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81화 (381/1,277)

##  381화

4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니 기진맥진해졌다.

그 자리에 있을 땐 몰랐는데 긴장이 풀리고 나니 새삼 굉장한 자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클래식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그들의 에너지를 정면으로 만끽하고 왔으니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

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지쳤음에도, 난 계속해서 음악에 대한 생각만 했다.

세르히가 보여 주었던 타건과 무게감. 예카테리나의 세련된 음색. 아르템의 자작 소나타, 밀리차의 독자적인 음악성.

시간으로는 순간이지만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뇌리에 꽂혀 남아 버린,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저마다 소리들을 뽐내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인상적이고 매력 만점인지라 무시하거나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난 차로 에르네스트를 집에 내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음악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허벅지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피아노 앞에 앉지 않으면 더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난 빅토르와 소로킨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뒤 빠른 걸음으로 저택에 들어섰다. 일단 가방을 방에 던져두고 손만 대충이라도 씻은 다음에 곧장 별관으로…….

“이제 오십니까?”

“예고르!”

로비에 서 있던 예고르가 날 맞이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순간 머릿속을 헤집던 음악들마저 잠잠해졌다. 난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예고르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난 그가 로비에서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오늘 출발하기 전에 듣기론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도 저녁을 밖에서 드신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일가족 모두가 늦으니 기다렸던 걸까.

“회의를 마치고 나니 이 시간이네요. 조금 늦었죠? 아버지는요?”

“아직 귀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일이 많으신가 보네요…….”

“연말이다 보니.”

저녁 8시가 넘는 지금까지 회의를 한 나도 바쁘게 하루를 보냈지만, 아버지는 그런 나보다 훨씬 바쁘신 것 같다.

막연한 걱정이 조금 들었다. 전화라도 하고 싶은데 혹시 중요한 대화를 하시는 중에 방해가 될까 싶어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문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예고르가 손짓했다.

“아무튼…… 날이 차니 어서 들어오시죠. 식사는 않으신 것 같으니 바로 드미트리에게 준비시키겠습니다.”

순간, 잠자코 있던 음악들이 날뛰었다. 난 계획이 살짝 어긋났음을 깨달았다.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식사가 아니었다. 그저 당장 피아노 앞에 앉고 싶을 뿐이다. 무언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당장 쏟아 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예고르를 앞에 두고 식사를 뒷전으로 하겠다고 했다간 그에게 얼마나 혼이 날지 모른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잘 알면서도 내 고집을 말하는 건 상당히 철없는 짓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아가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지금 하시죠.”

예고르는 굉장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다가 변명하듯 말하자 무언가 알아차린 것 같다.

한참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아버지가 안 계셔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지금, 저기…….”

“혹시나 식사를 거르시고 지금 당장 별관으로 가서 연습을 하시겠단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제가 그렇게 알기 쉽나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예고르는 내 생각을 짚어 냈다.

뭔가 숨기고 할 겨를도 없었다. 내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자 예고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디 제 예상에서 벗어나셨으면 좋겠군요.”

“……죄송해요.”

예상에서 벗어나 달라는 건 예고르가 준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결국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예고르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유리 님이 얼마나 걱정이신지 아십니까?”

“아, 알고 있어요.”

“연주자는 몸 관리도 잘해야 한다고 아가씨 스스로도 몇 번이나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알고 있어요…….”

자기관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내 의무이기도 했다.

얌전히 예고르가 바라는 대로 따르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피로와 추운 날씨로 살짝 굳어 있는 몸을 따뜻한 물로 풀고,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하면 예고르도 안심하고 나도 나쁠 것이 없다.

시간이야 길게 소요되어 봐야 1시간 남짓. 연습을 하고 싶다면 그 후에 하면 된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1시간을 못 참아서 예고르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지금…… 저한텐 피아노가 필요해요. 1시간…… 아니, 10분이라도요.”

“…….”

