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화
처음 위원회로부터 타티아나와 듀엣 무대를 요청받았을 때,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칼루진은 조금 의아해했다.
신예 연주자와 듀엣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지만 이렇게 큰 음악회에서 그런 요청이 들어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세르히가 그렇게 처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느꼈던 감정은 짜증이었다.
자본과 힘으로는 러시아에서 최고라 손꼽히는 베르체노프 콘체른. 그 베르체노프 가문의 딸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준비를 할 때, 어떠한 지원들이 그녀에게 쏟아질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신 또한 그 지원의 일부가 되리란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을 느끼면서 타티아나의 연주 영상을 찾아본 세르히는 곧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심장에 와닿는 듯한 음색, 상상을 초월하는 기예.
짧은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겐 음악이 곧 인생이었음을.
겨우 열다섯 살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의 피아노는 세르히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실력도 없으면서 배경에 기대어 선택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죄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
그렇게 마음의 빚을 느끼던 세르히는 음악회에서 전적으로 타티아나를 도와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함께 온 에르네스트와 듀엣을 하고 싶어 함을 깨달았을 때 두말 않고 두 사람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파트너로 지명되었던 예카테리나가 위원회의 지시대로 하길 요구하면서 갈등으로 번졌고, 결국 이렇게 피아노로 해결을 봐야 할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세르히는 가급적 타티아나가 원하는 방향으로 도와주고 싶었지만, 사실 이런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음악가라면 무릇 음악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나도 비슷하게 하면 되겠죠? 타티아나.”
“예.”
방금 전 에르네스트와 듀엣을 하던 예카테리나가 상당히 힘겨워하는 것을 분명 느꼈을 텐데, 타티아나는 동요 없이 대답했다. 세르히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장소에서 어떤 상황이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강인함이 돋보인다. 재벌가의 영애라서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의 정신이었다.
닳고 닳은 베테랑 피아니스트들도 온갖 일로 멘탈이 무너지는 일이 허다한데, 타티아나는 어지간한 일로는 그럴 일이 없었다. 곧게 서 있는 모습만 보아도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재목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
각각 피아노 앞에 앉은 세르히와 타티아나가 준비했고, 눈을 마주했다.
세르히는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보냈다. 까다롭게 하진 않을 테니 부디 실력을 보여 달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이해했는진 모르겠지만, 타티아나 역시 미소로 답했다.
세르히는 주저 없이 곡의 첫 소절을 시작했다.
‘일부러 어렵게 할 필요는 없지만 에르네스트와 비슷하게 할 필요는 있겠지.’
에르네스트의 강렬한 죽음의 무도에 예카테리나는 휘둘리고 어려워했다.
물론 예카테리나 역시 영재 중의 영재였으므로 에르네스트의 폭력적인 음향에 따라가면서 불과 6분 남짓한 시간 만에 빠르게 합을 맞춰 나갔다.
그렇다면 비슷한 조건에서 타티아나는 어떻게 극복해 내는지 봐야 했다.
테스트를 하는 기분으로, 세르히는 건반을 타건했다. 에르네스트와 비슷하게 묵직하고 단단한 저음이다.
피아니스트라면 이 음색만으로도 앞으로 어떠한 음악이 전개될지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세르히와 함께 했었던 듀엣 연주자들 중에는 앞으로 전개될 음악을 느끼고는 시작부터 지레 겁을 먹는 연주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부드럽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아무 생각 없는 건가?’
영상으로 봤던 것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감성적인 음색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거기에서 어떠한 요구 사항 등은 읽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세르히는 약간 신경을 써서 음악을 깊게 내리눌렀다. 매우 여리게, 하지만 약간 혼란스럽게 만들어 떠보려는 의도를 지닌 음. 이 질척이는 저음에 빠지면 타티아나처럼 작고 가벼운 연주자들은 균형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기 십상이다.
물론 타티아나는 그렇게 약한 연주자가 아니지만, 일단 한 번쯤 흔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찰나.
“……!”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과도 같은 소리가 옆에서 터져 나왔다.
경고 혹은 선전포고. 어마어마한 음량으로 전신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이 소리는 세르히의 신경에 강렬한 경고로 틀어박혔다.
