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75화 (375/1,277)

##  375화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릴 뻔했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이 박자를 살짝 놓쳤음을 깨달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한순간에 페이스를 잃어버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만큼 선율을 넘겨받은 에르네스트의 화답은 강렬하고 치명적이었다.

정신 차려야 해.

예카테리나는 순간 날아가 버릴 뻔했던 머릿속 악보를 다시 확실하게 틀어쥐었다. 다행히 이후 흐름은 그리 어렵지 않아서 예카테리나에게 한숨 돌릴 시간을 충분히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다시 연주를 안정적인 흐름에 올려놓고, 살짝 신경질적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옆자리의 에르네스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아노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예카테리나에게 어떠한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도, 이 연주에 대해 어떠한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주를 완벽하게 선보이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잘못은 첫 흐름을 붙잡았다고 방심하고 있었던 예카테리나에게 있었다.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아직도 소름이 가시지 않은 팔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실수하면 안 돼.’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 이미 러시아의 피아니스트들 중에선 에르네스트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정도로 유명 인사이긴 했지만 예카테리나는 텔레비전 등에서만 본 그가 이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도 굵직한 콩쿠르에서 몇 번 입상한 경력이 있었기에 꽤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듀엣 파트너로 마주한 에르네스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아니스트였다. 영상으로 보았던, 스피커로 들었던 사운드와 차원이 다른 압력과 부피감에 머리가 굳어 버릴 정도다. 굉장히 절도 있고 세련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납고 무섭다.

정신을 놓으면 한순간에 잡아먹힌다.

예카테리나는 실수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곡을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에르네스트의 위압감에 맞설 수 있도록 조금 더 힘을 실었다.

“…….”

하지만 그다음 선율을 넘겨주자, 에르네스트는 이번엔 득달같이 송곳니를 보이지 않고 약간 누그러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살짝 맞춰 주려는 듯한 느낌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서로 말로만 맞춰 보고는 무작정 피아노에 앉아 시작한 리허설이었으니.

이렇게 연주를 하면서 실시간으로 서로의 성향과 실력을 파악하고 음악적 균형을 맞춰 나가는 것 또한 실력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전체적인 음악의 아름다움과 완성도까지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진짜 제대로 무대를 준비하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방금 전 놀라서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에르네스트가 힘을 빼는 건 약간 놀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힘든 것 같으니까 조금 봐주겠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피아노 소리에 섞여 귓가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흥.”

예카테리나는 이를 악물고 연주에 임했다. 이렇게 무시당하면서 연주를 하는 건 끔찍했다. 어떻게 해서든 에르네스트를 다시 끌어올리고 싶었다.

그녀는 가열차게 화음을 연타했다. 제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완전히 묻어 버리겠다는 투로 피아노를 연주했더니, 에르네스트가 반응했다.

죽음에서 깨어난 망자들과 유령들이 깩깩거리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은 음색이다.

예카테리나는 멋대로 뛰노는 망자들을 한 손에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 유령들을 붙잡았다. 까불지 마.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으니까.

그녀는 그 모두를 통솔하는 악마의 피아노처럼 건반을 연주해 나갔다.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죽음의 무도라는 이 거대한 곡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에르네스트가 풀어놓은 것들을 조화롭게 만들고, 거기에 피아노의 전체적인 다이내믹도 한 단계 더 상승시켜야 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영재 클래스에 입학한 것이 열한 살. 그간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아온 예카테리나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치워 냈다.

“……!”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조금 더 힘을 써서 음량을 끌어올리자 바로 다음에 에르네스트가 그 소리와 비슷한, 하지만 한 발자국 더 앞서 나가는 경쾌한 소리를 선사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한 힘의 가늠.

예카테리나는 이것이 에르네스트의 최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 실력을 더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즉석 듀엣의 양상은 그 뒤로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예카테리나가 주도권을 잡고 무언가 해 보려 쭉 달려가면 에르네스트가 찰나의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옆을 쫓아와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다가 살짝 스치기라도 하면 휘청거리는 것은 항상 예카테리나 쪽이었다.

균형을 잡고 있기가 쉽지가 않다.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뒷목이 아프고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다. 힘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강하게 건반을 내리쳤더니 팔과 어깨가 다 아프다.

“윽.”

그나마도 예카테리나가 굉장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연주도 중반이 넘어가고 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혼자 치도록 내버려두면 알아서 했을 텐데, 옆에서 바로 비교될 사람이 연주하니 무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정말 한계에 다다른 연주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에르네스트는 여유롭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두 피아노가 동시에 화음을 연타하는 구간에서 예카테리나는 4도 화음을 자신이 가진 모든 테크닉을 쥐어짜서 연타하고, 에르네스트는 3도 화음을 편안하게 치는 것 같은데도 막상 연습실에 울리는 소리엔 그다지 차이가 없게 들렸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테크닉과 파워였다. 그와 함께 동등한 듀엣을 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다.

자신 있게 파트너를 빌려주겠다고 하던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순간 스쳐 지나갔다.

이런 의미였나? 적당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야?

예카테리나는 그와 동시에, 타티아나가 생각보다 훨씬 더 실력자일지도 모르겠단 점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신경을 다른 곳에 쏟을 틈이 없었다.

“…….”

