”

“예.”

그때, 지켜보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입을 열었다.

예카테리나는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쩜 저럴까 싶을 정도로 잘생겼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것보다 훨씬 기대 이상이었다.

얼굴을 보기 전에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솔직히 욕심이 났다.

이미 또래 피아니스트들 중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앞으로도 더더욱 유명세를 떨칠 일 밖에 없을 그와 큰 음악회에서 듀엣을 하는 건 욕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은 이 상황에 굉장히 짜증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왜 이런 일에 말려들어? 그리고 만약 피아노로 결정지어야 할 일이라면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에르네스트가요?”

“그래. 처음 제안했던 것도 나고, 처음 다투었던 것도 나잖아.”

예카테리나는 조금 씁쓸했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같이 듀엣을 하겠거니 기대 중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예카테리나를 그저 방해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그냥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버리고 싶었지만, 예카테리나는 꾹 참으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일단 에르네스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말이 많이 오간 건 그녀와 에르네스트였으니까. 그리고 저 두 사람 중에 예카테리나와 피아노로 맞붙어서 승산이 있어 보이는 건 에르네스트 쪽이고.

하지만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하고 싶어요.”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긴 한데.”

“그러니 에르네스트는 저쪽으로 가 주세요.”

“저쪽이 뭔데?”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예카테리나도 속으로 저게 무슨 소린가 싶어 투덜거리는 와중이었다.

타티아나의 손이 슥 올라오더니, 예카테리나를 가리켰다.

“두 분이 듀엣을 해 주세요.”

“어?”

“뭐? 또?”

예카테리나가 황당함에 되물었고, 에르네스트는 영문 모를 말을 하며 약간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어이없다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타티아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예카테리나. 우리 간단하게 하기로 한 것 맞나요?”

“……그렇죠.”

에카테리나는 작게 대답하면서 직감했다. 이상하다. 뭔가 분위기가 넘어갔다.

타티아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바로 무대 리허설을 해 보도록 해요.”

“예?”

“예카테리나와 에르네스트와 연주를 보여 주시고, 전 세르히 세르게예비치와 리허설을 하도록 할게요. 괜찮겠죠?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세르히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예카테리나가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조금 실망이었다.

리허설은 언젠가 해야 할 테니 상관없다. 어느 정도 실력에 오른 연주자들이 즉흥적으로 피아노 듀엣을 맞춰서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하지만 지금은 에르네스트도 타티아나도 분명 비협조적으로 나올 것이 분명했다. 지금 타티아나가 하는 말은, 각자 떨어져 원하지 않는 상대와 억지로 연주하는 것이 얼마나 엉망진창일지 한 번 보여 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약간 불쾌한 협박에 가깝다. 예카테리나는 실망과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앞으로 2주도 안 남은 기간 동안 어떤 무대를 만들 수 있을지 어렴풋하게 볼 수 있겠죠. 확인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요.”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알아보려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에르네스트도 당신도 일부러 연주를 망치면 그만인데.”

“제가 그럴 거라 생각하시나요?”

“…….”

물론 그렇지 않겠냐고, 타티아나가 무안할 정도로 쏘아붙이려던 예카테리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타티아나가 비겁한 생각으로 유치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타티아나에겐 당연하다는 듯 음악가로서의 긍지와 신념이 깃들어 있다. 일부러 연주를 망친다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상상도 못할 불명예임이 분명했다.

조금 전까지 예카테리나가 혼자 생각하고 있던 일들은 타티아나에게 있어 상당한 실례일지도 모른다.

얕봤던 것 같다. 예카테리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말을 잘못했네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내기 자체는 예카테리나가 말씀하셨던 대로 할 테니까요.”

“……?”

“연주는 듀엣으로 하되, 심플하게 예카테리나가 저보다 좋은 점수를 받기만 하시면 되어요. 어떠신가요? 제가 연주를 엉터리로 할 순 없겠죠.”

“……!”

예카테리나는 그제야 타티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조금 복잡해지긴 했지만, 피아노로 해결을 보자는 기본적인 합의엔 차이가 없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세르히라는 프로 피아니스트와 합을 맞추면서도 예카테리나를 이길 작정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건 일대일 대결보다 불리한 조건이었다. 듀엣 상대와 격차가 두드러져 버리면 제대로 된 점수를 받기가 굉장히 힘든 까닭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흥 리허설로 실력을 보고, 예카테리나와 타티아나에게 매겨진 각각의 점수로 결론을 내자고 하고 있었다.

