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78화 (378/1,277)

##  378화

에르네스트의 동의를 얻은 나는 바실리에게 말했다.

“2분만 주세요.”

“그걸로 되겠어?”

“물론이죠.”

“얼마든지.”

에르네스트와 선곡 등 회의를 하는 데 시간이 길게 필요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살짝 투덜거렸다.

“너무 짧잖아. 아깐 15분 회의했었는데.”

“괜찮지 않나요?”

그와 지금까지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년 단위고 연습실에서 보낸 시간도 수십 시간이다. 우린 서로 레퍼토리도 상당히 깊게 꿰뚫고 있었고 음악적 성향과 스타일도 잘 아는 편이었다.

수많은 선배 음악가들에게 보일 곡을 선곡하는 자리이니 최대한 신중한 편이 좋겠지만, 그래도 괜히 15분이나 쓸 필요는 없었다. 2분이면 충분하다. 이건 만용이 아니라 그를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대충 골라서 보여 주는 걸로 상관없어 너는?”

“대충이라뇨……? 그렇지 않아요.”

“2분은 누가 봐도 대충이야.”

“어차피 저희 레퍼토리는 기존 연습했던 곡들도 있고…… 정하기 쉽잖아요.”

에르네스트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우린 적어도 피아노에 대해선 서로 그만큼 잘 안다. 2분은커녕 2초만 주어져도 누군가 먼저 시작하면 바로 따라서 연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그 정도로 에르네스트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내가 건성으로 여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건 정말 오해인데.

아무튼 무슨 오해든 간에 피아노 앞에 앉으면 모두 풀릴 오해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이 시간 다 가겠어요.”

“…….”

에르네스트는 약간 불만 어린 표정이었다. 난 그를 달래듯 말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앉아서 선곡하고 바로 연주하면 되죠.”

“……그래.”

굳이 다른 의자를 찾을 것 없이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곧장 피아노로 향했다. 방금 듀엣을 하느라 앉았던 피아노다. 난 세르히가 낮춰 놓은 피아노 의자를 에르네스트가 다시 자신에게 맞게 세팅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준비가 된 모습이다.

“그래서 뭐로 할 건데? 라흐마니노프?”

“음…… 차이코프스키 어때요?”

“차이코프스키? 아, 저번에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마이너스 오케스트라로 연주한 적 있었지. 내가 도와줄까?”

“그건 듀엣이 아니잖아요…….”

갑자기 총보 연주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난 듀엣 연주를 하고 싶을 뿐인데.

뭔가 서로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했다. 그냥 난 그와 나란히 앉으면 눈빛만 봐도 적절한 곡을 딱 선곡해서 연주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실 너무 과한 기대였던 걸까? 에르네스트가 약간 평소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음.”

그래도 아까 세르히, 예카테리나와 했던 것처럼 하나하나 레퍼토리를 늘어놓고 기계적으로 맞춰서 곡을 집어 들긴 싫었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눈을 마주해도 어쩐지 생각이 잘 안 읽힌다. 피아노 레슨이나 듀엣을 위해 가까이 붙어 있지만, 그래도 두 대의 피아노는 어쩐지 거리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제안했다.

“이리 올래요? 에르네스트.”

“뭐?”

“포 핸즈는 싫으신가요?”

피아노 듀엣은 두 종류가 있다. 두 대의 피아노를 각각의 연주자가 맡는 투 피아노. 그리고 한 대의 피아노를 두 명의 연주자가 맡는 포 핸즈다.

각각의 장단점도 뚜렷했다. 화려함이나 공간감은 투 피아노가 훨씬 뛰어나지만, 한 공간에 피아노가 두 대나 있는 상황은 생각보다 많이 없기에 범용성은 포 핸즈 쪽이 낫다.

물론 여기엔 피아노가 두 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곡이든 상관없다. 굳이 따지자면 투 피아노 곡을 선곡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지금 에르네스트와 되도록 거리를 두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된 연주를 하려면 가까이에 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대답했다.

“안 될 것 없지.”

난 피아노 의자를 90도 돌려서 그가 의자를 끌고 올 수 있게 해 줄까 하다가 그냥 살짝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내가 키에 비해 의자를 조금 낮게 쓰는 편이라 괜찮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내 옆에 앉았다. 긴 피아노 의자에 함께 앉으니 어깨가 닿았다.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이렇게 피아노 한 대를 놓고 듀엣을 하는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나 많이 연습실에서 연주를 주고받았는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불편하시나요?”

“아니. 괜찮아.”

