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화
여기 있는 누구 하나 천재 아닌 사람 없고, 청춘을 음악으로 불태우지 않은 사람 없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현 상황은 아주 흥미롭게 보이고 있었다.
“콘서트 디렉터는 1시간쯤 늦을 것 같다고 하네.”
“늦으라고 해. 상관없으니까.”
1시간이나 늦는다는 말에 이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은 이 네 명이 어떻게 각자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따내는가에 쏠려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예요? 바로 피아노 듀엣으로 각각 연주?”
“맞는 곡을 찾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심사 봐 줄 사람 필요해?”
모두 한마디씩 건넸다. 예카테리나는 이젠 정말 질 수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예카테리나의 조건을 보다 더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정해진 듀엣으로 연주를 하는 것과 개인의 대결로 결과를 내는 것. 이렇게 했는데도 만에 하나 타티아나에게 진다면 할 말이 없다.
상황을 정리하듯 바이올리니스트 바실리가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 하든, 어떻게 결과를 내든 좋아. 너희들이 결론을 짓고 나면 그건 우리가 무조건 지지해 줄게.”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는 옆을 보았다.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 세르히가 예카테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분위기가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 바라보는 눈빛의 온도가 확연히 내려가 있다.
예카테리나는 이런 느낌을 어디서 받았는지 떠올렸다. 콩쿠르에 나갔을 때, 연주자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 주변의 분위기가 바로 이러했다.
양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구부정하게 있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곡부터 정하죠. 예카테리나.”
“어…… 예?”
“듀엣 뭐 할 줄 알아요? 협주곡 편곡은 어차피 맞는 게 없을 테니까 오피셜한 걸로요.”
예카테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어물거렸다.
갑자기 에르네스트 쪽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물어볼 줄은 미처 몰랐다. 하기 싫다는 투로 말하거나 어쩌면 아예 비협조적으로 나올지도 모른다고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걱정했던 게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타티아나가 이 대결이 정정당당할 것이라 말했던 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예카테리나는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레퍼토리로 삼고 있는 듀엣 곡은 꽤 많다. 하지만 거기에서 협주곡이나 실내악 편곡을 뺀다면 개수가 확 줄어든다. 그리고 또 거기에서 너무 쉬운 연탄곡 등을 뺀다면…….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건…… 브람스의 왈츠 투 피아노랑 생상의 죽음의 무도 퍼스트 피아노, 그리고 모차르트의 투 피아노 소나타 정도겠네요.”
“모차르트? 조성이 어떻게 되죠?”
“라장조요.”
“아, 그건 안 쳐 봤어요.”
대충 알겠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허리를 쭉 펴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저랑 타티아나는 쇼스타코비치 조곡과 라흐마니노프 조곡, 카푸스틴 만테카 페러프레이즈, 생상 죽음의 무도랑 폴로네이즈 이 정도겠네요. 죽음의 무도가 겹치는데요.”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맞지 않냐는 듯 동의를 구하는 얼굴이다. 타티아나는 별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없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자끼리 서로 레퍼토리를 아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상세하게 아는 건 두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 나타내는 방증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거기에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레퍼토리가 심상찮다는 것에 더 눈길이 갔다.
레퍼토리를 보면 그 연주자의 실력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레퍼토리엔 그 어느 하나 쉬운 곡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물론이고, 타티아나도 이곳에 추천받은 만큼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했다.
예카테리나가 살짝 더 경계를 세우는 사이, 에르네스트는 빨리 이 대결을 진행할 생각밖에 없다는 듯 세르히에게 물었다.
“세르히는요.”
“나도 죽음의 무도는 쳐 본 적 있죠.”
“퍼스트? 세컨드?”
“세컨드네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잘됐네요. 죽음의 무도로 하죠.”
