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91화 (391/1,277)

##  391화

나와 에르네스트, 그리고 율리아까지 세 명은 인터미션 동안 대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악 공연이 나오고 있어서 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에르네스트가 내게 성악에 대한 것들을 묻기도 했고, 내가 조금씩이지만 성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옆에 있던 율리아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타티아나, 성악도 한다고? 정말로?”

“정말 조금밖에 못해요.”

“와…… 피아노 전공에, 뭐야. 성악 부전공?”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성악과의 폴리나 선생님을 찾아가서 레슨을 받곤 했는데, 9학년이 되고부터는 폴리나 선생님이 유럽에 연수를 가 계셔서 혼자서만 꾸준히 연습 중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는 어디 가서 성악을 배웠다고 하기 어렵다.

난 눈을 반짝이는 율리아를 보면서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만 했다. 그래도 바이올린도 조금 할 줄 안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곤란해하는 날 보면서 킥킥 웃으며 말했다.

“작년에 네가 갑자기 성악한다고 했을 때 진짜 놀랐었는데.”

“그랬었나요?”

“그럼 안 놀랐겠어? 손목도 다쳐 가지곤.”

게다가 그땐 내가 손목에 보호대를 하고 있던 때라서 모두의 오해를 살 만한 때였다. 아나스타샤도 기겁하고 구세프 선생님은 화를 내기도 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때 생각을 하는지 살짝 인상을 쓰다가, 다시 날 보고는 편안하게 말했다.

“그래도 네가 그렇게 성악을 배워서 피아노 음색에 접목시킨다고 했을 땐 참 너답구나 했지.”

근본적으로 다른 성악과 기악을 하나로 해야겠단 생각을 아무나 하긴 힘들 것이다. 나처럼 특이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각자 전공에 집중하는 게 훨씬 더 나을 테니까.

그때 구세프 선생님은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날 말리고 내기를 걸기까지 했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이야기 안 했었지?”

“무슨 이야기요?”

“여태 교직에 있으면서 학생이랑 내기해서 져 본 게 너랑 나 둘뿐이었다는 거.”

음…… 그 내기에서 내가 이겼음을 인정해 주시고도 그 이상으로 어떤 말씀은 전혀 없으셨는데, 에르네스트에겐 말씀해 주셨나 보다.

그건 그거고,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서 그에게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언제요?”

“조금 예전에. 콩쿠르에 올릴 곡 가지고 한바탕 한 적 있었거든.”

콩쿠르 곡을 고르면서 지도 선생님과 의견이 안 맞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이지만, 에르네스트는 구세프 선생님과 내기를 할 정도로 싸운 적도 있나 보다. 가끔 보면 정말 두 사람 다 고집이 세다.

율리아는 신기하다 못해 경악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요즘 애들은 지도 선생님이랑 싸우기도 하는구나…….”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 평소엔 선생님 말 잘 들으니까.”

에르네스트의 말은 안 믿기로 했는지, 자기 학교 다닐 땐 선생님이 바이올린 켜다가 쓰러져 기절할 때까지 켜라고 시키면 그렇게 했어야 했다는 둥, 율리아는 음악학교에 다닐 때 있었던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이제 갓 서른 살이 넘은 그녀가 겪은 일들인데 한 50년쯤 전 이야기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겠지……?

“인터미션 종료 3분 전입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스태프가 크게 외쳤다. 대기실엔 이미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 각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난 다음 프로그램을 떠올리면서 혹시 없는 분이 있나 죽 살피다가, 3분 후 바로 무대에 올라야 할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

푸른 드레스를 입은 예카테리나의 눈빛엔 명백하게 불안함과 긴장감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로만이 무어라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그녀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어깨를 쭉 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턱을 치켜들면서, 그녀가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아까 솔로 봤고. 타티아나, 넌 조금 후였지?”

“예. 맞아요.”

“응, 응. 그랬었으니까. 어쨌든, 내가 먼저 할 테니까 잘 보고 있으라고. 알겠지? 특히 난 솔로 다음에 바로 듀엣도 있으니까. 어…… 무대에 좀 오래 있을 거거든?”

“…….”