의자 높이가 괜찮다는 것인지 지금 나란히 앉은 게 괜찮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가 괜찮다면 나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가 휙 고개를 돌렸다. 순간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깜짝 놀랐다. 내색하지 않고 숨을 멈추고 있는데,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에르네스트가 태연하게 말했다.

“자, 뭐 할 건데?”

“……차이코프스키 포 핸즈 하면 저번 학기 과제곡이 떠오르지 않나요?”

학교에서 나오는 과제곡은 제각각이기도 했지만, 피아노 듀엣처럼 몇몇 곡들은 한 학년에 전체적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덕분에 나와 에르네스트는 같은 곡을 공유하고 있었다.

포 핸즈 곡을 이렇게 같이 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갑자기 꺼내 들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거 했었지. 타티아나 넌 아나스타샤랑 했었던가?”

“예. 에르네스트는요?”

“나? 모르겠어. 누구랑 했더라.”

“……곡 기억 못 하시는 거예요?”

“아니. 곡은 기억 나. 퍼스트, 세컨드 둘 다.”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어지간해선 곡을 잊는 법이 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없다면 자기가 맡은 파트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다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도 않겠지.

“너는?”

“저도 아무거나 관계없어요.”

나도 아나스타샤와 번갈아 가면서 연습하느라 다 외우고 있긴 하다.

에르네스트는 묘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

“…….”

“난 아무거나라는 말이 제일 어렵더라.”

그는 툭 내뱉더니 다리를 쭉 뻗었다.

“그냥 이대로 할까.”

“그럴까요.”

지금 앉은 자리로는 내가 퍼스트, 에르네스트가 세컨드다.

난 머릿속으로 빠르게 퍼스트 피아노의 연주를 떠올려보았다. 딱히 막히는 부분도 없고 매끄럽게 떠올랐다. 이제 이대로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에 있을 곡과 얼마나 잘 맞는지 직접 리허설해 보면 되겠지.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나니, 이미 주위는 고요해져 있었다.

옆을 보니 모두가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리허설일 뿐인데, 난 모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무슨 곡인지 소개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예요.”

“그게 무슨 분위기인데. 그냥 시작하면 안 돼?”

“지금…….”

길게 속닥이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아서 내가 소개할까 생각하는 찰나, 에르네스트가 조금 버릇없이 뒤쪽으로 고개를 쭉 빼더니 빠르게 말했다.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조곡 8번. 꽃의 왈츠입니다. 모쪼록 잘 들어 주시길.”

알아서 칠테니 알아서 들으라는 투였다. 아니, 조금 더 예의 바르게 할 순 없어요?

하지만 내가 눈을 흘기거나 말거나, 에르네스트는 몸을 이쪽으로 쭉 펴면서 발을 뻗어 페달을 밟으며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난 놀랄 틈도 없었다.

“……!”

그 일방적인 연주임에도 피아노 소리는 너무나 부드러웠다. 새하얀 구름처럼 뭉실 떠오르는 라장조의 화음으로 꽃의 왈츠는 시작되었다.

첫 주제는 이 곡의 전체적인 풍경, 하늘을 그린다.

난 구름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빠르게 아르페지오를 전개했다. 기억 속의 선율을 끌어내어 건반 위로 투사한다. 다행히 리듬은 에르네스트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다시 한 번 구름이 떠내려간다. 거기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한 번 더 그와의 호흡을 확인하고, 난 조금 더 화려하게 옥타브 아르페지오를 그려 넣었다.

선율이 내려오면서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스레 내려오고, 왈츠는 본 주제를 열었다.

“…….”

4분의 3박자. 에르네스트가 만드는 귀여운 왈츠 리듬에 따라 난 주 선율을 연주했다.

꽃의 왈츠라는 이름에 걸맞게 감미로우면서도 경쾌한 음악이다.

색색들이 꽃들이 가득한 들판 위를 가르는 곡을 한겨울에 연주하기엔 그리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귀엔 겨울이기에 더더욱 따뜻하게 들리는 부분도 있었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왈츠의 리드를 맡기고 보다 편안하게 감성적인 부분을 드러내었다. 강렬함에만 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얇고 약한 꽃잎 한 장, 화음 하나에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잠재되어 있다. 난 그것들을 섬세하게 끌어내었다.

“……?”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제동을 걸었다.

내가 조금 집중해서 꽃잎들을 저편으로 후 불어 날리려고 하자 그가 서스테인 페달을 놓아 버린 것이다.

막 날아가려던 음들은 순식간에 댐퍼에 콱 졸려 사라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고개를 돌려 슬쩍 노려봐도 에르네스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하게 왈츠 리듬만 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 이런 해석을 가지고 있었나?

