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화
며칠 동안 학교 내에서 나와 에르네스트는 거의 함께 움직였다.
반에서 같은 수업을 받고, 같은 연습실로 가서 듀엣 연습을 하고 연구를 했다. 아예 독주곡 연습은 각자 집에서 하기로 하고 학교에선 듀엣 연습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레슨도 같이 받았다. 우리 레슨 시간엔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 두 분이 함께했다. 덕분에 레슨 시간은 두 배로 길어졌고, 효율은 네 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교내에서 하는 수업, 연습, 레슨을 모두 같이 받으니 에르네스트와 함께 하는 시간은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스터디 등에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은 줄어들었는데, 연말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그런지 휴게실 자판기 앞에서 리처드와 류보비를 만났을 때, 류보비와 나는 한참을 못 보다가 재회한 사람들처럼 반가워했다.
“언니, 요즘 연습하느라 힘들죠.”
이미 교내에 나와 에르네스트의 듀엣 무대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류보비 역시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요즘 바쁘다는 것을 이해해 주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며 웃었다.
그런 우리를 보던 리처드가 손으로 자판기를 톡 치며 물었다.
“너네도 뭐 마실래?”
나와 에르네스트에게 묻는 말이었다. 음료수를 사 주려는 모양이다. 난 방금 전에 차를 마셨기 때문에 사양했다.
“아뇨, 괜찮아요.”
“난 이온음료.”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뻔뻔하게 음료수를 요구했다. 이런 모습도 참 예전을 생각하면 많이 나아진 거긴 한데……. 난 묘한 감상을 느끼며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리처드는 별말 없이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는 음료수를 뽑아 에르네스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그걸 받아들자마자 인상을 팍 썼다.
“야, 이게 이온음료냐? 러시아어 못 읽어?”
“깜빡했네. 그냥 마셔. 어차피 내가 사는 건데.”
역시나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뻔뻔한 에르네스트에게 맞서 리처드 역시 뻔뻔하게 나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질 수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아, 그래. 잘 마실게. 원래 커피 마시려고 했어. 네가 이럴 줄 알고 바꿔 말한 거야.”
“잘됐네. 그거 꼭 끝까지 마셔라? 일부러 달짝지근한 거 뽑았으니까.”
“…….”
“뭐.”
리처드가 비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르네스트는 신경질적으로 캔을 탁 따서는 한 모금 마시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는 단것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이런 유치한 기 싸움이 얼마나 갈련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수십 년 후에도 지금과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좋은 예감인지 나쁜 예감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예전엔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보며 불안해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을 뿐이다.
조금 흥미롭게 생각하며 보고 있는데, 리처드가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하나 더 뽑더니 내 쪽으로 내밀었다.
“타티아나, 네 거.”
“전 괜찮은데……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더 사양하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서 받았다. 난 캔 뚜껑을 손톱으로 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바로 동전을 꺼내서 캔 따개로 사용했다.
능숙한 내 모습이 재미있게 보이는지 리처드가 바라본다. 난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간단히 류보비에게 마실 걸 사 주려고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난 슬쩍 고개를 틀어 리처드 뒤편을 보았다. 그곳엔 미리 뽑아 둔 캔들이 몇 개 모여 있었다.
뭔가 익숙한 상황이다.
“리처드 혹시…….”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야.”
또 졌나요? 라고 물어보면 그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류보비는 자비가 없었다.
“리처드 오빠 진짜 허당이에요.”
“조용히 해라?”
“사실인데요 뭐.”
“…….”
리처드가 으르렁거렸지만 류보비는 눈도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진짜로 리처드가 화를 내거나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듯한 반응이었다.
리처드의 첫인상은 차갑고 무관심해 보이지만, 사실 그처럼 사려 깊고 착한 사람도 드물었다. 류보비는 이제 리처드의 성격을 아는 것이다.
그간 류보비가 리처드를 얼마나 놀려 먹었을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약간 안타깝게 바라보자 리처드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곤 대뜸 말했다.
“아무튼…… 네가 없어서 힘들어. 타티아나.”
“……예?”
이젠 날 놀려먹겠다는 건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당황스러워했겠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리처드가 이어 말했다.
“나랑 정정당당하게 내기를 할 만한 상대는 너뿐이었는데.”