이 자리는 타티아나와 예카테리나의 대결을 위한 자리다. 당연히 그녀는 처음부터 최선을 다한 연주를 보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현 파트너인 세르히가 살금살금 이러저런 시험이나 하려 든다면 차질이 생기게 된다.
물론 6분간 이러저런 음악들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알아 가는 것도 좋지만, 타티아나는 일단 지금은 서로 제대로 실력으로 맞부딪치길 요구했다.
처음 보았을 때, 음반을 사서 들었다면서 팬처럼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실수했군.’
세르히는 타티아나에게 다시 한 번 미안함을 느꼈다.
영상으로만 봤었던 실력을 찬찬히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지만, 그 또한 실례일지도 모른다.
자세를 가다듬고, 세르히는 진지하게 반주를 얹었다.
“…….”
어스름한 초승달이 뜬 밤하늘과 무덤가에 흔들거리는 유령들.
타티아나가 해석하는 죽음의 무도는 불안과 위태로움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는 피아노는 정직하고 공평하게 균형 잡혀 있다. 마치 모두에게 찾아드는 죽음처럼.
죽음이 만연했던 중세시대, 사람들이 느끼는 죽음이 과연 이러했을까.
타티아나는 당연하다는 듯, 흘러가는 멜로디로도 흔들거리는 불안감을 그려 냈다. 신기할 정도의 표현력. 세르히는 그 기묘한 그림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잔뜩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실제로 듣는 타티아나의 음악은 그 이미지가 정말 또렷했다. 처음으로 합을 맞추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만들어 나가는 음악에 어떻게 색을 덧입혀야 할지 분명하게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손이 따라갔다.
기분 좋을 정도의 리드다.
‘어떻게 할까.’
천천히 타티아나의 리드를 쫓아 반주하던 세르히는 곧 자신에게 주제가 돌아올 타이밍이 되자 조금 고민했다.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에르네스트가 했던 것처럼 적절히 역량을 이끌어 내는 선에서 연주하는 것이 옳다. 타티아나가 차분하게 잘 연주를 마친다면 자연스레 이 승부는 타티아나의 승리로 끝나게 될 것이다.
예카테리나와 타티아나 두 사람 간 실력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세르히가 생각하기에 지금 타티아나가 요구하는 음악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 재미없는 방법은 피아니스트들의 방법이 아니다.
언제나 예상 못 한 상황과 불합리한 조건에 마주하고도 피아노 앞에 앉아야 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주어진 것들로 최선의 연주를 해내야 한다.
타티아나에게 주어진 것은 세르히 세르게예비치라는 프로 피아니스트다. 그렇다면 그녀가 감내 해야 할 것 역시 세르히였다.
타티아나는 모든 결론을 내리고 세르히에게 실력을 다해 달라 요구했다.
그 요구를 충실히 따라, 세르히는 무게를 실었다. 거구의 피아니스트가 쏟아내는 힘이 수십 년간 단련된 테크닉을 통해 건반에 집중되었다.
“…….”
음악이 보다 위험천만하게 광대해졌다.
타티아나의 손에서 떠나 세르히에게 쥐어진 음악은 한층 더 강렬하게 발전했다. 처음 리듬과 그림에선 벗어나지 않지만 꿈틀거리는 에너지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태롭게 부풀었다.
균형 속에 공존하는 불안. 점점 크기가 커져 가는 음악 속에서 불안의 크기 역시 부각된다.
세르히가 해석하는 죽음의 무도 역시 타티아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쉽게 다루기 힘들 정도로 음악의 저변이 넓어져 간다.
이미 음악은 거대한 공동묘지 위를 흐르고 있었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유령과 망자들이 어지럽다. 잠시 후엔 그가 쏟아 내는 음악의 규모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유령들은 마을 곳곳에서 날아다니고, 망자들이 지붕을 뛰어다니며 익살스럽게 춤춘다. 새하얀 달빛이 그들을 비췄지만 그 춤은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오직 귀로 간신히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세르히가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이었다. 그는 그 상태로 타티아나에게 선율을 넘겨주었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바로 펑 하고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에게 폭탄을 건네준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폭탄을 받아든 타티아나는 숙련된 기술자처럼 손가락을 들더니, 푹 찔러 넣었다.
