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9화
에르네스트는 오늘 사실 복잡한 기분이었다.
타티아나와 함께 큰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웬 이상한 장애물들이 툭툭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낯선 여자가 자신이 위원회에서 정한 듀엣 파트너라고 말했을 때, 에르네스트는 그 자리에서 피아노 대결을 신청할 생각부터 했다.
이곳은 음악가들의 정글.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발언권은 없다. 철저하게 꺾어서 발언권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성질대로 하기 전에 타티아나가 끼어들었고, 이야기는 묘하게 흘러가서 타티아나와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파트너인 에르네스트를 예카테리나에게 빌려주었다.
“…….”
왜 이렇게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괜찮았다. 저번 자선 연주회 때랑은 다른 상황이었다. 이번엔 적어도 자신의 파트너라고 확실히 말해 주긴 했으니까.
그녀가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듀엣 대결이 필요하다고 여겼다면,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믿고 협조할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세르히의 듀엣을 보면서 슬슬 불안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연주는 누가 듣더라도 기분 좋은 듀엣이었다. 음악가라면 그 누구도 거짓으로 들을 수 없었고, 에르네스트는 세르히와 타티아나가 처음 만났음에도 서로를 꽤나 잘 이해하고 조화로운 음악을 낸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타티아나는 이곳에 올 때부터 세르히와 만난다는 것에 대해 들떠 있었다. 첫인상도 서로 좋았고, 음악가로서도 잘 맞는 것 같다. 타티아나가 세르히와 연말 음악회 무대에 오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같이 듀엣 리허설 하지 않으실래요……?”
하지만 불안해하던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타티아나는 깔끔하게 승리를 거머쥐고는 본래 파트너인 에르네스트에게 돌아왔다.
에르네스트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약속을 지킨 타티아나를 의심했다는 듯한 말을 하긴 싫었다.
때문에 군말 없이 그녀와의 리허설에 응했다.
“2분만 주세요.”
그리고 살짝 기분이 상했다.
다른 곳도 아니라, 이 내로라하는 음악가들 앞에서 보일 곡을 고르는데 들일 시간치곤 너무 적지 않나?
몇 번 불만을 표했지만 타티아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얼른 피아노 앞에 앉길 요구했다.
그대로 바로 앉아서 대충 두 사람이 공유하는 레퍼토리 중 아무거나 꺼내들더라도 잘 연주할 자신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불만이 생겼다.
에르네스트는 완벽주의자로서의 철칙을 한 번만 접기로 했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하고 싶은, 그간 쌓인 말들이 조금 많았다.
“…….”
그렇게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조곡 8번. 꽃의 왈츠가 두 사람의 듀엣으로 시작되었다.
에르네스트는 처음엔 타티아나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가 주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페달로 타티아나를 방해했다.
“……!?”
깜짝 놀란 듯 어깨가 움찔하더니, 곧 항의하는 얼굴로 돌아본다. 에르네스트는 순간 웃어버릴 뻔했지만 일부러 태연하게 연주에만 집중했다.
타티아나는 그 후로도 에르네스트가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지 헷갈리는 듯 몇 번 대화를 시도하다가, 종국엔 어깨로 에르네스트를 밀기까지 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 무슨 짓이냐는 것 같지만, 그건 에르네스트야 말로 묻고 싶은 말이었다. 적어도 같이 앉아서 의논이나 해 보자고 했다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아랑곳 않고 버텼다. 이 연주가 끝난 뒤에 무슨 말을 듣든, 그건 그때 진지하게 할 이야기다.
그런데 이미 연주 끝을 생각하는 에르네스트와 달리, 타티아나는 연주만 생각하고 있었다.
“윽?”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 삼켰다.
혹여나 아플까, 부드럽게 발 위로 느껴지는 압력은 그 사이에 운동화를 두고 있음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와중에 에르네스트는 정말 신발을 바꿔 신고 와야 했다고 세 번째로 후회했다. 적어도 이런 운동화가 아니라 구두를 신고 왔어야 했다.
