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화
거의 전쟁터였던 첫 번째 회의와 달리 두 번째 회의는 꽤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순번과 프로그램도 거의 다 정해졌고 며칠 사이 연습도 상당히 해 온 덕분이었다.
이젠 각자 연주를 정확하게 맞춰서 큐시트를 정렬하는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4시간이나 되는 거대 음악회다. 사이사이 5번이나 되는 인터미션엔 텔레비전으로 방영될 다큐멘터리나 클래식 음악 영상 등이 준비되어 있었고, 저녁에 시작해서 자정엔 카운트다운을 앞두고 정확하게 인터미션을 가져야 하기도 했다. 할 일이 상당히 많다.
때문에 음악회의 큐시트는 말 그대로 초 단위로 아주 정교하게 짜여 있어야 했는데, 우리 음악가들에겐 이것 또한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팝 음악이라면 MR이 있으니 거기에 맞춰서 1초도 어긋나지 않게 콘서트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클래식 연주자들에겐 그런 게 없다. 그렇다고 메트로놈을 들고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알아서 연습한 대로 잘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 어때요?”
“좋아.”
다행히 나나 에르네스트는 박자 감각이나 시간 감각, 그리고 기억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무대에 올라가면 연주 속도가 자기도 모르게 빨라지는 연주자들이 있곤 한데, 우린 연습할 때나 무대에서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둘 중 한 명만 제대로 템포를 놓치지 않는다면 큰 문제 없을 것이다. 서로를 믿고, 이 템포로 하면 되겠다고 머리에 새겨 둘 때였다.
옆에서 애쉬그레이 머리칼이 흐느적거리며 날아들더니 책상 위로 푹 엎어졌다.
책상 위를 기는 듯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카테리나였다.
그녀는 며칠 전 나와 연락처를 교환하고는 이러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주고받았고, 이젠 그녀는 날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로만 좀 어떻게 해 줘…….”
“……?”
그래도 이런 부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만을 어떻게 해 달라니?
멍하니 내려다보자 예카테리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너도 그랬어?”
“무슨 말씀이신가요?”
“로만이 막 엉뚱한 말 하고 그랬어?”
사실 로만이 하는 말들 중 엉뚱한 건 없었다. 되레 너무 정확해서 문제였지. 하지만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엉뚱하게 비치곤 한다는 건 분명 사실이었다.
“약간요……?”
그래도 난 애매하게 대답했다.
살짝 주위를 살피니 로만이 자리에 없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한 죄책감이 들게 하는 일이었다.
예카테리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조금 그녀가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내가 아는 로만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털어놓은 말들은 진짜 황당했다.
“아니…… 합주 잘 하고 피드백하다가 말고 갑자기 얼굴뼈 이야기 같은 건 왜 꺼내는 거야? 무섭게?”
“예?”
“사람의 표정이 다양하게 바뀌어도 얼굴뼈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 대체 무슨 소리야?”
예카테리나가 로만이 없는 사이 불만을 표하는 게 이해가 갈 정도였다.
파트너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로만?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로만을 변호하고 싶어서, 난 그녀와 오해를 풀 수 있는 해답을 찾을 수 있게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말 그대로이지 않나요? 표정은 근육으로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아, 턱이 움직이긴 하네요.”
“아니!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합주하고 나서 난데없이 나온 말이라니까? 그게?”
“그, 글쎄요……?”
거의 공포에 떠는 예카테리나를 보며 난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태평한 모습으로 툭 던지듯 말했다.
“사람의 표정처럼 다채로운 음색을 내더라도…… 그 표정 아래의 뼈는 그대로인 것처럼 음악을 이루고, 지탱하고 있는 기본은 흔들리면 안 된다는 뜻이겠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가는 슬퍼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온갖 감정을 청중들에게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표현할 때도 음악적 구조가 흔들리지 않는 깔끔하게 정제된 상태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건 내가 평생을 배워 온 피아노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비유로 되어 있지만 이해하고 나니 똑같은 의미였다.
예카테리나 역시 이제야 알겠다는 듯 책상을 팡 치며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그런 뜻이라고? 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대단하세요.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비스듬하게 의자에 기댄 그대로 말했다.
