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90화 (390/1,277)

##  390화

약 4시간 동안 진행되는 이 음악회에서 내가 올라야 할 두 번의 무대는 약간 뒤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단 3시간 정도는 무대에 오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난 상당히 여유롭게 무대를 지켜볼 수 있었다.

무대를 모니터링하는 화면으로 본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이어진 현악 콰르텟의 연주는 리허설 때도 그랬지만 정말 대단했다. 세계 최고 반열에 든 음악가들의 연주는 클래식 음악의 정수를 멋지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연주 뒤에 이어진 에르네스트의 피아노 독주.

컨디션이 좋다고 했던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평소에 봐 왔던 그 어떤 때보다 오늘 제일 잘하는 것 같았다.

연주자 대기실의 사람들도 모두 에르네스트의 연주를 들으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난 그의 칭찬을 들으면서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야말로 불꽃으로 타오르는 듯한 연주가 끝난 후, 엄청난 기립 박수 세례와 함께 에르네스트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는 연주자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한마디 했다.

“아, 더워.”

그렇게 엄청난 연주로 홀 전체를 달궈 놓고선 대수롭잖다는 듯 덥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난 웃어 버리고 말았다.

연주자 대기실에 있던 다른 음악가 분들이 에르네스트를 둘러싸고 칭찬을 퍼부었다.

“최고였다. 에르네스트.”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해 줬네.”

“잘 해 줬어!”

“상당히 어려운 무대였는데, 정말 잘 했어.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가 맡은 솔로 연주가 이 음악회의 흐름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믿고 맡겼지만, 믿은 만큼 해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젠체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모두 고맙습니다. 앞서 분위기가 너무 좋은 덕분이었습니다.”

한바탕 칭찬들이 다시 오가고, 스테이지 매니저가 인터미션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약 20분가량 진행되는 휴식이었다. 귀를 기울이니 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연주자들도 하나둘씩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대기실은 곧 한산해졌다.

난 바람을 쐬거나 할 생각은 없어서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르네스트도 대기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내 옆에 앉았다.

괜히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멋졌어요.”

“고마워.”

에르네스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받아 주더니, 갑자기 고개를 내 쪽으로 숙이며 속삭였다.

“리허설 때보다 나았지?”

평소보다 조금 달뜬 목소리.

난 그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연주가 마음에 들면 무대에서의 흥분감을 쉽게 진정시키기 어렵긴 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점잖은 척하더니 이제 와서 은근히 칭찬해 달라고 보채는 모습이라니. 그래도 이 정도는 받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실제로 잘하기도 했고.

“리허설도 훌륭했었지만, 본 무대는 정말 청중석에 가서 듣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랬었어?”

“예, 정말요. 해석은 이전과 같은데도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리는 느낌이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좋았어요, 에르네스트.”

내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에르네스트는 정말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유독 잘 되더라고. 컨디션 이렇게 좋은 건 또 오랜만인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래, 다행이지. 서야 할 중요한 무대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리고 그가 자신의 독주 무대에 만족하고 기분 좋아 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살짝 흐트러져 있던 분위기가 다시 곧게 펴졌다. 에르네스트는 아직 음악회가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긴장을 다 풀어 버리지 않고 다시 틀어쥐는 것만 보아도 그가 자기 관리에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좀 쉬면서 준비할까.”

방금 연주를 마쳤음에도 또다시 무대를 앞둔 연주자로서, 에르네스트는 손과 팔을 살짝 스트레칭하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어깨까지, 다리부터 허리와 목 전부. 격렬한 연주로 피로해진 몸을 재정비한다.

난 아무것도 안 했지만 가만히 보고 있는 것도 심심해서 그를 따라서 손을 다시 풀었다.

스트레칭을 마친 에르네스트는 날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간단히 뭣 좀 마실래? 내가 가져다줄게.”

“물만 있으면 충분해요.”

“안 그래도 된다니까.”

그는 내가 마시고 싶은 걸 마시고 쉬고 싶은 대로 쉬면서 내 컨디션을 챙기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나도 연주회를 앞두고는 과한 식사는 하지 않는 편이다. 오늘은 거기에 에르네스트의 방식을 따라서 약간 더 절제했을 뿐이다. 저녁에 샌드위치만 한 쪽 먹었지만 그리 배고프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자꾸 무언가 찾아서 내 입에 넣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에르네스트를 보면서, 난 그런 것보다는 지금 내가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에르네스트?”

“응.”

“에르네스트는 컨디션 관리하시는 방법 말고 징크스 같은 건 없으시나요?”

그간 한 번도 이런 걸 물어본 적은 없었다.

연주자는 무대에 오래 서면 설수록 징크스 같은 것들을 가지기 마련이지만, 그런 건 많이 친해지기 전까진 웬만하면 서로 묻지 않는 게 옳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물어봐야 할 때가 왔다.

같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데 에르네스트가 징크스처럼 여기는 무언가를 내가 건드리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알아야 피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물어보는 게 맞다.

“…….”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내가 묻는 이유를 알아들은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재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뭔가 말해 주기 어려운 건가? 하지만 난 실수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물어보려는 찰나, 그가 대답했다.

“글쎄. 징크스는 딱히 없고. 반년 정도 전에 생긴 마법…… 같은 루틴 비슷한 건 하나 있어.”

“루틴이요?”

“어.”

그건 약간 의외면서도,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괘, 괜찮으신 거죠?”

“……괜찮냐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반년이면 최근이잖아요. 약간…… 걱정되어서요.”