“하.”
세르히는 자기도 모르게 연주 중에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른 음악을 파고들어선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거침없이 건반을 짚을 때마다 음악이 그녀에게 복종한다. 힘없이 무릎을 꿇는 굴복이 아닌, 검과 창을 들고 맹세하듯 힘차게 일어서는 경배다.
죽음을 다루는 음악을 편안하게 손 아래에 두면서, 타티아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음악적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세르히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영상으로 봤던 건 타티아나가 지닌 실력의 반절도 채 되지 않았다. 직접 곁에서 마주한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어떨 땐 검과 창으로, 어떨 땐 방패와 활로. 타티아나의 손에서 피아노는 그 무엇으로든 변화했다.
보다 날카롭게 타티아나가 주제를 휙 찔러 들어왔다. 세르히는 다시 흘러나올 뻔한 헛웃음을 삼키면서 가볍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자리에서 리허설도 없었다고 믿기 힘들었다. 이미 이 자리는 무대나 다름없었다.
***
아, 눈 그쳤네.
진짜 매년 보는 건데도 지긋지긋하다니까. 아까 여기 올 때도 눈 때문에 늦을까 봐 일부러 택시 안 타고 지하철 탔는데, 웬걸. 지하철 노선에 문제가 생겨서 진짜 늦을 뻔했잖아.
어쨌든 눈 그쳤으니까 지하철 타기 싫어. 집에 갈 땐 차로 가야겠네. 택시를 탈까? 아니면 혹시 나랑 같은 방향으로 갈 사람 없나……? 태워다 줄 수 있냐고 물으면 초면에 너무 실례겠지? 그래도 한 번 물어나 볼까. 이참에 친해지는 것도 좋잖아.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서 뭐 사 가야 했던 것 같은데. 뭐더라. 커피였나? 아니지, 커피는 저번에 사 뒀던 거 있잖아. 오로라 밥은 있었나?
“…….”
지하철, 차, 커피, 고양이. 그리고도 수없이 짓쳐 드는 딴생각들의 홍수에 휘말려 예카테리나는 멍하니 앞을 보고 있다가, 순간 깨달았다.
아, 졌구나.
완전히 졌고, 완전히 망한걸 알아서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게 스스로가 일종의 현실도피 중이었음을 자각하자마자 갑자기 귓속으로 피아노 소리가 파고들었다.
“……아.”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예카테리나가 느끼기에 기적적으로까지 느껴졌다.
190cm도 넘는 세르히는 피아노를 거의 집어삼켜 버릴 것처럼 달려들며 건반에 모든 힘을 쏟아 냈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닌 한계를 끝까지 끌어내는 듯한 복잡하고 다채로운 음색과, 광활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음량이 섬뜩할 정도다. 멀리서 듣기에도 소름끼치는데, 옆에 앉아 있으면 그대로 혼절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옆의 타티아나는 그 모든 것을 똑바로 받아 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마치 건반과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타티아나는 피아노와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이면서 마치 스스로 목소리를 내듯, 피아노로 노래를 불렀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실력에 자신이 있었고, 극복할 수 없는 한계는 없다고 늘 생각해왔다.
실제로 에르네스트와 했던 듀엣도 처음엔 당혹스러움도 느끼고, 짜증도 느꼈지만 불과 6분 사이에 많은 진전을 이루면서 보다 좋게 만들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진다면 훨씬 더 자유롭고 완벽하게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에겐 그런 적응의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곡이 시작함과 동시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처럼 세르히를 압박했고, 그 후로도 한 번도 밀리지 않고 팽팽하게 듀엣 연주를 해 나갔다.
예카테리나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이상하기까지 했다. 연습을 하거나 할 틈도 없이 저 정도 되는 파트너를 마주하고도 어떻게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연주에 임할 수 있지?
하지만 타티아나는 상식적인 이해를 넘어선 기적 같은 연주를 보여 주고 있었고, 기적이란 늘 그렇듯 정말 아름다웠다.
‘진짜 졌네.’
되레 시원해지기까지 한 기분으로 예카테리나는 조금 더 타티아나와 세르히의 연주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