“굉장히 직관적이고도 훌륭한 비유라 생각하는데요.”
“그래, 난 바보라서 못 알아들었네요.”
“바보인 건 상관없으니까 연주에 있어선 로만이 한 충고를 제대로 듣는 게 어때요.”
“뭐가 상관없다고!?”
첫 만남이 그리 순탄치 못했던 탓인지 예카테리나와 에르네스트는 지금도 사실 사이가 그리 좋다고 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나랑은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을 보면 예카테리나가 뒤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아무리 봐도 에르네스트 쪽에……
“버스 왔어.”
삐딱한 에르네스트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연습실 문이 열리며 로만이 들어왔다.
예카테리나가 눈을 번뜩이며 일어섰다.
“드디어 드레스 보러 가네!”
오늘 미팅 일정엔 회의뿐만 아니라 음악회에 입을 의상을 고르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연주회라면 대충 테마나 분위기만 상의해서 각자 골라도 되겠지만, 이 음악회는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우리 연주자들의 의상도 어느 정도 프로그램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들었다.
때문에 음악회 진행위원회가 고른 의상숍으로 열다섯 명이 넘는 인원 전부가 모두 다 같이 가야 했다.
그간 연주회를 하면서 드레스를 맞춘 적은 많아도 여러 명이 움직이는 일은 또 처음이라서 기대하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먼저 일어섰다. 그가 중얼거렸다.
“턱시도 또 하나 늘겠네. 필요 없는데.”
“예?”
“아, 타티아나 넌 모르는구나. 오늘 맞출 옷은 연주회 끝나고도 우리 거거든.”
역시 음악회를 해도 정부에서 하는 음악회를 하니까 이런 씀씀이는 시원시원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멀거니 물었다.
“꽤 비싼 옷일 텐데, 받으면 좋지 않나요?”
“……넌 가끔 정말 알 수가 없네.”
에르네스트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
버스를 타고 도착한 의상숍은 신아르바트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다.
척 봐도 굉장히 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평범한 옷들을 취급하는 곳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전에도 연주회 때 드레스를 맞추러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드레스숍을 몇 번 찾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큰 곳은 처음인 것 같다.
알렉세이를 필두로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가게 안은 직원으로 보이는 몇 사람 빼고는 비어 있었다.
“문화부의 예약으로 오신 분들이십니까?”
바로 정부기관의 이름이 나왔다. 난 나도 모르게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세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직원과 이야기하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잠깐 갈라지시죠. 여성분들은 저쪽 직원 따라서, 남성분들은 이쪽으로.”
같은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을 순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이따 뵈어요.”
“응.”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렉세이를 따라갔다. 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른 연주자들을 따라 드레스룸 쪽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몇 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가운데에 서 있던 직원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오늘 여러분을 도와 드릴 블라다입니다. 음악회 테마는 미리 전달받았으니 원하시는 디자인이나 컬러, 패브릭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면 참고해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음악회 테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연주자 개인의 취향대로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엔 드레스를 고를 때 거의 항상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었다. 때문인지 다른 분들과 함께 있는 지금도 어쩐지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혼자라고 해서 가만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나 나제즈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순 없었다.
눈치를 보니 각자 자유롭게 흩어져서 이 방에 가득한 드레스들을 고르는 분위기였다. 나도 어색하지 않게 한쪽으로 향했다. 바로 직원이 따라붙어 설명했다.
“이쪽에 있는 건 저희 숍에서 자랑하는 오트쿠튀르 라인업입니다. 테마에 적합한 드레스들로 모아 두었으니 어떤 것을 택하셔도 좋을 겁니다.”
“아…… 그런가요.”
이런 류의 맞춤 드레스야 몇 번 맞춰 봐서 익숙하다. 이 샘플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치수를 잰 다음 똑같이 만들어 준다.
몇 벌 살펴보다가 옆으로 향했다. 직원이 말했다.
“이쪽은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 컬렉션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드레스들이죠.”
기성복이라 할 수 있는 드레스들도 유명 메이커라면 이렇게 파는 모양이다. 기호에 따라 정말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 것 같다.