“머릿속에 맴도는 이 음악들만 정리하고, 식사하러 갈게요.”

내겐 따뜻한 목욕물과 맛있는 식사보다, 차가운 피아노 건반이 우선이었다.

“안 될까요?”

“…….”

예고르가 뭐라 한들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난 막돼먹지 않았다. 그가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못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가 안 된다고 딱 자른다면 어쩔 수 없이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었는데, 예고르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마디 할 뿐이었다.

“식사를 하실 생각은 있으십니까?”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배고파요.”

“……알겠습니다.”

혹시나 설교가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난 눈을 크게 떴다. 예고르가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 줄은 몰랐다.

정말이에요? 지금 이대로 뒤돌아서 별관에 가도 되나요?

진짜 그래도 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눈치만 살피고 있자, 그런 날 보고 예고르가 피식 웃었다.

“별관에 가 계시면 제가 간단하게 준비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예?”

이왕 봐 주는 김에 내 편의를 제대로 봐 주려는 듯, 예고르가 선뜻 말했다. 난 손사래 치며 거절했다.

“아니에요.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돼요. 제가…….”

“괜찮습니다. 처음인 것도 아니고.”

할 말이 없었다. 요즘은 요리도 배우기 때문에 일부러 알람을 맞춰 놓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제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예전엔 아침 연습을 하다 보면 식사 시간을 잊을 때도 많았다.

그때 보통 날 찾으러 오는 건 나제즈다나 예고르였는데, 가끔은 내 어리광을 받아 주어서 먹을거리를 가져다주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예고르는 그때를 생각하는지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짓다가, 날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 이런 말씀 드리면 유리 님께서 경을 치시겠지만…… 전 아가씨가 별관에서 식사를 할 정도로 1초도 아까워하며 아가씨에게 주어진 시간에 집중하실 때, 전적으로 응원해 드리고 싶어지더군요.”

“예고르…….”

“물론 걱정도 많이 됩니다.”

“그, 조심할게요.”

그제야 예고르는 안심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난 가슴이 먹먹해졌다. 생각해 보면 예고르는 한 번도 내게 억지로 무언가 한 적이 없었다. 늘 걱정이 많긴 하지만, 결국은 내가 피아노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으로 도와주었다.

처음 연습실을 가졌을 때도, 쓰러졌을 때도. 그리고 중앙음악학교 입학시험 날 불안에 떨고 있을 때도 날 응원해 주었던 것은 예고르였다.

그가 다시 한 번 날 믿고 지지해 주었다.

“그럼 전 더 이상 시간 빼앗지 않겠습니다. 조금 이따가 찾아뵙도록 하죠.”

“고마워요. 예고르. 정말로요.”

이 믿음에 부응하고자, 난 그대로 뒤돌아 별관으로 향했다.

연습은 홀로 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지만, 정말로 나 혼자였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숨을 내뱉자 입김이 하얗게 올라왔다.

날씨는 추웠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

에르네스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푹 꽂아 넣고 걸었다. 진짜 추워도 너무 춥다. 지구온난화는 대체 언제 온다는 건데?

투덜거리며 학교에 도착한 에르네스트는 눈이 묻은 구두를 탁탁 털고 계단을 올랐다. 빨리 반에 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런데 빠른 걸음으로 걷던 와중, 눈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백금색의 긴 머리칼. 계단을 걷는 모습도 반듯한 그 모습은 이 학교에서 한 명뿐이다.

바로 알은체를 하기 전에 살짝 놀래 줄까 고민하던 중,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여학생이 휙 돌아보았다.

서늘한 무표정을 짓고 있을 땐 조금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 얼굴이 에르네스트를 알아본다. 그러고는 눈을 깜빡였다가 뜨니 밝은 미소가 만개했다.

“에르네스트!”

“…….”