“그 이야기예요?”
행운의 신에게 미움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이 없는 리처드와, 모든 게임에 전혀 재능이 없는 내가 붙으면 꽤 비등비등한 상황이 나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까 살짝 화난다.
짐짓 눈썹을 치켜세우자 그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언제 돌아올 거야?”
“그게…….”
음악회가 끝날 때까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대답하려는데, 잠자코 있던 에르네스트가 내 대신 말했다.
“연말까진 얄짤없어.”
그가 빈 깡통을 찌그러뜨리곤 쓰레기통으로 휙 던졌다.
“연습하느라 바빠. 스터디는 당분간 너희끼리 해야 할걸.”
“뭐, 그렇겠지.”
리처드는 꼭 시간을 내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는 듯 싱겁게 웃었다.
“어쨌든, 평소 차분한 타티아나 네가 있어야 아나스타샤랑 발렌티나도 덩달아 조금 차분해지는데. 요즘 죽겠네 진짜.”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는데, 그냥 그렇다고.”
사실 우리 스터디 그룹은 내가 친구들을 끌어모아 만든 그룹이나 다름없었다. 그간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내가 없더라도 잘 지내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약간 책임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리처드는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냥 연습이나 잘해. 큰 무대니까.”
“힘낼게요. 아…… 리처드는 연말에 영국에 잠깐 가 계신다고 했었죠?”
“어. 텔레비전으로 볼게. 뭐, 잘됐네.”
“……잘되다니요?”
리처드는 농담조로 말했다.
“안 팔릴 티켓도 아닌데, 그간 공짜 티켓 너무 많이 얻어 본 것 같아서.”
공짜 티켓보다 중요한 건 연주회를 보러 시간을 내주는 것이라는 걸 그도, 나도 잘 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건 농담으로 이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싶어 하기 때문이겠지. 난 그의 의도에 따라 주기로 했다.
“그럼 이번엔 돈 주고 사 주세요. 저 티켓 이거 다 팔아야 해요.”
“……티켓은 사고, 보는 건 영국에서 보라고?”
“예.”
“돈 없어. 오늘 음료수 산 걸로 개털됐어.”
“아하하하.”
언제나처럼 격의 없는 농담엔 농담으로. 리처드와 이런 면에선 참 잘 맞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살짝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나스타샤나 챙겨 줘.”
그가 아나스타샤의 일을 신경 쓰는 걸까. 잘 모르겠다. 난 내가 보고 있지 않을 때의 아나스타샤는 조금 날카로운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리처드가 이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의 말을 허투로 들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를 위한 티켓은 준비되어 있기도 했고.
리처드는 이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캔을 챙겼다. 손이 얼마나 큰지 한 손으로 세 캔을 들어올렸다. 저게 된다는 게 부럽다.
“아무튼, 난 간다. 가자, 류보비.”
“…….”
그런데 류보비는 리처드를 뒤따르지 않고 내 쪽을 힐끗거렸다.
류보비를 오래 봐 온 나는 그 표정을 잘 안다. 무언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을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엇이든 좋으니 말해 보란 뜻으로 살짝 웃었더니 류보비가 말했다.
“타티아나 언니.”
“예?”
“저 두 분 연습하시는 거 옆에서 견학하면 안 돼요?”
학교에 소문이 나 있다 보니 직접 구경하고 싶은 것 같았다.
흥미본위라 해도 류보비라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라서 눈짓으로 에르네스트에게 허락을 구했다.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옆에서 봐도 괜찮다고 말해 주려고 하는데, 리처드가 툭 던지듯 말했다.
“류보비. 너 성악과잖아?”
“성악과면 피아노 연습 보면 안 돼요?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있을 건데요.”
류보비는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 대신 스터디 끝날 때까지 안 돌아오면 네 책이랑 가방은 아나톨리한테 맡겨 놓는다?”
“안 돼요! 걔를 어떻게 믿고요. 오빠가 맡아 줘요.”
“뭐? 싫은데.”
“제발요, 한 번만요.”
“……진짜 처음이니까 봐준다.”
결국 이번에도 져 준 건 리처드 쪽이었다. 아무튼 착한 건 어디 가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캔을 들지 않은 왼손을 휘적대며 인사했다.