생상의 죽음의 무도는 본래 교향곡으로 작곡된 곡이다. 오케스트라를 동원해야 연주할 수 있는 교향곡을 피아노 듀엣으로 편곡해 놓은 만큼 테크닉적으로 까다롭고 어려웠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곳에 앉아 있는 피아니스트라면 당연히 칠 수 있어야 한다는 투였다. 그는 자신이 어차피 퍼스트나 세컨드 둘 다 칠 수 있으니 타티아나와 예카테리나가 주선율인 퍼스트를 맡으면 되겠다고 딱 정해 버리고는 곧바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콘서트 디렉터가 올 때까지 시간은 1시간 정도 있기 때문에 바로 연주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모두 상의한 끝에, 15분 정도 듀엣 할 사람들끼리 악보를 다시 보고 이야기를 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이제 네 사람은 아예 두 명씩 갈라졌다.
에르네스트는 저편에 앉은 타티아나와 세르히를 힐끗 보고는, 이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예카테리나를 돌아보았다.
“바로 인 템포로 갈 거예요. 괜찮죠?”
열의에 불타는 눈동자에 예카테리나는 숨을 멈췄다. 왜 이렇게 열심히지? 저기 있는 저 애와 듀엣하고 싶지 않은 건가?
하고 싶은 질문이 정말 많지만, 예카테리나는 일단 연주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래요.”
“인 템포로 문제없으면, 박자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다 맞출 테니까. 정확하게만 치면 돼요. 정확하게만.”
“그거야 쳐 보면 알겠죠?”
“그리고 클라이맥스 이후 뒷부분 아드 리비툼은 생략하는 걸로 하죠. 거기까진 안 봐도 될 테니까. 제가 저쪽에도 이야기할게요.”
“어…… 에르네스트?”
“왜요?”
“뭣 좀 물어봐도 돼요?”
어떻게 듀엣을 할 건지에 대해 상의를 하다가 결국 예카테리나는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그…… 왜 이렇게 적극적이에요? 타티아나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인가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듀엣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이라고 해서?”
“글쎄요. 그런 이야기 안 했어도 난 봐줄 생각 없었는데.”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연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엔 관심이 전혀 없는 투였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이해가 안 갔다. 그렇게 격렬하게 음악회 진행위원회고 뭐고 그딴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모조리 틀렸다고 말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그러다가 덜컥 이겨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 그걸 바라는 거 아니었어요? 말씀이 이상하시네.”
“그게 아니라…….”
말하고 보니 어이가 없었다.
지금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와의 이 대결에서 이기고, 윗선에서 정해 놓았다는 이유 말고 보다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이 듀엣을 무대까지 올려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에르네스트의 협조가 필수적임은 당연하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정말 협조적으로 나오니까 약간 혼란스럽다.
생각을 정리 중인 예카테리나를 보던 에르네스트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깜짝 놀랄 정도로 순수한 미소였다.
“우리가 이해 안 가요?”
예카테리나는 하마터면 그렇다고 말할 뻔했다.
정말 묘한 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무대에서 듀엣을 하고 싶어 하는 연인처럼 보이다가도, 철저하게 독립된 피아니스트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체 무슨 관계야?
“약간은요.”
“그럼 뭐…… 굳이 이해할 건 없어요.”
“…….”
일부러 이러는 건가?
예카테리나는 살짝 발끈하려다가 참아 냈다. 타인의 사생활이고, 초면에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건 실례이기도 하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손가락으로 허공을 휙 그었다.
“다만 하나만 생각해요. 저와 타티아나는 이 자리에서 음악가로서 책임을 지고 실력으로 우리 위치를 지키기로 작정했어요. 그러니까 마음껏 확인해 봐요. 그게 다예요.”
“확인……?”
“확인해야 할 건 확인해야죠. 타티아나의 말이 맞아요.”
정말 다른 뜻은 없어 보였다. 실력을 보여 주고 관철시킬 테니,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란 뜻이다. 그 외의 의심 따윈 할 필요조차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답잖게 신경 쓰던 것을 모조리 치워 버리고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그녀의 듀엣 파트너는 에르네스트다. 그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주를 보이고 이 많은 음악가들에게 평가받으면 된다. 생각 끝. 여기서 더 뭔가 복잡해질 건 없었다.
그런 예카테리나를 보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예카테리나.”
“……?”
“나 당신 생각났어요. 독일 에틀링겐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 맞죠?”
막 연주 이야기나 하려던 예카테리나는 멈칫했다. 뭐야, 알고 있었어?
