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구세프는 조용히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청중들은 아무 생각 없이 곧 다가올 새해를 기다리며 음악과 샴페인에 취해 있겠지만, 구세프는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 두 사람에게 온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같이 온 미하일은 믿고 맡겨도 문제없다고 말했지만 구세프는 이것이 자신이 선생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했고, 결코 바꿀 생각이 없었다.
큰 무대에 선 제자들의 음악회이니만큼 모두 기억에 새겨 놓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선생의 의무였다.
“……흠.”
지금까진 만족스러웠다. 1부의 종지부를 찍은 에르네스트의 불새는 레슨에서 봐 왔던 그 어떤 연주보다도 과감하고 훌륭했다.
구세프는 이 불새에 더 이상 레슨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로 그 곡을 더더욱 잘 키워 나가는 것은 에르네스트의 몫이다.
그리고 인터미션 후 2부 시작과 동시에 단 한 대의 피아노로 청중들의 산만해진 집중력을 단번에 모은 예카테리나도 인상적이었다.
‘저 애였군.’
에르네스트로부터 첫 회의가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구세프는 간략하게 당시 상황을 알고 있었다.
구세프가 바로 떠올린 것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아르카디 교수였다. 예카테리나는 모스크바 음악원 영재원 소속이었고, 아르카디 교수의 추천에 따라 에르네스트와의 듀엣 멤버로 짜였으리란 심증 정도는 추리라 할 것도 없이 간단했다.
사실 개인적으론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르카디도 예카테리나도.
하지만 선생으로서 학생을 편견을 가지고 대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고, 실제로 예카테리나의 피아노 실력은 에르네스트와 맞붙여 놓아도 괜찮을 정도로 뛰어났다. 저 정도라면 구세프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겼단 말이지.’
요크 보웬의 고난도 토카타를 저렇게 강렬하게 쳐 내는 피아니스트를, 타티아나는 수십 명의 음악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별로 준비도 없이 대결을 걸어 가뿐하게 이겨 버렸다고 한다.
심지어 에르네스트도 그 자리가 그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모든 것을 전해 들으면서 구세프는 역시 타티아나답다고 생각하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손바닥이 차가워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 애와 했던 것은 3년짜리 약속이었고, 이젠 2년이 남았다.
그 1년 동안 타티아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미하일과 구세프의 지도를 따라와 주었다. 그리고 그 애가 거둔 성과는 다른 학생들의 1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지금 이 음악회가 증명한다. 그 누구도 그걸 부정할 순 없었다.
이제 분명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마저 2년을 더 채워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구세프는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아르카디 교수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단순하지만 복잡한 생각이 들게 하는 대화였다.
‘두 사람이 음악학교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당신입니다. 구세프. 어떻게 생각해요?’
“…….”
예카테리나를 꺾었으니 나와 미하일의 지도가 더 잘난 게 아니냐고 말하는 건 정말 잘못된 대답이다.
지도가 잘난 덕이 아니다.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가 잘난 것이다.
저 두 사람은 세계 어느 음악원에 가더라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인재들이었다. 구세프는 그것을 정확하게 구분했다.
그렇다면 교육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타티아나는 분명히 학교에 남아 있고 싶다고 자기 의사를 밝혔으니 거기에 따라 주는 게 옳은가?
“크흠.”
당장은 할 수 있다면 담배라도 피우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다른 상념에 잠기기 전에 무대 위로 한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이 입장했다. 홀 안은 박수로 가득 찼다가 곧 조용해졌다.
구세프는 일단 무대에 집중하기로 했다.
“…….”
치간느tzigane
그 광시곡은 그렇게 불렸다.
1924년. 프랑스의 모리스 라벨이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인 옐리 다라니에게 헌정한 곡이었다.
로만이 활을 당겼다.
나단조의 음울한 선율이 마치 천천히 막을 여는 것처럼 들려온다.
헝가리 마자르인들의 민속 무곡인 차르디슈 형식, 그중에서도 라슈라고 하는 느리고 중후한 도입부 카덴차였지만 전통적인 집시의 멜로디와는 달랐다.
치간느란 프랑스어로 집시를 뜻하지만, 당시 파리에서 치간느라는 단어는 일종의 작품 스타일을 뜻한 까닭이다. 대중적으로 퍼진 이국적 음악 스타일. 그것이 치간느였다.