당황한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를 보았지만 이번엔 그녀의 매서운 시선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당혹감에 굳어 버린 머리로 기계적으로 손만 움직이는 사이, 타티아나는 발로 페달 위의 에르네스트의 운동화를 꾹꾹 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
물론, 에르네스트가 굉장히 방해되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타티아나가 원하는 음향이 나타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에르네스트의 발을 툭 밀어 버리고 페달을 차지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정확하게, 타티아나가 어떤 음악을 교류하길 원하는지 거의 강제로 알아들어야만 했다.
“…….”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도 모를 연주가 끝나고, 그제야 에르네스트의 발등에서 압력이 스륵 사라졌다.
쏟아지는 칭찬들 속에서 에르네스트가 간신히 옆을 돌아보니, 타티아나는 의자 밑으로 발을 까딱이며 장난스레 웃었다.
“아프진 않았죠?”
그걸 말이라고 물어?
뭐라 되쏘려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이미 붉어진 얼굴로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도 당황하는 일이 없게 훈련받았건만, 이 애와 있으면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후우.”
할 말이 없어서 한숨을 쉬며 옆을 보니 다른 음악가들은 타티아나가 한 일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이 즉흥 리허설에 대한 칭찬뿐이다.
“연습해 왔던 무대인가? 잘하네.”
“큰소리 칠 만하겠어.”
이미 두 사람의 듀엣 자리는 실력으로 따낸 자리이니 존중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건 다행이었다. 누가 한마디라도 거들면 에르네스트는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잠시만요.”
에르네스트가 일어서자 타티아나는 허리를 구부리고는 다시 구두를 신었다. 이 자리에서 발을 씻거나 할 순 없을 테니 차분한 태도였지만, 에르네스트는 죽고 싶어졌다. 차라리 구두를 신은 채로 내 발등을 찍어 버리지 그랬어.
창피함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은 괜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에르네스트가 기어이 한마디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타티아나가 먼저 말했다.
“에르네스트?”
“……어?”
“미안해요.”
난데없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과에 말문이 턱 막혔다.
발을 밟은 것에 대한 사과인 건가?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사과를 받아도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어쩐지 거꾸로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쨌거나 발을 밟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상대에게 그렇게 말하자니 상황이 이상했다.
에르네스트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굳어 있는 사이,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연주 전에 상의도 제대로 안 하고 말이죠…….”
“타티아나…….”
“예?”
“너…… 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었던 거야?”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무엇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발을 밟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반항적으로 굴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주가 끝난 뒤에 한참이나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에르네스트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티아나는 웃으며 얼굴을 살짝 돌려 귀를 보이고는, 손바닥을 모아서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물론이죠. 그렇게나 잘 들렸는걸요.”
“…….”
그 바보 같은 짓을 타티아나는 짜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이해해 주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에르네스트가 입을 다물자, 타티아나는 이제 오해를 풀 시간이라는 듯 한결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아,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주세요……. 제가 바로 연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건, 에르네스트이기 때문이었으니깐요.”
“……나라서?”
“결국 오해를 샀지만요.”
대체 뭘 불안해하고 있었던 거지.
타티아나가 곧장 피아노 앞에 앉으려 했던 것은 그녀가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신뢰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토록 진지하게 여기는 피아노를 두고,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왜 바로 연주를 시작하자고 했는지 조금 더 잘 생각해 봤어야 했다.
스스로가 창피스러워진 에르네스트는 밖으로 나가서 차가운 눈 속에 얼굴을 묻고 싶어졌다.
어쩔 줄 모르겠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미안해하는 타티아나에게 무어라 말이라도 해 주어야 하는데, 에르네스트 스스로 느끼기에도 유치한 투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감정에 따라 움직였다고 말해 버린다면 그녀가 실망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물론 그녀는 참을성이 많고 쉽게 실망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에르네스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타티아나가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그런데 말이에요, 에르네스트.”