에르네스트가 다시 손을 크게 들어 건반을 찍어 눌렀다. 쾅 하고 쏟아져 나온 음들이 예카테리나를 때렸다. 그녀는 거기에 지지 않기 위해 한계와 마주하고도 거침없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곡은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쏟아 내는 반음계 옥타브 스케일이 펼쳐지고, 예카테리나는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서 손을 크게 펼쳐 건반을 짚었다.

에르네스트는 훨씬 적은 건반을 가지고도 기이할 정도의 테크닉으로 무거운 음을 만들어 낸다. 예카테리나는 거기에 눌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주했다.

거의 무슨 정신으로 연주했는지 모를 클라이맥스가 막바지에 도달했다.

예카테리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그다음 마지막 주제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에게 마지막 주제를 건네주었을 때, 그는 연주하지 않고 팔을 내렸다.

갑자기 음악이 뚝 끊어졌다.

팽팽해져 있던 긴장 역시 탁 끊어지며 온몸의 힘을 빼앗아 갔다. 현기증이 확 돈다. 예카테리나는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해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는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아드 리비툼은 생략하기로 했었죠?”

“……!”

예카테리나는 할 수만 있다면 피아노를 들어서 에르네스트에게 집어던지고 싶어졌다.

시간 관계상 뒷부분은 생략하기로 합의하긴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몰아붙여 놓곤 끝을 안 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의가 아니다. 세상에 어떤 연주가 이렇게 끝나? 말이 돼 이게?

입가를 파르르 떨며 예카테리나가 말했다.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

“제가 한 말이니까 최소한 저는 기억하고 있어야죠.”

“…….”

정말 한마디를 안 진다. 콱 때려 주고 싶다.

예카테리나는 분노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그간 많은 듀엣을 해 오면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저 자신의 실력을 보였을 뿐이었다. 항의해 봐야 이상해지는 건 예카테리나 쪽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말로 할 수 없는 불만들을 담아서 에르네스트를 노려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시선을 무시했다.

조금 뒤늦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브라비. 훌륭했어!”

“진짜 처음 맞춰 본 것 맞아? 상당히 괜찮은데? 어떻게 이렇게 잘해?”

“아주 파워풀한 연주였어. 이런 연주는 어떤 무대에 올리더라도 반응이 괜찮기 마련이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연습 조금만 더 해 보면 진짜 무대에 올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칭찬과 평가가 이어졌다.

이 평가를 받으면서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 훨씬 괜찮게 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예카테리나가 연주를 아예 망쳐 버리거나 잘못한 점은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이 무지막지한 피아니스트를 세컨드로 데리고 간신히 항해를 마쳤다.

에르네스트가 계속 예카테리나를 한계까지 쏟아 내도록 유도하고 부추겼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정확하게 연주에 임했기 때문이다.

약간의 안도감,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피어오른다.

이래서야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맡은 바에 충실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잘해 준 것에 가까웠다. 예카테리나가 한계에 가까운 연주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에르네스트가 파트너인 덕도 많았기 때문이다.

조금 가차 없고, 악랄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철저하게 예카테리나가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게다가 지금 반응을 보면 꽤 고평가하는 분위기였다. 이러면 정말 이 죽음의 무도가 무대에 오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 최선을 다해도 타티아나가 이길 것이란 자신이 있다는 건가?

예카테리나는 팔을 주무르면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마른 체구에 키도 그리 큰 편은 아니다. 겉보기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체격으로만 보면 에르네스트와 예카테리나의 차이보다 세르히와 타티아나의 차이가 훨씬 크게 보였다.

세르히는 키가 190이 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강철 같은 타건으로 아주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티아나가 세르히를 이겨 내는 광경이 상상되지 않는다.

물론 세르히가 봐주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선 타티아나는 지금 예카테리나보다 좋은 연주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야.”

예카테리나는 중얼거리면서 방금 들었던 모든 생각들을 흩어 버렸다.

겉모습을 보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이 음악회에 추천받았고, 먼저 에르네스트와 듀엣을 기획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일단 상당히 상위권의 실력을 지녔다고 봐야 옳다.

피아노를 들어 보면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다시 음악가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가장 앞쪽에 있던 타티아나가 말했다.

“잘 들었어요.”

“그래요?”

타티아나는 겉치레를 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는 어떠냐고 묻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은 대결 중이다. 대결 중에 주고받을 말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타티아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허리를 펴고 섰다. 옆에 서 있는 세르히와 비교하면 어깨에도 안 닿을 정도로 작은데, 자세가 곧아서 그런지 위축되어 보인다거나 그런 점은 없었다.

세르히와 타티아나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도 비슷하게 하면 되겠죠? 타티아나.”

“예.”

짧은 말이 오가고, 두 사람은 나란히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세르히는 의자를 낮추고, 타티아나는 높였다. 각각 그렇게 적절하게 자세를 세팅한 뒤 서로를 바라본다.

시작하기 전 마지막 눈빛을 교환하고, 모든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했다.

웅성거리던 음악가들도 두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하려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고요 속에서 세르히가 천천히 종을 울렸다.

“…….”

죽음의 무도. 방금 전 연주되었던 곡과 똑같은 곡임에도 불구하고 첫 종소리부터 분위기가 다르다. 세르히의 종소리는 에르네스트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넓게 울렸다.

그리고 거기에 아르페지오를 올리는 타티아나의 연주 역시, 예카테리나가 했던 것과 똑같지만 느껴지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고운 베일을 종 위에 감싸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종소리와 베일이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불사르는 불벼락 소리가 연습실에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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