옆을 보니 1루블도 내지 않고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맞춰 갈 수 있다는 데에 흥분한 예카테리나가 벌써 몇 벌이나 드레스들을 골라 빼 놓고 있었다.
난 고뇌 끝에 한 벌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은 조금 아닌 것 같고, 빨간색은 죽어도 소화하지 못할 것 같아서 고른 무난한 은회색 드레스였다.
“샘플 드레스 피팅해 보시겠어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커다란 피팅룸으로 직원 두 명이 따라 들어와서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피팅룸 밖으로 나오니 이미 모두가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대로 다 같이 무대에 올라도 될 것처럼 보였다.
서로를 보며 눈빛들을 교환하고, 율리아가 말했다.
“나가서 한번 봐야겠는데요. 콰르텟이니까 저 혼자 마음에 들어 봐야 소용이 없어서.”
네 명이 한 조로 실내악을 하는 콰르텟은 그녀의 말마따나 네 명이 조화로움을 이룰 필요도 있었다. 음악은 물론이고 의상도 마찬가지다.
블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죠. 다른 분들도?”
“그럴게요.”
이야기는 순식간에 진행되어서 다 같이 일단 드레스를 입고 같은 음악회에 나갈 남자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난 거울도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이끌려서 따라 나갔다.
“숙녀분들 멋진데!”
“신사분들도 훌륭하세요.”
나가자마자 이구동성으로 칭찬이 마구 쏟아졌고, 우리 쪽에서도 답사를 건넸다.
알록달록한 편인 드레스들과 달리 턱시도는 거의 블랙 아니면 네이비였다. 모양은 조금씩 다 달랐지만.
그렇게 음악회에 참가하는 음악가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서로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편을 보니 율리아의 콰르텟에선 같은 색으로 맞추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율리아는 블랙은 절대 싫다고 거부 중이었다.
“…….”
잠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보다가, 난 내 파트너부터 챙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서 있었다. 내버려 두면 아무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걸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잘 어울리세요.”
“……너도.”
뭐야 이 반응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안 그래도 거울을 제대로 못 보고 나와서 조금 불안한데, 에르네스트의 반응마저 시원찮으니 점점 더 불안해진다.
“저기, 에르네스트.”
“응.”
“우리 듀엣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지금 우리 잘 어울리는 걸까요?”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더니, 에르네스트가 약간은 더 신중한 눈초리를 했다.
하지만 대답은 비슷했다.
“……글쎄.”
“글쎄면 안 되잖아요.”
“내가 은회색 턱시도를 입으면 이상할 것 같은데.”
“예?”
난 순간 뿜을 뻔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그가 드물게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색을 맞추거나 그래야 하는 건가?”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다. 몇 번이나 무대에 서 봤으면서.
색을 굳이 똑같이 맞출 필요는 없겠지만, 너무 튀지 않고 조화롭게 맞출 필요는 있었다. 물론 에르네스트가 내 은회색 드레스에 맞춰 밝은 색 턱시도를 입었다간 확 튈 테니 되도록 내가 그에게 맞추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난 결정권을 그에게 넘겼다.
“에르네스트가 정해 주세요. 정해 주시는 대로 제가 맞출게요.”
“……뭐?”
에르네스트가 멍하니 되물었다. 난 이렇게 드레스를 골라 달라는 건 실수였음을 직감했다. 발끝이 선 위에 닿는 감각이 느껴진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한참이나 주저하던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말했다.
“그냥 그대로도 괜찮은데.”
“……다행이네요.”
“나야 잘 모르니까 뭐…….”
잘 모르니까 내 마음대로 하라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듀엣 무대를 잘 연출하고 싶은 것은 그 역시 같은 마음처럼 보였다. 난 그런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살짝 제안해 보았다.
“액세서리 같은 건 어떨까요?”
“액세서리?”
“예. 코사지 같은 건 좋을 것 같아요.”
작은 꽃들을 모아서 만든 코사지를 가슴에 단다면 특별하기도 하고 괜찮을 것 같아서 한 제안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그런 수도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바로 찬성했다.
“그렇게 하자. 그거면 충분해.”
“아하하…….”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에르네스트를 보면서 난 짧은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