점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을 보니 여기 있는 수십 명의 음악가들을 모두 제대로 심사위원으로 삼을 생각인 거다.

“……으.”

조금 이해가 안 간다.

음악회 진행위원회에서 미리 정해 놓은 듀엣 프로그램을 리허설에서부터 망치는 방식으로 거부하려는 건 아닌 것 같다.

최선을 다하려는 것 같은데, 방식이 이상했다.

왜 굳이 이 구도로 먼저 리허설을 하자는 거야?

그렇게 해서 타티아나가 유리할 것이 없었다. 이 리허설 내용이 꽤 괜찮게 나오기라도 한다면 타티아나는 설령 예카테리나와 한 대결에선 이기더라도 이대로 무대에 올리자는 다른 사람들의 압력에 시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가 단순하게 이런 제안을 하진 않았으리란 확신을 느꼈다.

뭐야 이거.

정말 이상했다. 처음엔 분명 예카테리나가 상황을 휘어잡고 상황 파악에 늦은 두 사람에게 살짝 실력을 보여 주는 분위기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뭔가 주도권도 빼앗긴 것 같고 이야기는 요상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눈앞에 있는 이 애가 생각보다 상당히 노련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자신 있으신가 봐요……?”

타티아나는 속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연주자로서 예카테리나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죠. 예카테리나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가 납득할 만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뿐이에요.”

진지한 존중이란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의지를 말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예카테리나는 왜 타티아나가 모든 조건을 받아들여 총합한 제안을 내놓았는지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옆을 살짝 돌아보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을 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엉망으로 할 거라 걱정은 안 하셔도 좋아요. 그럴 분도 아니거니와…… 만약 연주에 위화감이 있다는 걸 제가 알아차린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전 그와 연주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섬뜩할 정도로 엄격한 말처럼 들리지만, 깊은 신뢰가 바탕에 있어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저 두 사람은 미리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음악회 진행위원회의 결정에 맞설 정도로 서로를 중요하게 여긴다.

동시에, 그 사이에 어떠한 비겁함도 끼워 넣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필요한 수순이라면 서로 대립하듯 마주 본 상태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의 실력을 내보일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었다.

타티아나는 묘하게 자신만만한 얼굴로, 예카테리나에게 말했다.

“양보해 달라 하셨죠.”

“…….”

“잠깐 빌려 드릴게요, 제 파트너.”

부럽다.

순간적으로 예카테리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가, 얼른 지워 버렸다.

이 신뢰는 위태롭고 약한 이름 위에 쌓기엔 너무나 견고했다.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예카테리나가 약간 얼이 나간 사이, 타티아나가 혼자서 흠칫하더니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저기, 미안해요 에르네스트. 표현을 잘못 했어요. 에르네스트는 제 소유물이 아닌데.”

“어, 아니…….”

에르네스트는 정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일단 괜찮아.”

“일단요?”

“일단.”

에르네스트는 예카테리나와 듀엣을 할 일은 없을 것이라 딱 잘라 말했었다. 그러니 지금 타티아나의 제안에 따라 듀엣 리허설을 하게 될 상황에서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타티아나는 미안하다는 듯 옅게 웃더니 약간 달래는 투로 말했다.

“실제 무대에 이렇게 서 달라는 말이 아니라, 리허설이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 마세요.”

“어렵게 생각 안 하게 생겼어?”

“이런 일이 없었어도 한 번은 피아노 앞에 앉아야 했어요. 그렇지 않나요?”

“……따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지금이 기회겠네요?”

말들이 오가고, 에르네스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길게 무어라 하거나 타티아나의 제안에 반박하여 다른 의견을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이렇게 나온다면 봐주지 않겠다는 얼굴로 물을 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곡으로 할 건데.”

그 순간, 예카테리나는 저 두 사람이 비슷한 부류라는 것을 확신했다. 어쩌면 잘못 건드렸을지도 모르겠단 긴장감이 등 뒤에 스멀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