루틴이라는 건 타석에 선 야구선수, 코트 위의 테니스 선수, 무대 위의 연주자들처럼 한순간에 결과를 내야 하는 사람들이 집중력을 모을 수 있도록 행하는 일련의 행동 등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도 정신적 강인함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최면과 비슷한 면모가 있어서, 난 에르네스트가 반년 사이에 루틴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슬럼프라든가 다른 문제라든가.

물론 아무 문제 없는데도 더더욱 무대에 집중할 수 있게 루틴을 하나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걱정된다.

에르네스트는 내 얼굴을 보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무슨 생각인진 알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전혀 아니야. 그건……. 아니지.”

“왜 말을 하다 마세요?”

“그냥 말 안 할래.”

“왜요?”

“그냥.”

에르네스트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웃는 걸 보니 괜찮아 보이기도 하는데……. 아예 말을 안 하고 딱 잡아뗐다면 모를까, 이렇게 말하려다 마니까 더더욱 궁금해졌다.

난 그가 방금 전 불새를 연주하기 직전에 뭘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내 시야에서 벗어난 적도 많았던지라 전혀 모르겠다.

“가르쳐 주세요. 그래야 저도 따라 하죠.”

“따라 한다고? 왜?”

“중요한 듀엣 무대잖아요?”

물론 누군가의 루틴을 따라 한다고 해서 그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빈약한 논리처럼 보일진 모르겠다.

하지만 연주에 앞서 컨디션 관리도 비슷하게 맞춰서 했으니 루틴이라고 못 할 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고민하는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장난스레 웃으며 거절했다.

“그래도 가르쳐 주긴 싫은데. 나만 할 거야.”

뭐 얼마나 좋은 루틴이길래?

우리는 한참 동안 눈싸움을 했다. 가르쳐 달라는 내 무언의 요구와, 싫은데 어쩔 거냐는 에르네스트의 거부였다.

듀엣 파트너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굳이 더 물어보진 않았을 것이다. 싫다고 하는데 더 묻는 것도 실례고.

하지만 난 반년 사이에 그에게 루틴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그는 대충 넘어가려는 것 같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살짝 물어보기로 했다. 너무 심각하게 보이진 않게 약간 장난처럼.

“창피한 건가요?”

“뭐?”

“저에게 알려 주실 수 없는 행동이라면 괜찮아요. 이해하니까요.”

루틴으로 삼은 행동들이 꼭 그럴싸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엉뚱하거나 기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일례로 요전에 알게 된 바이올리니스트가 한 분 있었다. 그분도 무대에 오르기 전 항상 하는 루틴을 가진 분이었는데, 성호를 긋고는 팔을 교차시켜 귀와 어깨를 차례로 짚고 통통 점프를 하며 짧게 탭댄스를 추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에 빠지게 했다. 물론 연주는 아주 훌륭했다.

그런 상황도 본 나는 에르네스트가 어떤 루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고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수도 있죠. 살짝 부끄러운 루틴을 가진 연주자들도 많은…….”

“아니거든? 전혀 안 부끄럽……!”

정말 화가 났는지 흥분해서 큰 소리로 말하던 에르네스트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통해 나가야 할 소리가 머리에 몰렸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고 날 바라보기만 하자 진짜 잘못했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처음엔 조금 장난처럼 물어본 일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프라이버시에 관한 선을 넘은 것 같아서 급히 사과했다.

“어…… 그만할게요. 미안해요.”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뭐가 되는데.”

“그럼 알려 주실래요?”

“싫어.”

에르네스트는 단단히 삐친 것처럼 시선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큰일 났다. 괜히 쓸데없는 걸 물어봤다가 이게 무슨 일이람.

사과를 해야 하겠는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더 화를 돋울 것 같고, 화제를 돌리자니 너무 나쁜 짓인 것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만 살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도 그도 견디기 버거운 분위기였다. 결국 먼저 침묵을 깨뜨려 준 건 에르네스트였다.

“그리고 오늘은 할 필요도 없고. 그보다, 타티아나. 코사지 가지고 왔어? 이따 무대에 오를 때 할 거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도 살짝 돌리려는 뉘앙스였다.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피식 웃었다.

“난 그 코사지를 오늘 루틴을 대체할 아이템으로 삼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그렇게 생각해 줘.”

“그러신가요?”

“그래. 그럼 된 거지?”

그렇게 딱 말을 맺고,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소모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는 듯 더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

그가 루틴을 코사지로 대체한다는 말에서 그의 루틴이 어떤 물건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고 직감했지만, 굳이 더 알아내려는 시도를 하진 않았다.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금 생방송으로 어떤 장면이 나가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대기실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비전이었다.

인터미션으로 음악회가 쉬는 사이 생방송도 같이 쉴 순 없으니 미리 촬영해 둔 성악 공연이 나가고 있었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데, 저편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왜 가만히 있니?”

바이올리니스트 율리아였다. 평소에도 정 많고 따뜻한 성격인 그녀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대기실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녀는 문 쪽을 가리키면서 괜히 투덜거렸다.

“테라스 쪽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나가기 싫은 거지? 나도 그래. 그놈의 담배 좀 안 끊나 싶네.”

“아하하…….”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냥 웃어 넘겼다. 율리아는 따라서 조금 웃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물었다.

“뭐, 우리끼리라도 뭐 마시면서 쉬고 있을까? 뭐 마실래?”

“물이요.”

“물이면 되어요.”

그녀의 질문에 동시에 답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숨이 넘어가라 웃었다. 조금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휙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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