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에르네스트와 딱 30분 정도만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2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난 4시간 후면 음악회라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음악회를 앞둔 연주자로서 자기관리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려면 에르네스트의 말대로 조금이라도 자는 게 낫지 않았을까?
무대의 신이 있다면 천벌을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그사이 자거나 다른 방법으로 쉬었어도 지금처럼 가뿐하진 않았을 것 같다.
몸은 차갑지만, 컨디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
슬쩍 돌아보니 무대를 앞두곤 늘 엄격한 에르네스트는 약간 실수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본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이라도 오늘 음악회가 있다는 걸 기억해내서 다행이네.”
“그러게 말이에요. 이대로 놀다가 종 치는 것도 볼 뻔 했어요.”
“그랬다간 우리 커리어도 같이 종 치는 거지.”
웃으면서 할 농담이 아닌데도 에르네스트는 킥킥거렸다. 연주자로서 목숨을 거는 그도 나도 절대 이런 농담을 해선 안 되는데, 지금 한순간만큼은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만족할 만큼 웃어 버리는 것으로 올해 마지막으로 공유할 추억은 잠시 접어두고.
우리는 다시 연주자로서의 본분을 찾아 되돌아왔다.
다시 올려다본 에르네스트의 눈빛은 진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난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럼 갈까요.”
“그래.”
우리는 거리에서 조금 걸어 나왔다. 도로가에 다다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색 벤츠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빅토르가 우리를 맞이했다.
“고마워요, 빅토르.”
“바로 콘서트 홀로 가십니까?”
“예. 돔 무지키로 가 주세요.”
모스크바 국제 음악의 전당. 돔 무지키.
4월에 자선 연주회를 했을 때 그 홀의 500석 챔버 홀을 빌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서게 될 홀은 1700석의 스베틀라노프스키 홀이었다.
저번엔 구경만 하면서 언제쯤 서게 될 수 있을까 기대했었던 무대가 정말 눈앞에 훌쩍 다가와 있었다.
콘서트홀까진 금방이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나란히 연주자 대기실로 향했다. 저번에 한 번 와 본 데다가 마지막 총 리허설도 했었던지라 길을 잃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왔구나.”
“일찍 왔네.”
돌아다니면서 놀긴 했어도 넉넉하게 시간 맞춰 도착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미 대기실엔 많은 음악가들이 도착해서 저마다 준비에 한창이었다.
바실리, 율리아 등 몇몇 사람들이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 있다가 우리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선 내게 말했다.
“오늘 좋아 보이네? 두 사람 다. 혹시 긴장하고 있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율리아가 보기엔 열다섯 살에 불과한 나나 에르네스트는 거대한 무대를 앞두고 지금쯤 부담감에 벌벌 떨고 있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난 에르네스트와 방금 전까지 거리를 쏘다니면서 놀기까지 했다.
약간 죄송하다는 심정까지 든다. 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래. 어우, 근데 왜 난 긴장되니?”
호들갑스럽게 너스레를 떨며 율리아가 말했다. 혹시라도 우리가 긴장하고 있을까 봐 일부러 하는 것이었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녀는 씩 웃더니 내 손을 잡았다.
“자, 일단 와서 앉아. 이따가 바빠지기 전에 같이 이야기나 좀…… 잠깐만.”
“?”
“타티아나 너 손이 왜 이렇게 차?”
그러고는 깜짝 놀라면서 양손으로 내 손을 만지기 시작했다.
오래 돌아다니느라 몸이 조금 차가워져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율리아의 손이 상대적으로 따끈따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밖에서 2시간이나 돌아다녔다고 하면 혼날 것 같아서 대충 둘러댔다.
“밖에서 조금 오래 있었나 봐요.”
“……뭐? 왜 그랬어?”
율리아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에르네스트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고개를 흔들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당겼다.
“저기 따뜻한 물 받아 놓은 것 있으니까 일단 손부터 녹여. 수건 가져다줄게.”
