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89화 (389/1,277)

##  389화

모스크바로부터 동쪽으로 약 3천 킬로미터. 열차로 이틀 거리에 위치한 노보시비르스크 시는 러시아 제3의 도시이다.

이곳에 위치한 글린카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음악원의 교수, 그레민은 보드카를 한 잔 더 마시고는 소파에 축 늘어졌다.

“……크흠.”

오늘은 1월 1일. 텔레비전에선 연말 특별 프로그램인 ‘푸른 빛’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그는 흐릿한 시야로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였다.

“슬슬 치울까?”

옆에 앉아 있던 아내 로자가 물었다. 그레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둬. 난 텔레비전 좀 더 봐야 하니까.”

“거의 끝난 것 같은데.”

새해를 맞이하여 준비해 놓았던 것들은 하나씩 끝나 가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 준비한 파티는 딸이 하품을 하며 자러 가면서 끝났고, 이제 곧 공영방송의 프로그램도 끝난다.

떠들썩했던 파티와 알코올로 인해 수마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버틸 것 없이 항복해도 그만이건만, 그레민은 더더욱 눈을 부릅떴다.

일주일간은 긴 휴가이니 강의 걱정을 하지 않고 늦게 자더라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레민이 이 늦은 시간에 잠을 청하지 않는 이유는 또 다른 연말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이유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레민은 진지했다.

“그거 말고 생방송을 봐야 해서.”

“무슨 생방송?”

“신경 쓰지 말고 자.”

그레민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로자는 평소 남편의 스타일을 알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저렇게 설명하길 귀찮아하면서 강단에는 어떻게 선대?

하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두면 저기 남아 있는 보드카를 혼자 다 마셔 버릴 것 같고, 로자는 일단 같이 지켜보기로 했다.

“이제 1신데, 언제 하는 거냐.”

음악원에서도 호랑이 교수로 정평이 나 있는 그의 투덜거림은 거의 위협적으로 들렸다.

그 위협이 텔레비전 전파를 거꾸로 타고 방송국에 닿았는지, 화면이 바뀌면서 그레민이 기다리던 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레민이 소파에 늘어져 있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음악회?”

로자는 그레민이 기다리는 방송이 모스크바 민영방송에서 하는 송년 제야 음악회였다는 걸 보고는 그만 웃어 버렸다. 역시 이럴 때 보면 국립 음악원의 교수답다니까.

“작년에도 이거 봤던 거였어?”

“재작년에도.”

그래도 그렇지 4시간 시차가 있는 곳의 생방송을 보기 위해 이렇게 기다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뭘 보려는 건지 확인만 하고 자러 가려던 로자는 조금 더 소파에 앉아 있기로 했다.

“멋지네.”

화려한 오프닝이 음악회의 시작을 알리고, 카메라가 홀을 넓게 비추었다. 클래식 콘서트홀답게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홀이었다.

“어디야 저기?”

“돔 무지키, 스베틀라노프스키 홀.”

“되게 커 보이네.”

“좌석에 비해 큰 홀이긴 하지. 음향도 좋고.”

그레민이 분석하듯 이야기했다.

몇 년 전부터 모스크바에서 시작한 송년 제야 음악회. 늘 뻔한 레퍼토리로 녹화되는 연말 프로그램들과 달리 생방송이니만큼 클래식 연주자들의 즉흥적인 기량이 월등히 드러나는, 살아 숨 쉬는 방송이었다.

그레민은 클래식계에 깊게 몸을 담그고 있는 입장으로서 이 음악회에 꽤 기대가 많았다.

잠시 후 카메라가 무대를 비추고, 사회자가 나와서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어지는 간단한 프로그램 설명. 곧,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박수 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입장했다. 그레민이 아는 연주자도 몇 보였다.

“…….”

잠시 후, 첫 곡으로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의 연주가 시작되자 로자는 침묵했다. 음악원 교수를 남편으로 두면 음악회에 가는 일이 잦다. 감상자의 에티켓 정도는 잘 안다.

하지만 그레민은 옆을 힐긋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말해도 상관없어.”

“당신 감상하는데 방해될까 봐.”

“방해는 무슨. 홀도 아니고 우리 집에서 마음대로 말도 못 하나?”

그러면서 그레민은 보란 듯이 보드카를 한 잔 더 따랐다. 아무래도 상관없단 뜻이었다. 로자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음악회를 볼 수 있었다.

“경쾌한 곡이네.”