“아…….”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옆에서 누군가 작은 탄식을 흘렸다.
피아노의 예카테리나가 침묵하는 사이 홀로 이루어진 로만의 바이올린 연주는 음울하지만 어둡지 않게 사람의 근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아주 능수능란하면서도 섬세한 솜씨였다.
라벨의 인상주의적인 음향과 외젠 이자이의 향수가 느껴지는 듯한 하모닉스가 지나가고, 느린 카덴차는 점점 주제를 키워 나갔다.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과 협연을 해 오면서 실력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구세프가 보기에 로만은 정말 대단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저 정도 실력자는 흔치 않다.
그리고 그런 그와 파트너가 된 예카테리나도 만만찮은 실력자였다.
‘시작이 좋군.’
1악장이라 할 수 있는 카덴차가 서서히 주제를 복잡하게 흐트러뜨리고, 그것을 피아노가 잡아당겨 훅 끌어올린다.
마치 맑은 하프 소리처럼 청량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깔끔했다. 예카테리나는 바이올린의 흐름을 멋진 아르페지오로 장식했다.
두 악기의 첫 합주로 이전까지의 카덴차가 깨어졌을 때, 모닥불 앞에 둘러 앉아 나른하게 이야기하던 집시들이 모두 일어나서 천천히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차르다슈의 두 번째 부분인 프리스였다.
로만의 소리가 변화하는가 싶더니, 이국적인 선율로 격렬하게 울었다. 예카테리나가 즉각 따라붙었고 보다 무곡풍으로 바뀐 음악은 훨씬 더 신명나게 꿈틀거렸다.
피치카토로 통통 튀는 음색, 그것과 어우러지는 피아노의 선율. 잠시 빠져드는가 싶으면 갑자기 피아노가 홀로 내달린다. 짧고 빠른 발소리가 마치 모닥불에 닿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가까이에서 도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있던 로만이 피아노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같이 주위를 맴돌다가 이윽고 강렬하게 춤춘다.
“…….”
이후로 로만은 트릴, 더블 스토핑, 하모닉스 등 바이올린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기교를 순식간에 펼쳐 내었다.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 등과 비견할 만하다고 평가되는 난곡다운 난이도였다.
그 옆의 예카테리나의 실력 역시 전혀 모자람 없었다. 피아노의 역할은 반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피아노는 바이올린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때 그 전체적인 프레이징만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음 한 음마다 그대로 따라가며 맞춰 주어야 했다.
선율의 바이올린과 반주의 피아노가 아니라 두 악기가 모두 하나의 선율을 똑같은 움직임으로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어지럽지만 현란하고, 숨 막히지만 황홀한 음향이 청중석을 휩쓸었다.
두 악기가 할 수 있는 한계점까지 끌어올린 음악을 마음껏 퍼부은 후에, 짧은 피치카토 세 번으로 곡을 마무리했을 때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브라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예카테리나가 앞으로 나와 로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구세프는 박수를 치며 그들을 보다가,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를 팸플릿을 다시 펼쳤다. 그가 기다리는 무대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대기실로 돌아온 예카테리나와 로만에겐 청중들에 이어 동료 음악가들의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좋은 무대였어. 로만, 예카테리나.”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서 치간느는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 로만이 있었으니 뭐 당연했겠지만.”
“예카테리나, 토카타 칠 때 너무 멋있더라.”
로만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반응으로 인사를 받았고, 예카테리나는 의기양양하게 칭찬들을 만끽했다.
난 살짝 떨어진 곳에서 예카테리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무대에 오르기 전만 해도 조금 긴장한 모습이 보였었는데, 이렇게 언제 그랬냐는 듯 멋지게 자신의 연주를 끝마치고 어깨를 펴고 있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난 그녀의 성공적인 무대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런데 예카테리나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약간 당황해했다.
왜 그러는 걸까? 나도 당황스러워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왔다. 에르네스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수고했어요. 예카테리나. 좋은 연주던데요.”
“아, 에르네스트. 고마워.”
예카테리나는 에르네스트에겐 가볍게 답하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더니 살짝 변명조로 말을 걸어왔다.
“아깐 처음엔 괜찮았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뭔가 중얼거리던 그녀는 그런 모습이 스스로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아는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아, 됐고. 네가 잘 할 수 있다고 해서 잘 하고 왔어. 어때? 타티아나.”