예카테리나는 아직 열일곱 살 밖에 안 되지만 장래 유망한 피아노 연주자로서 굵직굵직한 커리어가 많다.

이런 큰 무대를 앞두고 상당히 긴장해 있으면서도 연주자로서 긴장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컨트롤하고, 정신을 바로세울 수 있는 건 그간 쌓인 경력이 상당한 덕분이리라.

내게 말을 거는 것도 그 일환이라면 그녀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 줄 말은 많았다. 하지만 난 그보다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기도 했다.

“예카테리나.”

“……?”

난 앞으로 슥 걸어 나가서, 그녀를 껴안아 주었다.

갑자기 그래서인지 예카테리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금세 안정되었다. 바짝 굳어 있는 태도가 느슨해졌다. 그녀를 휘감아 조이고 있던 긴장감이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난 웃으며 말했다.

“잘하실 수 있어요.”

“……응.”

예카테리나는 종전에 비해 훨씬 진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를 놓아 주자 에르네스트도 옆에서 한마디 해 주었다.

“에틀링겐 콩쿠르 우승자의 실력이 어디 가겠어요. 보여 주고 와요.”

“알겠어. 고마워.”

짧지만 강한 믿음이 실려 있는 말에 예카테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이 사라진 그녀의 눈에선 오로지 무대를 향한 열의만이 보였다.

내가,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예카테리나에게 맡긴 파트는 그냥 주사위를 굴려 내어 준 것이 아니다. 예카테리나의 실력을 직접 보고, 그녀가 이 음악회에서 자기 무대를 가질 만한 자격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맡긴 것이다.

그녀는 잘할 수 있었고, 해내려 한다.

“피아니스트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연주 준비해 주십시오.”

“예.”

스태프의 부름에 따라 예카테리나가 대기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무대로 올라갈 때까지 뒷모습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로만이 다가와서 갑자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아서, 난 따로 대답하지 않고 웃음으로 감사를 받았다.

“인터미션 종료까지 5초. 사회자님.”

“알겠습니다.”

잠시 후, 카운트다운 후에 사회를 맡은 스네야나 교수님이 무대로 나갔다.

인터미션 사이 방송으로 나가던 녹화 영상이 정확하게 끝났고, 바로 화면은 생방송 무대로 전환되었다.

방송으로 보는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딱히 2부라든가 음악회 재개라든가 하는 말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연주를 안내하는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예카테리나가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

“멋져요. 예카테리나.”

긴장하고 있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 나가선 청중들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자신감 넘치는 멋진 모습이었다.

곧장 피아노 앞에 앉은 그녀는 잠시 청중들의 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양손으로 피아노를 크게 내리쳤다.

“…….”

요크 보웬의 토카타 다장조 op.155

피아노 솔로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6도의 강렬한 화성의 연달아 울리면서 잠시 인터미션으로 흐트러져 있던 모두의 정신을 확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집중시킨 뒤에는 양손을 이용한 재빠른 아르페지오가 하나의 멜로디로 피부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스멀거리며 피부를 휘감아 오르다가, 허리를 타고 스르륵 내려가고, 다시 장난이라도 치듯 오르락내리락한다.

악곡 지시는 allegro furioso. 보통의 알레그로보다 더욱 빠르고 격노한 듯한 움직임을 필요로 했다.

예카테리나는 고난도의 아르페지오를 마치 뱀처럼 부렸다. 굉장히 절묘한 실력이었다.

“벌써 다 빠졌군.”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카메라로 비춘 청중석의 사람들은 이 어린 피아노 연주자의 실력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토카타라는 형식 자체가 빠른 아르페지오와 풍부한 화음으로 기교를 보이기에 좋은 형식이었다. 예카테리나처럼 테크닉이 좋은 사람에게 좋은 곡이다. 그녀는 확실히 이 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오르내리던 뱀이 마치 유령처럼 좌우로 흔들거리며 다가오며 공포감을 조성하고는, 다시 거대한 화성으로 내리찍는다.

“…….”

무궁동 토카타는 쉬는 일이 없다. 예카테리나가 움직이는 뱀과 화성의 격렬한 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거창한 주제나 이야기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화려한 액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연주에 빠져들었다.

