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83화 (383/1,277)

##  383화

연주를 마치고, 에르네스트는 안절부절못하는 류보비를 바라보았다.

연주를 비판적으로 들어 보라고 한 건 진심이기도 했지만 반은 장난이었다.

피아노과도 아니고 성악과 2학년을 앉혀 놓았으니, 남들이 보면 어린애를 괴롭히는 거냐고 묻겠지만 에르네스트는 딱히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류보비가 정말 모르겠다고 한다면 모르는 거고, 뭔가 의견을 낸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그뿐이었다.

“아…… 그러니까요……. 그걸 뭐라고 하지? 어…….”

그런데 류보비는 잔뜩 긴장했는지 횡설수설하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뭔가 그럴싸한 레토릭으로 의견을 내고 싶은 듯한데,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가 보기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타티아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기탄없이 편히 말씀해 주세요. 류보비.”

“기탄? 그게 뭐예요?”

류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너부터 편하게 말해 타티아나.”

“……예.”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타티아나는 대체 집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가끔 고전 문학에서나 볼 법한 어휘들을 쓰기도 했다.

물론 처음에나 이상했지 이젠 타티아나의 매력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라,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이젠 좀 편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그냥 지금처럼 대해 줘도 좋겠다는 이중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튼 지금은 류보비의 말을 들어 볼 때였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 줘.”

“그게 제일 어려워요…….”

“괜찮아.”

에르네스트가 다시 한 번 긴장을 풀어 주자 그제야 류보비는 조심스레 말했다.

“살짝 숨이 찼어요.”

그 말만으로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가 조금 더 설명해 달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류보비가 이어 재잘거렸다.

“그게 있잖아요? 시작하고 조금 나중에 타티아나 언니 혼자서 하는 부분 있죠? 노래하는 것 같은 부분이요. 그런데 만약 그 부분을 따라 부르려면 숨이 찰 거 같아요.”

“이 부분 말인가요?”

조금 길어진 설명을 듣자마자 타티아나가 반응하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피아노를 쳤다. 그야말로 휘리릭 쳐 내는 듯 가벼운 몸짓이었지만, 정확하게 류보비가 말한 부분이었다.

류보비가 박수를 짝 쳤다.

“네! 거기요!”

“숨이…….”

“다시 한 번 해 주세요.”

타티아나가 약간 고민하자 류보비는 재차 요청했다. 어디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건지 명확히 알려 주고 싶은 듯하다.

“…….”

에르네스트는 흥미롭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류보비가 바로 가사 없는 멜로디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피아노 소리는 다성화음으로 꽤 복잡하게 들리는데도 정확한 노래였다. 공부를 꽤나 열심히 했나 보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가 길어지고, 노래도 길어졌다. 류보비는 몇 소절을 자연스럽지 못하게 억지로 이어 부르다가 숨을 할딱이기도 했다.

일반적인 기악곡의 프레이징을 바로 이렇게 따라 부르면 숨이 차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지금 연주하는 선율은 노래로 했을 때 숨이 차면 안 되는 부분이다. 그야말로 사람의 노랫소리처럼 들려야 하는 까닭이다.

“잠시만요. 아아.”

문제를 파악한 타티아나가 류보비에게서 이어받아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평소 허밍하는 습관이 없는 타티아나가 입을 열면 조금 신비하게 보이기도 한다.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같은 구간을 두어 번 반복한 타티아나가 다시 몸을 돌렸다.

“확실히…… 그렇네요. 원곡이 훨씬 자연스럽네요. 편곡이 기악적 문법으로는 틀리지 않았지만, 이 부분은 성악적 프레이징에 따르는 게 옳겠어요.”

“그렇게 해.”

“이 부분은 짧게 자를게요.”

그리고 타티아나는 바로 악보를 꺼내더니 펜을 들어 그 위에 슥 그었다.

그 모습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류보비였다.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타티아나가 준비해 온 편곡에 곧바로 수정을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자, 잠깐만요! 정말로요? 지우신다고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더니 즉답했다.

“당연하죠.”