“그럼 간다.”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적어도 연말에 그가 영국으로 가기 전에 스터디에 한 번쯤 나가 보긴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리처드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우리도 갈까. 류보비도 같이.”
“네!”
견학인 한 명과 함께 우리는 연습실로 향했다.
***
아예 연말까지 쭉 빌려 놓은 연습실엔 피아노 두 대가 정확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우리는 코트를 벗어 놓고,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았다.
류보비도 있으니 다 같이 차라도 한잔 하면서 잠시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이미 음료수도 마셔서 목이 마르거나 하진 않다.
그보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한 순간이라도 더 음악을 나누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연습 시작할 거예요, 류보비.”
“아, 네. 얌전히 있을게요.”
“후후…… 그래도 지켜보는 분이 계시니까 조금 긴장되네요.”
류보비는 조용히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딱 붙이고는 진지한 눈빛을 했다.
난 웃으며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가 말했다.
“바로? 어디부터?”
“아침에 말씀드렸던 그 부분부터요. 약간 수정한 부분이 있긴 한데…… 해석은요?”
“그대로 너한테 맡길게. 대충 아니까.”
“그럼 먼저 시작할게요. 따라와 주세요.”
그리고 난 곧장 건반 위로 손을 떨어뜨렸다.
이미 투 피아노 듀엣으로 나와 있는 곡이지만, 이전에 아르템이 자작 피아노 소나타를 꺼내는 것을 보고는 나와 에르네스트의 음악을 선보이고 싶어서 편곡을 하기 시작한 곡이다.
난 화성학 점수가 괜찮은 편이고 작곡 기초, 편곡 기초도 공부하긴 했지만 그래도 학생 수준이었다.
이 편곡이 음악회 무대에 올릴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갖추려면 선생님들의 도움과 에르네스트와의 호흡, 그리고 많은 연습과 피드백이 필요했다.
그간 해 왔던 기억들을 되살리며 한 번 했던 실수나 수정점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
에르네스트는 거의 내 마음을 읽는 사람처럼 따라붙었다.
큰 흐름에 절대 늦지 않으면서, 아주 작은 변화도 섬세하게 놓치지 않는다. 난 그와 듀엣 연주를 하면 할수록 그가 얼마나 천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정말 가진 바 모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파트너인 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전신에 다시 집중력을 쏟아붓는다.
서늘한 무언가가 머리에서부터 뒷목을 타고 내려와 등 전체에 퍼지고, 손끝까지 스며들었다.
난 보다 완벽한, 우리들의 음악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와…….”
연주가 끝난 후, 류보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어땠어요? 류보비.”
“저, 저는 성악과잖아요? 그러니까 피아노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어떤지 말해선 안 될지도 모르잖아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류보비가 말했다.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였다.
“그런데도 말할게요. 최고였어요!”
“고마워요.”
칭찬에 짧은 묵례로 답하자 류보비가 한층 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들썩거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거기에 에르네스트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예?”
류보비가 막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꼭 연주에 대한 문제점을 한 가지 이상 말해야만 나갈 수 있거든.”
“……?”
“우린 여태 그래 왔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이 방에서 연주를 마치면 서로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파헤쳐서 문제점을 끌어내는 데에 전력을 다했으니까. 사실 하루에 한 개가 아니라 적어도 수십 개씩은 짚어냈던 것 같다.
류보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 어,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한 번 더 들어 봐. 이번엔 비판적인 시점으로.”
“비판적인 시점을 어떻게 가져요?? 그리고 전 성악과라니깐요?”
“그런 건 상관없어. 음악가라면 할 줄 알아야 할 거야.”
에르네스트는 말하면서도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웃었다. 류보비의 반응은 그만큼 귀여웠다.
류보비가 살려 달라는 듯 내게 눈빛을 보냈지만 난 이번엔 에르네스트를 따르기로 했다.
“부탁할게요. 류보비.”
“언니까지!”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듯 류보비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얼굴을 든 그녀의 얼굴은 꽤 진지한 음악가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들어 주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류보비도 음악가로서 자존심을 지니고 있는, 훌륭한 음악가였다.
난 웃으며 손을 들었다.
“자, 일단 수정했던 부분을 조금 더 화려하게 바꾸면서 다시 해 볼까요?”
“그래.”
에르네스트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피아노를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