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77화 (377/1,277)

##  377화

심사 위원의 눈으로 진지하게 연주를 바라보고 있던 음악가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듀엣을 지켜보았다.

작은 숨소리도, 움직일 때 옷이 스치는 소리마저도 방해될까 싶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큼 몰입할 수밖에 없는 연주였다.

세르히와 타티아나의 피아노 듀엣은 이전 에르네스트와 예카테리나가 했었던 죽음의 무도와 같은 곡이었지만, 같지 않았다.

세르히가 팔을 휘둘러 거의 피아노를 부숴 버릴 것 같이 건반을 옥타브로 연타했다.

타티아나는 그 소리에 짓눌려 버릴 것처럼 보이지만, 손을 뻗어 건반을 누르는 행위만으로도 세르히의 무시무시한 소리에 저항하고, 심지어 거의 동등하게 겨루다가 날카롭게 꿰뚫고 나가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 있는 피아니스트들은 이 듀엣을 보며 당혹스러움마저 느꼈다.

신체적 조건이 굉장히 크게 작용하는 연주자들의 세계에서 세르히의 체격은 압도적인 축복이나 다름없다. 그 몸무게의 절반도 안 나갈 것 같은 타티아나가 거기에 맞선다는 건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세르히의 음악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기술과 집중력이다.

춤추는 유령들 사이에서 타티아나와 세르히는 함께 춤을 추고, 검을 휘두르고, 불길에 휩싸였다.

이미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와 그 나이의 절반도 안 되는 어린 학생이 이루어 내는 즉흥 리허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였다.

“브라비!”

연주가 끝났을 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건반에서 손을 내린 타티아나는 기립 박수를 받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세르히에게 걸어왔다. 세르히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곤 일어나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두 연주자는 악수를 나누고, 청중들에게 살짝 묵례했다. 정말 리허설이 아닌 콘서트같이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타티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세르히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힘드네요.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힘든 것 맞아요?”

“혼났어요, 정말.”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엄살도 겸양처럼 보인다. 세르히가 피식 웃었다.

“좋은 연주였어요. 타티아나. 그리고 그냥 세르히라고 불러 줘요.”

“아하하, 고마워요 세르히.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이런 일이요?”

세르히가 되묻자 타티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물론 세르히 세르게예비치와 함께 듀엣을 한 일 말이죠. 팬으로서 정말 기뻐요.”

방금 전 피아노로 세르히를 상대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한 점 흐림 없이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순수한 팬으로서 세르히를 대하는 듯했다. 오늘 이 리허설을 소중하게 여기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대에서도 같이 듀엣을 하면 되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세르히는 타티아나가 이 이상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녀의 말에서 분명하게 전달받았다.

그리고 힐끗 곁눈질하니 에르네스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이 겉에 드러나진 않지만 기분이 좋진 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르히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해서 후배들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이 곡을 무대에도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하고 싶지만…….”

그는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승부는 타티아나에게 돌아간 것 같으니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네요.”

“아직 모르는 일이지 않나요.”

세르히는 에르네스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약하게 타티아나를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정말 대단한 실력으로 세르히를 마주하여 연주를 끝마쳤다.

누가 보더라도 이 듀엣 대결에선 타티아나의 우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공정한 심사를 기다렸다.

“……어디 보자.”

타티아나의 시선을 받은 바실리가 머뭇거리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가 심사평을 내 줘야 하는 거지?”

“아뇨.”

승패를 가릴 평가가 떨어지기 직전, 예카테리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난 연주자들의 대결 간에는 심사 위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상황이고 이렇게 많은 심사 위원들이 있으니 맡겨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느낀 평가에 솔직하기로 한 모양이다.

“제가 졌어요. 인정할게요.”

웅성거리면서 이 승패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 음악회가 장난인 줄 아냐며 따지고 들던 예카테리나가 이렇게 깔끔하게 인정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난 예카테리나가 대결에 진지하게 응했고, 또 인정했다는 것을 깨닫곤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타티아나.”