지금까지 조곤조곤하던 말투가 갑자기 엄격해졌다.
타티아나는 한 걸음 더 다가오면서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그거고 연주는 연주예요. 보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데. 에르네스트, 저흰 중앙음악학교 대표라는 걸 잊으면 안 돼요.”
혼나는 듯한 기분으로 들으면서,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굳어 있던 얼굴을 펴고 웃을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이제야 알겠다.
“나야말로 미안. 잠깐 미쳤었나 봐.”
“괜찮아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요.”
타티아나는 가볍게 사과를 받아 주었다.
두 사람은 음악가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방금 있었던 연주에 대한 피드백이나 감상 등이 오갔다.
에르네스트는 대충 듣는 척하면서도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다들 한 가락씩 하는 음악가들이다 보니 흘려 넘길 말이 없다.
“페달은 원래 그렇게 쓰는 거야?”
“아뇨, 제가 잘못했죠. 제가 사인을 잘못 이해해서 그랬던 건데 잘 할 수 있어요.”
“음…… 그래?”
특히 에르네스트가 연주 중에 페달로 장난을 친 것에 대해 은연중에 나무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에르네스트는 모두 자기 실수라고 딱 잡아떼었다.
무대에 올려도 될련지 약간 불안해하던 사람들도 에르네스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화가 약간 어긋나긴 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실력은 누가 봐도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믿을 만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어린 두 사람의 피아노 듀엣이 무대에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모두가 그런 이야기로 프로그램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회의가 진행되길 10여 분.
연습실 문이 벌컥 열리며 40대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가 들어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콘서트 디렉터?”
“예. 알렉세이입니다.”
그는 모자를 벗어 옆에 대충 내려놓고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회의 중이셨군요.”
“미리 하라면서요? 안 그래도 1시간 동안 우리끼리 많이 진행했어요. 아, 프로그램 가이드라인에서 꽤 벗어났을지도 모르니까 한 번 보실래요?”
“음…….”
1시간이라는 단어를 크게 강조한 율리아는 지금까지의 회의를 정리한 노트를 알렉세이에게 건네주었다. 알렉세이는 앉지도 않고 서서 노트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태연해 보이는 그 모습이 약간 마음에 안 드는지, 율리아가 옆에서 삐딱한 자세로 불만스레 말했다.
“그런데 차가 어떻게 된 건데요? 눈길에 미끄러져 타이어라도 삐었나요?”
“아뇨. 미끄러진 건 다른 차였는데 제 차를 옆에서 들이받더군요.”
알렉세이는 노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평온한 목소리와 달리 그 내용은 스펙터클했다.
율리아는 물론이고 모두가 알렉세이를 바라보았다. 사고가 났었다고?
율리아가 멍하니 물었다.
“……예?”
“차가 조금 찌그러진 것뿐이니까 그냥 타고 오려고 했는데, 보닛이 닫히지 않으니 앞이 안 보여서 운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리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냥 문제가 있었다면서요?”
“문제가 있었죠. 차 수리를 맡겼으니까.”
사고 자체에 대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짜 사고가 난 것이라면 늦은 것에 대해 따질 게 아니라 지금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 이렇게 온 것에 대해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알렉세이가 지금 농담을 하는지 진담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조용한 가운데 알렉세이가 노트를 휙휙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가 가장 먼저 시선을 맞춘 것은 에르네스트였다.
그가 고개를 살짝 비틀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서……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두 분이 듀엣을 하시겠다고요?”
에르네스트는 살짝 긴장됨을 느꼈다.
무슨 개떡 같은 위원회가 미리 모든 걸 정했다고 하든지 말든지 이 듀엣을 관철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다면 눈앞의 콘서트 디렉터를 제대로 설득시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 설득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약간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는 옆을 돌아보았다. 타티아나도 약간 미지의 존재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마지막으로 각오를 다지고 대답했다.
“예.”
“……그러시죠.”
각오와 달리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