난 정말 혼란스러웠다. 이 타이밍에 건조하게 페달을 놓는 해석이라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입을 열 수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의사 표현 방식은 지금 함께 연주중인 피아노뿐이다.

난 그가 도저히 오해할 수 없도록 약간의 리듬에 변화를 주어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했다. 왈츠 리듬 주변을 돌면서 꽃들을 모으고, 에르네스트의 코앞에 똑똑히 보여 주었다. 그가 이걸 이해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다음으로 전개하려는 순간, 에르네스트가 의도적으로 페달을 놓았다.

“…….”

왜 이러는 거지? 싸우자는 건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망신이라도 당하고 싶은 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에르네스트가 지금 꽤 삐딱하게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건 알겠다.

난 일단 음악으론 해선 말이 잘 안 통한다는 것을 느끼곤 일부러 어깨를 조금 더 부딪쳤다. 꿈쩍도 않는다. 팔을 조금 애매하게 위치시켜서 그에게 신경 쓰이게 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이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육탄전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난 약간 힘이 빠진 채로 연주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나면서도 조금은 웃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에르네스트의 의도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난 그를 믿고 있었기에 긴 회의 없이 곡만 정해서 연주하면 되리라 생각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약간의 고집과 장난이 뒤섞인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니까 속수무책이다. 그에게 오해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곡이 끝날 때까지 끌려 다니기만 해야 하나?

“……후.”

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그가 대충 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은 건 내 잘못이었다. 내가 결코 그와 듀엣을 대충 할 생각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주리라 생각했었는데, 사실 말로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많은 음악가 선배들에게 보이는 우리의 듀엣 리허설을 이렇게 재미없게 선보일 순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어차피 따낸 자리니 무대에서나 잘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리고 조금 예민한 사람들은 지금 에르네스트가 페달로 날 휘두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건 이번엔 그가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난 자꾸 오해가 오해를 낳는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슬쩍 상황을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의자의 반을 확실하게 차지하고 오른발은 이쪽으로 넘어와서 페달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원래 포 핸즈 구조상 페달은 세컨드가 맡는 경우가 많으니 잘못된 자세는 아니었다.

“…….”

일단 다시 한 번 천천히 선율을 이끌며 그의 왈츠 리듬 주변을 돌았다. 어쩌면 이쯤에서 그만두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또다시 절묘하게 자신의 연주는 가지고 가면서 내 프레이징만 끊어 먹어서 힘을 빠지게 만들었다. 얼마나 교묘하고 섬세한 페달 테크닉인지, 난 당하고도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이쯤 되자 살짝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착각하나 본데, 나도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잠깐 고민했다. 정말 해도 될까. 조금 심한 짓이 될지도 모른다.

신중하게 고민한 나는 너무 심하게 하진 않기로 했다.

“……읏.”

손은 멈추지 않고 허리만 굽히면서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상태로 난 오른발로 왼발 구두 뒷굽을 지그시 눌러서 구두를 벗었다.

괜히 꿈틀거리거나 했다간 바로 옆에 붙어있는 에르네스트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난 단 한 번의 기회만을 기다리면서 구두에서 발을 빼냈다. 연주 중에 구두를 벗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도 연주자로서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면서 얌전히 연주를 따라갔다. 에르네스트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지 보다 경쾌하게 왈츠를 추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이기는진 마지막까지 가 봐야 알 것이다.

그리고 주제가 다시 한 바퀴 돌아 내 앞에 꽃이 가득한 들판으로 펼쳐졌다.

난 태연하게 에르네스트의 주위에서 꽃잎을 따다가, 그가 발을 움직이려 한다는 직감을 느꼈다.

그 순간 난 왼발을 뻗어 페달을 밟고 있는 에르네스트의 운동화 위를 꾹 밟았다.

“……!!”

소스라치게 놀라는 감각이 붙어 있는 어깨를 통해 전해져 왔다. 에르네스트는 그야말로 기겁해서 펄쩍 뛰었다. 순간 그의 리듬이 흐트러질 정도였다.

그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날 돌아보았다. 난 그를 째려보았다. 구두를 신고 밟지 않은 것만으로도 봐준 줄 아세요.

물론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난 그의 발등을 놓지 않고 그대로 페달처럼 사용했다. 에르네스트는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놓아주는 건 재미없다.

난 페달을 유지하며 기어이 모아놓은 음표들을 바람에 섞어 연습실 끝까지 흩뿌리고, 그 후에도 이어지는 프레이징을 만끽했다.

포 핸즈 듀엣은 이런 맛에 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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