“예카테리나.”

여러 가지 말들을 떠올렸다가, 그중에서도 예카테리나가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을 만한 적당한 말들을 추리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단했어요. 제가 왜 여태까지 당신 같은 연주자를 모르고 있었나 모르겠네요. 연주회 두 번 했었다고 했죠? 어디서 했는데요?”

“…….”

난 속으로 그녀와 주고받을 말들을 계산하고 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예카테리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었다.

할 수 있다면, 나도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다.

“돔 무지키와 차이코프스키 홀에서요.”

“아, 진짜. 이걸 먼저 들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큰 홀에서 했을 줄은 몰랐잖아요.”

“죄, 죄송해요.”

“콩쿠르는요?”

내 커리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궁금해하는 만큼 성실히 답해 주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역시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말해 주었다. 난 그녀가 이번 독일 에틀링겐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듀엣에선 에르네스트에게 조금 휘둘리긴 했지만, 그래도 빠르게 균형을 되찾아 온 것은 그녀의 실력이 큰 콩쿠르에도 통용될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참에 서로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이것저것 주고받음으로써 난 예카테리나와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 역시 그러했는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전 처음에 타티아나가 왜 듀엣으로 리허설을 해 보자 했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처음 예카테리나가 제안했던 것은 나와 그녀의 일대일 대결이었다.

하지만 난 그것으론 이 상황이 해결되더라도 불만족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패를 꺼내 놓았다.

그냥 그뿐이었는데, 예카테리나는 내게 어떠한 꿍꿍이가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가 이제야 말끔히 해소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해가 가네요. 모두가 납득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요. 이렇게 해 보고 나니 차라리 시원해요.”

“……다행이에요. 예카테리나.”

설전으로 결정하려 했으면 아마 1시간으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자리에 없는 콘서트 디렉터까지 있었다면 도저히 대화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닥치고 나서 피아노로 해결을 봐도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성격상 막말을 몇 마디 했을 테고, 서로 감정이 상하고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면 이미 늦어도 한참 늦는다.

일찍 피아노를 두고 마주하여 30분 남짓한 시간으로 서로 납득한 것 같으니 이쯤하면 일이 잘 풀린 편이었다.

이따가 콘서트 디렉터와 그 위의 진행위원회만 제대로 납득시키면 될 것 같다. 난 여기 있는 음악가 분들이 도와준다면 그것도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있잖아요, 사실 얼마나 자신 있었던 거예요?”

“예?”

“너무 잘했잖아요. 한 프로그램 정도는 얼마든지 따올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실력으로 따내겠다고 직접 말한 것은 에르네스트였지만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은 하고 있었다. 최연소 신예로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건 그저 실력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대결에서 꼭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내가 예카테리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듀엣으로 확실히 하자고 덧붙였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예카테리나의 실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피해선 안 될 상황이라면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전 딱히 제가 유리하겠단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정말요?”

“예.”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날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물었다.

“만약 지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요?”

“……글쎄요.”

실력으로 져 놓고도 떼를 쓸 생각은 없었다.

예카테리나가 말했던 대로 진행 위원회의 프로그램에 따라 난 세르히와, 에르네스트는 예카테리나와 듀엣 무대를 진행해야 했겠지.

하지만 난 에르네스트가 나와 함께 연말 음악회에 나가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같이 듀엣을 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할 때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만약 내 실수로 잘못되어 약속을 깰 상황이 닥치면 그를 볼 낯이 없을 것 같다.

상상만으로도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제 파트너에게 사과해야 했겠죠?”

“아하하하하.”

너무 바보 같은 대답이었는지 예카테리나가 숨이 넘어가라 웃어 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자신감 넘치게 이길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할 걸 그랬다. 약간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웃던 예카테리나는 약간 뜬금없는 말을 했다.