“아…… 고마워요. 율리아.”
난 그녀에게 손을 잡혀 끌려가면서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트는요?”
“난 됐어. 손 녹이고 쉬고 있어. 나갔다 올게.”
“어디 가세요?”
“무대 확인하러.”
그리고 그는 대기실을 휙 나가 버렸다.
똑같이 밖에 있었으니 일단 손부터 녹이고 무언가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무대 확인을 직접 다시 할 정도로 진지하고 자기관리도 철저하니까 내가 따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율리아는 대기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날 데려갔다. 테이블 위엔 따뜻한 물이 담겨 있는 대야가 있었다. 날씨가 춥다 보니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 같다.
난 얌전히 따뜻한 물에 손을 넣었다. 따뜻함이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이 제대로 풀리는 기분 좋은 감각을 느끼면서, 천천히 양손 스트레칭을 했다.
너무 오래 풀어지지 않도록 적당히 연주자로서 손을 거의 다 준비시키고 나자, 율리아가 옆에서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자, 수건.”
“감사합니다.”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아 내는 날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럼 저기 불 켜놨으니까 앉…….”
그런데 그때였다.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쨍 하고 울렸다.
“율리아! 지금 드레스 왔…… 어, 타티아나 왔네? 다 같이 가자. 드레스 도착했대.”
“앉을 틈도 없네.”
언제나처럼 느닷없이 날아든 예카테리나가 크게 불렀고, 율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히죽 웃으며 일어섰다.
“가서 보자.”
우리는 다 같이 연주자 대기실 바로 옆의 여성 의상 준비실로 향했다.
“여기 있네!”
드레스엔 연주자별로 각자 이름표가 작게 붙어 있어서 자기 걸 찾는 건 쉬웠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드레스를 찾아서 들고는 한참이나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듯했다.
나도 내 이름이 붙은 드레스를 찾아냈다.
은회색의 실크로 된 드레스였다. 혹시라도 찬 기운이 스며들어 방해될까 봐 두터운 미카도실크를 선택했다. 비딩은 너무 화려하지 않게 조금만.
거기에 소매가 긴 레이스 숄까지. 연주회 드레스로 크게 튀지도 않고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완벽하게 좋은진 잘 모르겠다. 아직도 난 그런 부분에 대해서 확신이 별로 없었다. 다른 분들은 예쁘다고 해 주셨지만……
“저기…… 누구 계세요?”
드레스를 가만히 보면서 이러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의상 준비실 문이 끼익 열렸다. 난 문을 연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아나스타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와 포옹하며 인사했다.
“와 주셨네요!”
“응. 나 왔어. 타티아나.”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레스에 코트만 입고 있어서 춥지 않을까 싶은데, 아나스타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녀는 내 뒤편을 향해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 애 친구인 아나스타샤라고 해요. 같이 연주하시는 분들이세요?”
“맞아요. 반가워요. 아나스타샤.”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대기실에 가서 물어보니까 의상실에 계시다고들 해서요.”
“괜찮아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들 나누어요.”
율리아와 예카테리나는 어차피 자신의 의상을 점검하느라 바빴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날 바라보았다. 난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일찍 왔다면 메시지를 해 줘도 좋았을 텐데, 이렇게 찾아 온 건 날 놀래 주고 싶어서일까? 아직 6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아직 이른데 일찍 오셨네요. 아나스타샤.”
“너도 지금쯤 왔을 것 같아서 일찍 왔어. 재작년 에르네스트가 할 때 보니까 준비 때문에 인사할 시간도 없더라고. 그래서 바빠지기 전에 얼굴이나 볼까 싶어서. 괜찮지?”
그녀의 말대로, 여러 명의 음악가가 준비하는 음악회이기 때문에 혼자 마음대로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콘서트 디렉터의 지시에 따라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일이 많았다.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초대한 분들에겐 음악회 준비 때문에 당일 인사를 못 드릴 수도 있다고 말해 놓았는데, 이렇게 아나스타샤가 일찍 올 줄은 몰랐다.
