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80화 (380/1,277)

##  380화

마음대로 하라는 투의 대답을 얻고도 에르네스트는 안심하지 않았다.

원래 정해져 있는, 위원회에서 바라던 구도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도 되는 이야기 같진 않았는데.

차 사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더니, 어쩌면 콘서트 디렉터로서의 역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이렇게 큰 음악회의 콘서트 디렉터로 기용된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상식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그 비상식적인 상황을 몇 번이나 본 에르네스트는 모든 의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알렉세이는 첫 등장부터 심상찮은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나중에 안 된다고 하시는 일은 없으시겠죠?”

“나중에?”

딴소리 못하게 한 번 더 확인하려고 하니 알렉세이가 되물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사이, 그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함을 느낀 듯 했다.

알렉세이는 손가락을 들어 노트를 툭툭 쳤다.

“여길 보니…… 이미 듀엣 리허설을 하신 모양이군요?”

노트엔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여러 음악가들의 손을 거쳐 적혀 있었다.

온통 날려 쓴 글씨들뿐이었지만 알렉세이는 이것을 보고 수많은 것들을 읽어 낸 듯했다.

“그리고 두 분의 프로그램 위치를 보면…… 어떤 리허설로 어떤 위치를 따냈는지도 알 수 있지요.”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느릿한 말투.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의 듀엣에 대한 평가 등이 노트에 적혀 있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알렉세이는 전부 추론해 냈다. 그가 없는 사이 이 음악가들 사이에서 어떠한 분위기가 흘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눈에 파악해 냈다.

뭔가 콘서트 디렉터가 아니라 형사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세이가 이어 말했다.

“저는 연주를 직접 들어 보진 않았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두 분이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다른 분들을 납득시켰으리라 생각되는군요.”

그가 노트를 덮고는 말을 맺었다.

“그럼 전 달리 의견 없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시죠.”

연주자 당사자들끼리 해결했고 납득했다면 괜한 소리 않고 존중하겠다는 뜻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가 조금 무감각하게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예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수십 명의 연주자들을 데리고 연주회를 꾸려 나가야 하는 콘서트 디렉터에게 필요한 건 사실 이런 통찰력이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 잠깐만요. 알렉세이.”

“말씀하시죠.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그게 다예요?”

예카테리나는 화가 날 만도 했다.

이미 대결에서 졌으니 깔끔하게 승복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콘서트 디렉터가 없는 사이 기획을 지키고자 큰소리를 내고 대결을 청하기까지 했던 건 그녀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약간 억울해져서, 불만을 토로했다.

“어차피 이렇게 정할 거라면 인선 계획은 왜 미리 알려 준 건데요? 그냥 다 대결로 정하게 두지.”

예카테리나의 투덜거림이 괜한 짜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알렉세이는 차분히 말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을 섭외하면서 기본적인 초안이 없을 수는 없지요.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지만 관계자들이 꽤 고심해서 만든 인선과 프로그램입니다.”

“그럼 왜…….”

“하지만 그건 그저 초안에 불과합니다.”

알렉세이는 딱 잘라 말했다.

분명 이 연주회를 기획한 수십 명의 관계자들이 고심 끝에 만들었지만, 결국은 초안일 뿐.

이곳에 모인 연주자들은 책상머리에서 만들어 낸 그 초안을 뜯어고쳐서 보다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콩쿠르 경력이나 음반 실적 등…… 연주자가 어떠한 능력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정형화된 데이터는 준비되어 있지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모두 데이터대로 움직이진 않아서요.”

“…….”

무어라 말하려던 예카테리나가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경력만 놓고 본다면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의 코를 가뿐히 눌러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예카테리나는 세상 일이 데이터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세이는 예카테리나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 실제로 그런 데이터에만 의존해서 무대를 준비했다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를 몇 번이나 봐 왔습니다. 공영방송의 새해 콘서트인 푸른빛이 특히 그런 매너리즘에 빠져 있죠.”

씁쓸하게 이야기하던 알렉세이는 주위를 휙 둘러보고는 팔을 뻗었다.

“여기 모여 주신 분들은 그 매너리즘을 타파해야 합니다. 음악가들이 언제부터 한 무대를 수어 번 거듭 테이크하는 식으로 일주일도 넘게 촬영했습니까? 전 여러분들에게 제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주고, 단 한 번에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낼 생각입니다.”

에르네스트는 그를 설득하지 않고 허가를 얻어 낸 것에 대해 찜찜해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알렉세이는 콘서트 디렉터로서 이 연주회를 철저히 음악가들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가 천천히 코트를 벗었다.

“제가 한 시간 전 보내 드린 프로그램 가이드라인을 여러분이 얼마나 멋지게 만들어 놓았는지 잘 보았습니다.”

“…….”

“물론 위원회의 몇몇 분들이 꽤 강력하게 그 초안을 요구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생방송으로 방영되기도 할 중요한 무대이니 신경 쓸 것이 많겠죠. 하지만 그렇다한들 자유로워야 할 여러분이 너무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으셔도 된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군요.”

코트를 벗자 꽤나 다부진 몸이 드러났다. 알렉세이는 고개를 좌우로 스트레칭하며 한결 시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오늘은 회의를 통해 여러분 모두가 납득할 만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도록 합시다.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결과는 오늘 책임자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음악가들의 수단과 방법이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무엇을 했는지, 모두가 봤다.

그렇게 모두가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 하도록 해 버리고는, 알렉세이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모두 잘 아시겠죠? 제가 무슨 말 하는지.”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분위기가 돌변했다.