“너무 괴롭히진 마요.”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예카테리나는 휙 돌아서더니 이쪽을 보고 있던 다른 음악가들에게 말했다.

“아무튼, 다들 보셨어요? 이따가 콘서트 디렉터님 오시면 말씀 잘 부탁드려요.”

“알았어요.”

“그래야지. 결정 난 거니까.”

어느 한 사람도 이견 없이 흔쾌히 대답했다.

예카테리나의 입장에선 정말 완패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받는 상황이라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녀는 곧 붙임성 있게 말을 섞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었으니까 같이 듀엣 안 하실래요? 로만.”

“……왜 접니까? 예카테리나. 저기 세르히 세르게예비치가 있는데. 같이 하셔야지요.”

난데없는 듀엣 신청에 그 천하의 로만도 약간 당혹스러워 했다. 예카테리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기존에 정해져 있던 각본을 깰 예정인데 피아노 듀엣 두 곡을 꼭 지키란 법은 없잖아요? 그러니 제 맘이죠. 전 예전부터 로만과 앙상블을 해 보고 싶었거든요. 팬이에요.”

“음…… 그건 고맙습니다.”

“그리고 세르히 세르게예비치는 저랑 안 맞아요. 안 쳐 봐도 아까 연주만 들어 보면 알 수 있어요.”

그 말에 옆에 있던 세르히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나는 뭐 선택권도 없는 건가요?”

“세르히는 솔리스트로서도 책임이 막중하시잖아요. 그에 비해 전 한가한 편이고. 그러니 제 듀엣 상대 정도는 제 마음대로 고르게 해 주세요. 괜찮죠?”

“뭐가 괜찮습니까? 듀엣은 나도 하고 싶은데.”

“……하시든가요? 저 말고 다른 분이랑.”

예카테리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툭 던졌고, 세르히는 약간 발끈했는지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듯 즉답했다.

“로만. 저와 바이올린 소나타 하시죠.”

“예?”

“잠깐만요! 왜 새치기하세요!”

누가 보아도 탐나는 바이올리니스트인 로만을 놓고 벌어진 두 피아니스트의 실랑이에 난 실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로만은 조금 특이한 사람이긴 하지만 역시 어디서나 인기가 많은 것 같다.

“……후후.”

난 목청을 키우는 예카테리나의 뒷모습을 보며 한시름 놓아도 되겠단 생각을 했다. 그녀와의 일이 잘 매듭지어져서 다행이다.

30분 정도였지만 어려웠다. 하지만 나와 에르네스트가 이곳에서 우리 자리를 찾기 위해 꼭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잘된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사람도 한 곡 보여 주지 그래?”

에르네스트와 친분이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인 바실리가 내 옆으로 슥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가 히죽 웃었다. 두 사람이란 나와 에르네스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

“지금 말씀이신가요?”

“안 될까? 아, 오해하진 마. 실력이나 자격을 보여 달란 건 아니야. 그냥 방금 전 연주를 듣고 났더니 기대가 되어서 그래. 기대가.”

듀엣 무대는 결정된 것이니 어떤 무대가 될지 리허설로 한 번 보여 달라는 것 같았다.

방금 전 이미 리허설 무대로 두 번이나 연주가 있었는데, 이제 와서 할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바실리의 눈빛에 나는 설득되었다. 그는 정말 음악에 굶주려 기대하는 청중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난 외면할 수 없었다.

주위에서도 몇몇 분들이 거들어 주었다.

“그것도 괜찮겠는데?”

“어때요? 타티아나. 시간도 아직 꽤 남았는데. 두 사람 준비한 거 있다면 한 번 보여 주세요.”

콘서트 디렉터가 올 때까지 앞으로 약 30분. 시간은 충분했다.

난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

“왜?”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난 지금 그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저러한 변명이나 수식어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냥 짧고 간단하게 제안했다.

“지금 같이 듀엣 리허설 하지 않으실래요……?”

“그럴까.”

에르네스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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