난 웃으며 답했다.
“물론 괜찮죠. 아, 드레스 보시겠어요?”
“그래.”
드레스 이야기를 하자 아나스타샤가 관심을 보였다. 난 그녀를 이끌고 내 드레스를 보여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드레스를 보자마자 말했다.
“진짜 예쁘다. 네가 고른 거야?”
“예. 어느 정도 음악회 테마에 맞춰 정해져 있는 것 중에서 고른 것이지만요.”
“그렇구나. 잘 어울릴 것 같아.”
“오늘은 몇 점이에요?”
“응?”
아나스타샤는 그간 패션 감각이 엉망진창인 날 몇 번이나 도와주면서 종종 점수를 매기기도 했다. 드레스일 경우엔 95점을 받은 적도 있었고, 50만 점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난 그녀의 평가를 기다리며 살짝 긴장했다. 어쩐지 이번엔 감점을 받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표정을 보던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레 웃으며 선언했다.
“5000만 점 줄게.”
“아하하하하. 너무 높아요.”
“하나도 안 높아. 너무 잘 어울려. 정말로.”
난 그제야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없었던 이 드레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묘한 눈빛으로 내 드레스를 바라보다가, 짧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은 연주자도 많아서 코디부터 식사까지 거의 모든 게 정해져 있을 테니까 친구로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난 대경실색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미 얼마나 많이 해 주고 계신데요.”
“응?”
“이렇게 와 주셨잖아요.”
내가 지금 아나스타샤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그녀는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지금처럼 제정신으로 큰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엔 아나스타샤의 도움이 정말로 컸다.
다시 확실하게 말하려는데, 아나스타샤는 그쯤하면 되었다는 듯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가만히 올려다보니, 그녀가 옅게 웃었다.
“얼굴 보러 오길 잘 했네. 힘이 된다면 기뻐.”
“아나스타샤.”
“그렇지만 이번엔 청중이어도……. 다음엔 같이 무대에 올랐으면 좋겠다. 나 열심히 할게. 진짜로.”
“아, 콩쿠르……! 그거 정말 언제 어디서 하는 건데요?”
“안 알려 주지롱. 입상하면 그때 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녀는 두어 걸음 떨어졌다.
괜찮은데. 난 피아노라는 망치를 든 못난 사람이지만, 그걸 친구에게 휘두를 생각은 전혀 없는데. 아나스타샤는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빛나는 사람인데.
하지만 내 생각과 관계없이 아나스타샤는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난 지금 그녀가 무엇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지, 다음엔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서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의상 준비실을 다시 한 번 쭉 둘러보더니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무튼…… 더 시간 뺏지 않을게. 준비 잘 하고, 오늘은 피아노의 신이 너와 함께하길 기도할게. 타티아나.”
“……고마워요.”
아나스타샤는 내가 내 실력 외엔 아무것도 안 믿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운명론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준다.
난 따뜻한 손과 목소리에서 전해져 오는 응원을 받으면서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밖에 못했다.
“이만 가 볼게요. 제 친구 잘 부탁드려요.”
“아하핫, 걱정 마.”
율리아와 예카테리나에게도 마지막까지 날 부탁하는 말을 하고, 그녀는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왔다가 정말 인사만 하고 가 버렸지만, 그녀는 청중석에서 오늘이 끝날 때까지 날 봐 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최고의 무대를 선보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이 빙 둘러진 계단만이 있는 어두컴컴한 무저갱에서, 그녀가 만약 불빛을 하나 찾아내어 그것을 쫓고 있는 것이라면, 그 불빛이 불안하게 흔들려선 안 되니까.
드레스를 들고, 고개를 들었다. 난 누구보다 강인한 연주자로 무대에 서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