그 미소에 에르네스트는 순간 멍해졌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올라갔던 계단을 도로 내려온 타티아나는 말이 없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이번엔 작게 인사했다. 놀랄 정도로 크게 반가워했던 것이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어……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

에르네스트는 손을 슥 들며 인사를 받았다. 아침에 이렇게 같은 시간에 등교하는 일은 잘 없었는데, 좋은 아침이긴 하다.

이제 같이 올라갈까 싶었는데, 타티아나는 움직이지 않고 묘하게 머뭇거렸다.

에르네스트가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저기, 있잖아요. 한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갑자기?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침에 보자마자 이 애가 묻고 싶어 할 만한 게 뭐가 있지?

“뭐, 뭔데?”

기대 반 불안 반으로 에르네스트가 묻자 타티아나가 앞으로 확 다가오며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흥분에 가득 찬 눈이 반짝였다.

“어젯밤에 혼자 고민해 봤는데요, 저희 후보로 두고 있었던 곡을 알레그로 직후에 편곡을 하면 어떨까 해서요. 잇단음표로 리듬을 살짝 튕겨 주듯 움직이면 곡의 다채로움도 훨씬 좋아질 것 같…… 아니, 그것보단 전체적인 화음에 무게를 거는 것에 유리함을…….”

“잠깐만, 진정해. 진정하고 말해.”

“아…….”

아무리 음악 용어에 익숙한 에르네스트라도 이렇게 말해서야 알아들을 수가 없다. 타티아나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는 중얼거리듯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니…… 하하하하.”

“?”

“피아노 이야기 하려고 했던 거야?”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네스트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아무튼…… 알았어.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지? 편곡을 하자고?”

“예……. 괜찮을까요?”

딱히 안 될 건 없었다. 레퍼런스가 정확하게 있는 것도 아니라서 여러 연주자들의 듀엣 버전이 있는 곡이었다. 편곡은 자유롭게 열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콘서트 디렉터는 자작곡도 상관없다고 하기까지 했으니 편곡을 잘만 한다면 전혀 문제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싶다고 타티아나가 적극적으로 나서 준 건 조금 놀라우면서도 기쁜 일이었다.

심지어 타티아나의 행동력은 그냥 놀라운 정도가 아니었다.

“내용에 대해서 제가 짧게 녹음해 왔는데 지금 들어 보시겠어요?”

“……녹음을 했다고? 하룻밤 사이에?”

“스마트폰으로 한 것뿐이지만요.”

“너 밤샌 거야?”

어제 회의를 마치고 귀가한 게 저녁 8시도 넘어서였다.

편곡이야 즉흥적으로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녹음을 해서 들어 보라고 할 정도라면 타티아나 성격에 꽤나 몰두해서 연구한 결과물일 것이다. 대체 간밤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뇨, 꿈에서 편곡했어요.”

“……농담이야 진담이야?”

“아무튼요, 들어 주세요. 어서요.”

“으, 응.”

타티아나는 어느샌가 이어폰을 꺼내선 에르네스트에게 내밀고 있었다. 빨리 받지 않으면 강제로 귀에 꽂아 버릴 기세였다.

그런데 이거 타티아나가 쓰던 것 아닌가? 그냥 써도 되는 거야?

갑자기 든 복잡한 생각은 타티아나가 다시 한 번 눈빛으로 강요하자 사라졌다. 에르네스트가 이어폰을 귀에 꽂았고, 타티아나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재생시켰다.

음질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이 음질을 감안해서 페달을 아끼는 깔끔한 연주를 했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듀엣곡의 완성도를 높여서 조금 더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지 엄청나게 고민한 흔적이 가득한, 타티아나의 시간과 정성이 느껴지는 연주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에르네스트가 조용히 듣는 사이, 타티아나가 소곤거렸다.

“대위법적으로 오류가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하네요…….”

대체 이정도 결과물을 내놓고 뭘 불안해하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듣기엔 하나도 안 틀렸어.”

“정말요? 고마워요.”

타티아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지금 감사를 표해야 할 건 자신 쪽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