그녀는 경악하고 있는 류보비를 보고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이 곡엔 류보비의 노랫소리도 들어가 있는 거랍니다?”

“네?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어디 있나요?”

타티아나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펜으로 악보를 쿡쿡 찍더니, 에르네스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죠?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장난이나 좀 쳐 볼까 하다가 그냥 이번엔 칭찬이나 해 주기로 했다.

“음악가의 비판적인 시점으로 고쳐야 할 부분을 확실히 짚어 냈네, 류보비.”

“……아.”

“고마워.”

진지한 감사에 류보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말하는데, 목소리가 중얼중얼 기어들어 간다.

“저, 저야말로요…….”

에르네스트는 오늘 류보비가 견학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무엇이라도 얻어 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저 작은 애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악가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타티아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인지, 한층 들뜬 목소리로 요청했다.

“다시 한 번 해 볼까요?”

“그래.”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며 다시 손을 들어 올렸고, 같은 듀엣 연주가 한 번 더 시작되었다.

에르네스트는 또 달라진 타티아나의 연주에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짧은 부분을 살짝 고쳤다고 해서 그 부분만을 신경 쓰면 아주 미세하게나마 전체적인 뒤틀림이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타티아나는 전체적인 음악을 어떻게 더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그려 나가는 것이 어떤 그림인지, 함께 피아노 소리를 엮어 가면서 에르네스트는 너무나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듀엣 연주는 이전보다 한층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들렸다.

연주를 마치고, 에르네스트가 숨을 내뱉으며 류보비를 바라보았다. 류보비는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없어요. 이젠. 진짜로요.”

에르네스트는 픽 웃었다.

“아까 하나 짚어 냈으니까 봐줄게.”

“가도 돼요?”

진짜 누가 보면 붙잡아 놓고 괴롭히는 중인 줄 오해하겠다.

에르네스트는 괜한 소리 듣기 전에 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곤 손을 휙 저었다. 어쨌든 오늘 하나 도움을 받았으니 나중에 과자라도 사 줘야 할 것 같다.

류보비는 눈치를 보며 일어서선 문가로 향하더니, 휙 돌아서서 말했다.

“언니랑 오빠 듀엣…… 분명 연주회에서 최고일 거예요. 분명히요. 전 더 방해하지 않고 갈게요. 연습 열심히 하세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류보비.”

타티아나가 따뜻하게 웃으며 배웅했고, 류보비는 연습실에서 떠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잠시 숨을 돌리면서, 에르네스트가 킥킥 웃었다.

“살짝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진짜 한 건 할 줄은 몰랐네. 류보비 쟤 감각 있어.”

“예. 재능이 넘치죠.”

타티아나는 류보비와 실력을 꽤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친한 동생이 칭찬받자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양손을 모으고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문득 묘한 말을 했다.

“덕분에 저 같은 사람은 참 많은 도움을 받네요.”

“……무슨 소린데? 갑자기.”

“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목만 스르르 돌려 에르네스트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빛. 하지만 옅은 웃음이 편안하게 감돌고 있다.

타티아나가 천천히 말했다.

“작년에 있죠? 전 음악가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였어요. 연주도 선곡능력도 엉망진창이었죠. 편곡도 할 수 없었고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말은 조금 섬뜩하게 들렸다.

작년,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우울한 눈빛을 하고 있던 타티아나는 잠깐 눈을 떼면 스러져 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신경이 쓰이곤 했다.

에르네스트는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잠시 그때를 떠올리는 사이, 타티아나가 이번엔 정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후후.”

“…….”

그래도 프로코피에프로 날 이겨 먹지 않았느냐고 농담조로 대화를 돌려 보려고 했던 에르네스트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과 웃음을 보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지금 타티아나는 음악가로서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정말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듯했다. 그건 에르네스트가 늘 바라던 모습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한 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르네스트는 싱겁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부탁을 왜 해. 어차피 우리 곡인데.”

연습은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

콘서트 디렉터 알렉세이가 팔짱을 풀고 말했다.

“방금 연주하신 곡이 직접 편곡한 곡입니까?”

“예. 제 파트너와 함께요. 그리고 저희 지도 선생님께서도 도움을 주셨어요.”