나는 자기 무대를 잘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정말로.
진심으로 웃으며 답했다.
“너무 좋았어요. 예카테리나와 이 음악회를 함께하게 되어서 행복해요.”
“……무,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해?”
예카테리나는 말을 더듬었지만 곧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단순한 행위였지만, 난 그것이 그녀가 연주에 쏟아붓고 남은 피아니스트로서의 무언가를 내게 전해 주려는 것임을 분명히 느꼈다.
내 손을 놓은 예카테리나는 마침내 집중력이 모두 풀어졌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후 연주로 무대에 설 일은 없으니 괜찮으리라.
그녀는 힘없이 스르르 의자에 앉더니 이젠 아무것도 안 하고 즐기기만 하겠다는 듯 물었다.
“다음은 뭐였지?”
“알리나의 성악 무대예요.”
“그렇지……. 타티아나 너랑 에르네스트 듀엣도 얼마 안 남았네?”
난 머릿속에 있던 큐시트를 떠올려 보고는 대답했다.
“예. 알리나 다음으로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이어지죠. 그다음이네요.”
“1시간도 안 남았네.”
예카테리나는 은근히 내가 떨길 바라는 것 같은 눈치였다. 하지만 난 무대를 앞두고 연주자가 갖추어야 할 적당한 긴장감만 유지하고 있었다.
잘 해야 한다는 생각 등으로 머리가 복잡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단지 무대를 향한 열망이 그보다 더 강할 뿐이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예카테리나는 손바닥을 위로 펼쳐 보이더니 피식 웃었다.
“잠깐 쉬면서 모니터링 화면이나 보자.”
에르네스트, 예카테리나와 함께 모니터링 화면을 보니 어두운 무대엔 스크린이 내려와서 녹화된 다큐멘터리를 내보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스태프들이 빠르게 무대를 세팅 중이었다.
전혀 분주하거나 번잡하게 보이지 않았고 일련의 체계성이 엿보이는 광경이었다. 우리가 연주를 리허설한 만큼 저분들도 얼마나 많이 리허설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프로들 덕분에 다채로운 음악회가 가능해졌으니, 거기에 색을 잘 부여해 주는 것이 우리 일이었다.
잠시 후, 성악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무대 세팅이 완료됨과 동시에 다큐멘터리가 끝났다.
“가 볼까.”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성악가 알리나가 박수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연주자가 한두 명밖에 없던 종전 무대와 달리 무대를 꽉 채운 환한 조명. 그리고 그 앞쪽에 조금 더 돋보이는 자리에 알리나가 우뚝 섰다.
“…….”
조명으로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피아니스트들이 보통 무대에 옆으로 길게 위치하여 청중들에게 옆모습만 보여 줄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성악가는 정면을 보고 청중들을 대해야 한다. 저렇게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부럽다.
곧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지휘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오케스트라의 3/4박자로 시작되는 왈츠 리듬은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유명한 곡조였다.
알리나가 입을 열었다.
오스트리아의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op.410.
푸른 하늘엔 종달새가 날고, 따뜻한 바람이 들판과 초원에 봄을 일깨운다는, 귀여우면서도 아름다운 노래가 홀 안에 퍼졌다.
“…….”
성악이 가진 힘은 대단했다. 그 특성상 기악의 집단인 오케스트라와 완전히 섞이진 못하지만, 엄청난 기교를 지닌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오케스트라의 힘을 받아 한층 더 풍성한 노래를 보였다.
자연스럽게 손을 펼치고 노래하는 알리나는 오늘 계속해서 기악 무대만 봐 왔던 사람들의 넋을 빼놓았다.
난 멍하니 무대를 지켜보면서도 묘한 생각을 했다. 내가 성악을 더욱 잘하게 된다면, 그만큼 피아노에도 반대급부가 주어지지 않을까. 할 수 있다면 해야 하는 게 내가 할 일 아닐까.
“후후.”
잠깐 떠오른 생각은 곧 빠르게 흩어졌다. 내가 저 정도 실력을 갖추려면 피아노 연습에 들일 시간마저 빼앗겨야 할 텐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괜한 생각 않기로 했다. 난 즐겁게 웃으며 러시아 최고 소프라노 중 한 명의 무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