경쟁에 익숙한 스포츠 선수들의 분위기가 경기가 시작되면 바뀌는 것처럼, 뜨겁고 묵직한 긴장감이 연습실을 지배했다.

에르네스트는 이 과격한 콘서트 디렉터가 어쩌면 살짝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곳엔 그런 것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송년 제야 음악회의 첫 프로그램 미팅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내 발라드는 뒤에 가면 안 된다니까. 몇 번을 말 해?”

“앞으로 보내는 게 훨씬 말이 안 되지. 그리고 그 발라드는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돼. 자정 가까운 시간에 텔레비전 보고 있을 사람들의 귀에 수면제를 들이부을 셈이야?”

“어이가 없네. 불만이면 앞으로 나와.”

“자신 있나 본데, 후회하지나 마.”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피아노로 향했고, 한 명이 바로 피아노에 앉자마자 연주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연주를 놓고 평가를 나누기 시작했다.

누구나 평가할 수 있고 누구나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마치 학교에서 친구들과 모여서 하는 위클리 연주회 수업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착각해선 안 된다. 이곳에 모인 건 베테랑 음악가 집단이다.

그야말로 전쟁이나 다름없는 회의였다.

“……음.”

내가 기대했던 분위기는 조금 정돈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이렇게 많은 연주자들이 참가하는 음악회는 처음이었지만, 다들 유명하신 분들이니 점잖은 분위기이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부에서 주최하는 음악회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자들도 많다고 하니까 뭔가 체계적인 것이 잡혀 있어서 착착 진행되리라 기대했다.

난 듀엣 자리만 한 자리 얻어 내면 나머진 어지간해선 하자는 대로 따라가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회의 분위기는 정말 내 예상에서 멀리멀리 빗나가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콘서트 디렉터가 우리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선언한 직후, 모두가 본색을 드러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음악가들이 큰소리로 자기주장을 펼쳤고, 각자가 지닌 음악으로 겨루었다.

나이나 경력 같은 것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지금 이곳에서 꺼낼 수 있는 모든 무기를 꺼내어 사용할 뿐이었다.

“직접 쓴 소나타라고 해서 안 될 건 없겠죠?”

피아니스트 아르템은 가진 무기가 조금 많은 듯하다.

그는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자작 피아노 소나타를 올릴 생각이라니, 정말 대단하다. 주변에서도 그리 생각하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곡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난해해.”

“꼭 후기 스크리아빈 같군. 그것도 살짝 스윙 재즈 맛을 본 스크리아빈.”

“분홍색 초콜릿 같아.”

얼핏 장난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두들 진지하고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다.

함께 아르템의 소나타를 들은 나는 이 현학적이기까지 한 표현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그의 음악을 묘사하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직접 연주를 한 아르템 역시 평가에 토 달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하고 납득한 표정이었다. 사실 이렇게 자신의 곡을 여러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건 생각보다 얻기 힘든 기회다.

“베토벤은 어때요? 로만.”

한편, 테이블 앞에서 대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로만과 함께 바이올린 소나타를 하기로 했는데, 상당히 기대되는지 적극적으로 이러저런 의견을 냈다.

로만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태블릿 컴퓨터에 무언가 입력했다. 그리고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음…… 예카테리나. 잠시 이 그래프를 보실까요.”

“?”

“지금까지의 회의를 간략한 큐시트로 정리한 겁니다. 시대와 장르를 따져 음악회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죠.”

“어…… 그래요?”

“그런데 이 앞에서부터 보시면 미분값이 점점 내려가죠? 여기서 저희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를 한다면 변곡점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한계 효용을 감안한다면 저희가 상승역량을 만들어 주는 것도…….”

“??? 저기요, 로만.”

“예.”

“러시아어로 해 주시면 안 돼요?”

로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예카테리나가 부탁했다. 수학과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은 그녀를 위한 작은 강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 예카테리나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난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연주회를 했을 때도 로만이 가끔 모두를 황당하게 만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진지한지…….

“타티아나.”

연습실의 정경을 구경하고 있는 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웃으며 뒤돌자, 막 회의를 마친 에르네스트가 잔뜩 피곤이 서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죽는 줄 알았네…….”

“아하하,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나요?”

“두 번째로 나가기로 했어. 너는? 타티아나.”

“전 아까 콘서트 디렉터님이 뒤쪽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음…… 그래?”

난 콘서트 디렉터 알렉세이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큰 문제가 없는 이상 그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내 개인 연주는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상관없기도 했고.

에르네스트는 생각했던 대로 안 되었다는 표정이다.

“난 솔직히 우리 듀엣 앞쪽에 붙였으면 했는데. 그렇게는 안 됐네.”

그는 우리가 각각 솔로 무대를 갖고, 바로 뒤에 듀엣으로 마무리하는 그림을 원했던 모양이다.

스포트라이트를 최대로 받을 수 있는 구성이겠지만, 난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는다.

“대신 듀엣은 가장 좋은 순서를 받았잖아요? 전 만족해요.”

“나도 만족해.”

우리 듀엣 무대는 자정 인터미션에 가까운 순번이었는데, 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바로 다음이었다.

초대형 오케스트라의 연주 직후에 바로 우리의 듀엣을 내보내는 건 부담감이 크다며 세르히가 우려를 표하기도 했었지만, 알렉세이는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며 믿어 주었다.

나도 에르네스트도 듀엣 무대의 순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곡만 완벽하면 되겠지.”

에르네스트가 의자를 기울이며 말했다.

순서는 정해졌다. 굉장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가 그 기회를 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어요.”

완벽이란 말을 쉽게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난 혼자서 할 수 없는 연주를 그와 함께 한다면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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