중요한 분에게 연주를 막 보인 참이라서 조금 긴장한 채 대답했다.

연말 음악회 두 번째 미팅이었다.

다른 음악가분들은 각자 곡들을 벌써 엄청난 수준으로 끌어올려 왔고, 나 역시 솔로곡과 듀엣곡을 최선을 다해 준비해 왔다.

솔로곡은 그래도 그간 꽤 오래 연습해 왔던 곡이라 괜찮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와 상의하에 편곡한 이 듀엣곡이 제대로 먹힐진 알 수가 없었다.

“…….”

콘서트 디렉터는 연말이라는 테마에 맞춘 클래식이기만 한다면 직접 작곡한 곡이든 편곡한 곡이든 상관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정적으로 음악이 엉망이라면 절대 무대에 못 올리게 할 것이다.

살짝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가끔은 저 자신감이 부럽다.

잠시 후,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알렉세이가 눈에 힘을 풀며 말했다.

“상당히 괜찮군요.”

“정말이신가요?”

그는 손가락을 들어 날짜를 세는 듯 까딱이며 말했다.

“이 선곡을 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짧은 시간 동안 대단하군요. 제 판단으로는 이 정도 완성도라면 무대에 올려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콘서트 디렉터의 입에서 떨어진 무대에 올려도 된다는 말은 진지하게 받아들여도 될 만했다. 어설프게 해서 저런 말을 듣긴 어렵다.

난 조금 더 안도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에르네스트는 이럴 줄 알았다며 낮게 웃었다.

알렉세이가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이어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악보를 제작해서 위원회에 올려야 합니다만…… 시간도 없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군요.”

“어떻게 할까요?”

“조금 이따가 한 번 더 연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걸 녹음해서 제출하는 것으로 하죠. 아마 충분할 겁니다.”

이렇게 큰 음악회에 올릴 곡이니 제대로 된 악보를 만들어서 허가를 받는 게 올바른 순서인 것 같았지만, 알렉세이는 자신의 재량으로 처리해 보겠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상당히 융통성 있는 분이었다.

허락이 떨어지고 나자 다른 음악가분들이 축하해 주었다.

“그 곡이면 충분하지.”

“요즘 애들은 편곡도 이렇게 잘하나……?”

“센스 있더라.”

그리고 피아니스트 아르템도 우리 곁에 다가왔다.

“아주 좋던데?”

“아르템 덕분이에요.”

“……어? 내가 뭘?”

아르템은 내가 갑자기 그에게 공을 돌리자 많이 당황스러워했다.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번 회의 때 직접 작곡하신 소나타를 연주하셨죠? 정말 인상 깊었어요.”

“내 소나타?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런 게 아니어도 편곡이야 했겠지. 이렇게 잘했는데.”

“아니에요. 전 아르템 덕분에 그날 밤 편곡을 결심했거든요.”

콘서트 디렉터가 준 자유를 열정적으로 쟁취하고자 한 아르템의 모습은 내게 상당히 기분 좋게 다가왔었다.

물론 그처럼 직접 작곡한 소나타를 올리거나 철저하게 악보에 맞춰야 할 솔로곡에 손을 대는 건 엄두도 안 났지만, 이미 몇 사람의 음악가의 편곡을 거쳐 상당한 자유도가 주어져 있는 듀엣곡이라면 약간의 조정을 통해 나와 에르네스트가 보일 음악적 완성도를 더더욱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음악. 시간도 없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편곡을 시도해서 결과물을 얻어낸 건 그 때문이었다.

“…….”

아르템은 잠시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첫 미팅 때, 로만이 왜 피아니스트들은 타티아나 널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지……. 그땐 실력을 보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로만은 실력만 놓고 말한 게 아니었구나.”

로만이 모두를 자극하듯 날 소개했던 건 상당히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게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아르템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연주에 짧게 코멘트 줄 게 있는데, 들어 볼래?”

“아! 정말이신가요?”

이런 소중한 의견은 결코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난 조금이라도 더, 우리의 듀엣곡에 도움이 되도록 아르템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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