예카테리나의 손이 크게 도약하고, 교차하고, 연타했다.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불안해하는 일이 없다. 자신 있고 명확하면서도 감각적인 터치로 예카테리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건반을 연주해 나갔다.

한 명의 피아노 연주자가 만드는 이 화려한 이미지는 다채롭게 꿈틀거리면서 모양을 이루어 나가고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다가, 갑자기 피아노 앞에 모여서 크기를 키웠다.

그렇게 드러난 음악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예카테리나의 기교가 빛을 발했다. 내가 느끼기로는 현악기의 주법 중 하나인 마르텔라토 주법의 묘리가 담겨 있는 기교로 느껴진다.

현을 활로 짓누르듯 연주하면 강렬한 악센트가 엄청난 울림으로 생겨난다. 피아노도 똑같다. 해머로 활을 짓누르듯 쳐올린다.

언뜻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다성 아르페지오처럼 들리는 구간을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강하게 연주해 넘기고, 오른손이 옥타브 3개를 도약해서 아르페지오로 내려갔다 올라가고, 다시 내려갔다 올라간다.

“……와우.”

율리아가 감탄을 토해 냈다.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연주였다. 아직 저 곡을 연주해 보진 못했지만 내가 한다고 해도 저 정도 속도를 내긴 쉽지 않아 보였다.

에르네스트가 연주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불새가 마치 피아노의 한계를 극복하여 관현악을 따라잡으려는 연주처럼 들렸다면, 예카테리나의 연주는 피아노 그 자체의 한계의 폭을 넓히려는 것 같은 연주였다.

충실하면서도 열정적이다.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를 그 이상의 무언가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 자신감 넘치는 의지가 돋보였다.

“…….”

연주는 잠시 되돌아와 뱀의 춤으로 바뀌었다가 한 편의 영화 같았던 이 음악을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예카테리나는 모든 힘을 쏟아 내는 것처럼 더더욱 건반에 달라붙었다. 음은 더 무거워졌고 속도는 더 빨라졌다. 음악을 끝으로 몰고 가면서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예카테리나는 모든 것을 숨 막힐 정도로 끌어올렸다.

달음박질하는 음을 양손으로 하나하나 박아 넣고, 아르페지오가 화려하게 장식한다.

그리고 무대가 무너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커다란 셋잇단음표가 연달아 등장하고, 마지막이 4개의 라 음이 옥타브를 하나씩 깨부수며 내려왔다.

예카테리나는 온몸을 휘두르듯 오른손으로 피아노 가장 오른쪽의 라 음을 쾅 하고 찍는 것으로 강렬하게 곡을 마무리 지었다.

“브라바!”

예카테리나가 팔을 펼치자 홀이 떠나가라 환호성이 울렸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약간 과장스럽게 인사했다. 예카테리나는 테크닉도 퍼포먼스도 스타성이 넘치는 연주자였다.

“저렇게 잘 하면서 긴장은 왜 했대?”

에르네스트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손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분위기 좋은데.”

아르템이 웃으며 말했다. 인터미션 후에 다시 열기를 끌어올리기엔 적격인 곡인데다가 예카테리나의 실력도 확실했다. 이제 음악회는 다시 열광의 궤도에 올라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다음 프로그램을 다시 예카테리나에게 맡기기로 했었다.

“준비해야겠군요.”

물론 이번엔 파트너가 있었다.

로만이 바이올린을 높게 들고 형광등에 비춰 보면서 짧게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가볍게 현들을 튕겼다. 그렇게만 해도 조율 확인에 문제가 없다니, 대체 얼마나 노련한 건지 모르겠다.

난 로만을 응원했다.

“기대할게요. 로만.”

그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평소 잘 보이지 않던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지체할 시간 없이 로만은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정확하게 무대로 입장했다.

“……우리 순서도 다가오고 있네.”

막 시작되려는 로만과 예카테리나의 듀엣 무대를 보며 에르네스트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신경 쓰는 것 같다.

살짝 물어보았다.

“긴장되시나요?”

“아니. 기대되는데.”

에르네스트는 언제나처럼 대답했고, 난 변함없는 그를 보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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