“그렇지.”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오페라 곡을 아주 풍성하게 소화해 냈다. 그레민은 흠 잡을 곳 없는 연주라 생각하며 보드카를 홀짝였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행진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축전 서곡도 훌륭했다.

그레민은 한마디로 총평했다.

“머리 좀 쓴 프로그램이군.”

한 해를 보내고 그다음 해를 맞이하는 음악회의 막을 여는 프로그램으론 이 정도가 딱 적절했다. 어쩌면 작년이나 재작년 프로그램과 똑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프로그램을 짠 이들은 신선한 다채로움을 이끌어 내기 위해 상당히 머리를 많이 쓴 것 같았다.

그것은 그다음 곡으로도 이어졌다.

무대를 바꾸기 위해서인지 짧은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고, 다시 카메라가 무대를 비췄을 때 준비되어 있는 것은 현악 콰르텟이었다.

“저 사람들은 부담되겠어.”

“뭐가.”

“그 왜, 오케스트라의 뒤 순번이잖아? 비교될까 고민되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고, 사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레민은 이것이 하나의 노련함이라 생각했다. 음악회 전체를 하나의 음악처럼 보고 강약을 조절하려고 하는 콘서트 디렉터의 의도가 엿보이는 구도였다.

그리고 네 명의 연주자들은 그 의도에 완벽하게 따라 주었다.

베토벤 현악 사중주 대푸가는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화음을 삼키면서 살짝 아쉬웠다고 생각했던 섬세함이나 아기자기함을 딱 알맞게 채워 주었다.

로자는 웃으며 말했다.

“신선한 생선 요리 같은 연주네.”

“……당신 표현은 가끔 공부가 되기도 해.”

그레민은 중얼거리며 말하더니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이었다.

로자는 남편의 칭찬이 마음에 들어서 싱글벙글 웃으며 잔에 맥주를 따랐지만, 잠시 후 눈을 크게 뜨고 텔레비전 화면을 보았다.

초대형 오케스트라, 그리고 실력 있는 현악 콰르텟. 그다음으로 박수를 받으며 나온 것은 남자애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앳된 얼굴의 피아니스트였다.

로자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차렸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많이 컸군.”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 아직 모스크바의 중앙음악학교 학생이지만 그 이름은 모스크바에 그치지 않고 러시아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2년 전 연말 음악회에서도 열세 살의 에르네스트는 피아노 협주곡을 성공적으로 연주했었다.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솔리스트로 에르네스트가 나온 것은, 그만한 자신감과 실력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겠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박수 소리에 화답하여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아서 손을 들어올렸다.

바로 직후, 거대한 음악이 무대 위에 내리꽂혔다.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던 로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세상에.”

에르네스트는 양손을 크게 펼쳐 피아노를 찢어발기듯 건반을 내리쳤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빠른 리듬의 연주. 밝은 분위기였던 음악회는 순식간에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간다.

자막으로 나오는 곡의 이름은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였다.

“……흠.”

이 곡에 대해 잘 아는 그레민은 연주를 보며 많은 것들을 파악해 냈다.

불새.

본래 이 곡은 유럽에 러시아 오페라와 발레를 알린 발레 프로듀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기획으로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발레곡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당대 유명한 작곡가였던 아나톨리 리아도프와 알렉산더 체레프닌을 제치고 이 곡의 작곡가로 선정되었고, 1910년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자마자 단번에 전 유럽의 주목을 받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왜 이 음악회의 콘서트 디렉터가 세르히나 아르템 같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에르네스트를 지금 내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연주를 펼쳐 나갔다.

“역시 대단하네 저 애.”

“…….”

이 곡의 원곡과 이야기를 아는 그레민의 귀에는 에르네스트의 연주가 한층 더 또렷하게 들렸다.

사악한 마법사 왕 카시체이의 성 안에서, 이반 왕자가 불러낸 불새가 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불새는 에르네스트의 연주에 따라 성 내부를 날아다니면서 매혹적인 춤을 선보인다.

그 춤에 매료당한 카시체이 왕과 그의 수하들은 불새를 따라 광기 어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연주가 펼쳐지는 홀은 카시체이의 성이 되었다.

“…….”

원곡인 발레곡은 수십 개나 되는 장면을 담고 있었고, 그것을 축약한 관현악 모음곡도 5개가 넘는 장면을 모아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 더 축약한 피아노 솔로곡은 단 3개만의 하이라이트 장면만을 담았다.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연주자의 입장에선 상당히 불리하다. 주어진 테마도 적고, 관현악에 비해 악기도 빈약한 까닭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아주 자신만만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불새 이야기를 홀 전체에 쏟아내었다.