“보셨어요?”
“잠깐요. 그래서 당신 피아노도 약간 기억나요.”
그 말에 예카테리나는 눈을 번뜩이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소감이 어떤지 듣고 싶었다. 그리고 피아노를 기억한다면,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와 예카테리나의 피아노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느 쪽이 우세할지 대충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아무리 강렬한 눈빛을 보내도 에르네스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봐요. 아무 말도 안 할 건데.”
“왜요? 에르네스트. 말 좀 해 주지.”
“싫은데요.”
이 남자 살짝 얄밉다. 할 수 있다면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예카테리나는 포기하고 지금 할 리허설 연주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받아 온 악보를 한두 번 같이 읽어 볼 시간은 있을 것 같다.
정확히 15분 후, 네 사람은 다시 모였다.
“그 외에 다른 건 없죠?”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상황을 정리하고, 타티아나와 예카테리나 사이에 있는 대결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다.
모두의 동의를 얻고 난 후, 먼저 듀엣을 하기로 한 건 예카테리나와 에르네스트였다.
“가죠.”
두 사람은 일어나서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두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 조율 상태는 별문제 없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오른쪽 피아노에 앉았다. 이런 피아노 듀엣에서 높은 음과 주선율을 주로 맡는 퍼스트 피아노의 자리였다.
에르네스트가 마저 앉는 것까지 확인하고, 예카테리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수십 명의 심사위원이 지켜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압박감을 느끼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저 음악가들 중엔 실제로 콩쿠르 심사 같은 걸 몇 번이나 해 본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었다.
“후우…….”
숨을 가다듬고, 예카테리나는 건반을 죽 훑었다. 피아노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스케일이 빠르게 흘러가고 동시에 손가락도 풀었다.
딱 10초 남짓, 준비를 마친 예카테리나가 에르네스트와 눈을 마주쳤다.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이 음악을 품었다.
에르네스트가 손을 들어 건반 위에 내려놓았다.
“…….”
생상의 죽음의 무도 사단조.
긴 막대 끝에 달린 종을 울리며 에르네스트가 앞서 걸어 나갔다.
오른손 중지 하나만을 이용해 건반을 누르는데도, 그 소리에 벌써부터 예카테리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깊은 음색의 무게가 느껴진다.
하지만 정신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정확한 타이밍에 양손으로 아주 여리게 7도 아르페지오 화음을 흩뿌렸다.
종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휘날린다. 예카테리나는 이 느낌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수상한 발자국 소리를 내었을 때, 어둠을 향해 불빛을 확 비추듯 예카테리나의 피아노가 쨍 하고 울었다.
“……!”
본래 교향곡에선 악마의 바이올린 소리였어야 할 멜로디는 악마의 피아노 소리로 탈바꿈하여 연습실을 쩌렁쩌렁하게 뒤흔들었다.
예카테리나는 이 첫 프레이즈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앞으로도 이어질 모든 흐름의 첫 단추를 꿰는 순간이다. 세컨드 피아노인 에르네스트가 혹시라도 다른 길로 새지 않고 확실하게 따라오도록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혼신을 다해 정확하게 예카테리나가 바라는 박자로 음들을 찍어 넣고 나자, 에르네스트는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 3박자의 베이스를 연주했다.
됐어.
예카테리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연주를 이어 나갔다.
아무 문제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약속대로 인 템포에 맞춰서 예카테리나를 잘 따라 주었고, 하나도 어색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었고 그야말로 처음 맞춰 보는 첫 듀엣이었지만, 적절히 숙련된 피아니스트들은 이 정도로 수월하게 하나 된 연주를 할 수 있다.
예카테리나는 살짝 안심했다.
하지만 안심하는 그 순간, 선율이 반복되며 퍼스트와 세컨드의 역할이 잠깐 교체되는 부분이 찾아왔다.
주선율을 가져오자마자 에르네스트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윽……!”
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로 충격적인 음향이 예카테리나를 습격했다.
약속했던 것처럼, 가진 바 모든 실력을 보이는 에르네스트의 음색은 칼날처럼 예리하면서도 망치처럼 무거웠다.
눈앞이 아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