‘실력은 거의 정상급이군.’

카시체이 왕의 지옥의 춤이라는 이 복잡하고 강렬한 곡은 연주자에게 엄청난 기교를 요구한다.

숨이 막힐 정도로 멜로디를 끊어지지 않게 치밀하게 이어 나가면서, 동시에 격렬하다 못해 난해하기까지 한 리듬으로부터 나타나는 진한 색채감까지 표현해 내야 했다.

심지어 소프트 페달, 소수테누토 페달, 서스테인 페달 세 개를 거의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 지점도 드러났다. 발이 두 개뿐인 인간이 연주할 수 없게 작곡된 곡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든 난관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페달들을 절묘하게 섞어서 끊어지는 타이밍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처리했고, 손으로는 건반 위를 거의 날아다니듯 연주했다.

술기운이 확 날아갈 정도였다. 연주를 듣던 그레민은 자신의 학생들 중에서도 저 정도 비르투오시티를 보일 학생은 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러시아 피아노계의 별빛이라는, 조금 과하게 보이는 평가가 정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

에르네스트가 리듬을 살짝 뒤틀었다.

러시아 민담의 마법사 왕. 카시체이는 앙상한 팔다리의 노인이지만 강대한 마법사다. 스스로를 폭풍으로 바꿀 정도의 마법을 다루는 카시체이는 불새의 춤에 저항하며 새파란 불꽃을 일으켰다.

뱀과 같은 눈이 번뜩이며 섬뜩함에 소름 끼치게 한다.

뒤이어 불새와 카시체이 왕의 춤과 마법이 휘몰아친다.

카시체이가 손을 뻗어 불새를 잡으려 했지만 불새는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불새를 놓친 카시체이가 균형을 잃고 기둥에 부딪쳤다.

더듬거리는 걸음, 하지만 곧 불새의 춤에 다시 빠져든 카시체이는 결국 광소를 토해 내며 따라서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춤은 점차 격렬해졌다.

“팔이 네 개쯤 되는 것 같아…….”

로자가 중얼거렸다. 눈과 귀를 가진 모든 이들은 이 연주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 배경 지식이 없어도 이해하기 쉬운 음악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그리는 불새는 한층 더 화려하게 홰를 쳤고, 모두가 거기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매료된 사이 음악은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춤을 추다가 지친 카시체이 왕과 수하들은 마지막으로 모두 팔을 크게 치켜들었다가, 동시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불새가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반 왕자는 공주 차레브나를 구출해 성의 마법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연말 음악회에 딱 맞는 멋진 이야기로군.’

본래 발레곡에선 이반 왕자가 카시체이 왕을 죽이는 이야기가 섞여 있지만 이 피아노 솔로 곡에선 그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

나장조로 연주되는 섬세한 아르페지오와 상냥한 선율은 성 밖의 평화로운 숲을 그렸다.

차레브나 공주를 안고 걷던 이반 왕자는 공주를 내려 주었다. 곧 발걸음 소리는 두 사람 분이 되었다.

에르네스트는 한 발자국씩 앞으로 향하듯 건반을 타건했다. 신중하고, 중후하게. 이 곡의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는 걸음걸이였다.

숲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작은 언덕으로 천천히 올라갔고, 막 떠오르는 태양이 두 사람을 햇살로 비추었다.

새로운 1년을 맞이하는 듯한 느낌이 물씬 드는 훌륭한 마무리였다. 이 새벽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 브라보!

텔레비전 속 청중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심지어 그레민의 옆에 앉아 있던 로자까지 소리를 치려다가 잠들어 있는 딸이 생각났는지 급히 입을 다물 정도였다.

에르네스트가 무대에서 나가고, 다시 화면이 전환되며 이번엔 녹화된 오페라가 나오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현장은 인터미션 시간인 것 같았다.

로자는 텔레비전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앉아서 봐도 음악회에 온 것 같아서 좋네.”

그레민은 나 역시 혼자 음악회에 온 것 같지 않고 당신과 함께 온 것 같아서 좋다고 답하려다가, 괜히 보드카만 두 잔 따라서 한 잔을 아내에게 건넸다.

로자는 웃으며 잔을 받고 그레민과 건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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