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3화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를 끝마치고 알리나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 뒤로 나갔다.
그러고는 박수 소리가 막 수그러들자마자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스태프가 미는 손수레에 선 채로 실려서.
“……??”
무대를 비추던 화면이 바뀌면서 객석의 놀란 청중들을 비추었다. 경악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지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좋은 반응이었다.
청중석 쪽이 떠들썩해진 사이, 사람이 아닌 인형인 것처럼 뻣뻣한 차렷 자세로 실려 온 알리나는 스스로 걷지도 않았다. 스태프가 직접 알리나를 번쩍 들어 무대 앞에 내려놓았고, 팔도 굽혀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알리나 진짜 잘하지 않아?”
“그러게 말이에요.”
종전에 사랑스럽게 봄의 소리를 노래하던 그 성악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확 달라진 모습이었다.
드레스도 앞서 입었던 펑퍼짐하고 화려한 드레스 대신 조금 짧고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표정도 딱딱하게 하고 몸짓도 전혀 하지 않으니 정말 목각인형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미동도 하지 않는 인형의 모습에 모두가 숨죽이고 기다릴 때.
잔잔하게 시작된 오케스트라의 음악으로 깨어난 인형이 입을 열었다.
- 새들은 소사나무에 앉아.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19세기 독일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가 죽기 직전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는 호프만의 옛 연인들을 대표하는 아리아들을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아리아 ‘새들은 소사나무에 앉아’였다. 흔히 인형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
알리나는 팔을 까딱이며 노래했다. 보기엔 재미있어 보이지만 나오는 노래는 고난도의 콜로라투라 아리아였다. 이 미묘한 차이가 더더욱 알리나를 인형 올랭피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조금씩 흔드는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오케스트라가 작게 반주한다. 올랭피아의 노랫소리는 한층 더 발랄하게 크기를 키웠다.
그렇게 최고의 기교를 선보이던 올랭피아는 무언가를 더 보여 주려다가, 갑자기 기괴한 동작으로 꿈틀거리더니 어딘가 고장 나는 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허리를 푹 숙였다.
- 와하하하!
공연 중엔 웃음을 터뜨리거나 하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예외적으로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만큼 알리나의 올랭피아 연기는 안 웃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성악가는 음악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도 잘해야 한다고 배웠었는데, 그 말대로였다.
듣기론 알리나는 이 곡을 위해 팬터마임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열정은 모두에게 전해져서 환호로 답례 받았다.
작동을 멈춘 올랭피아처럼 굳어 버린 알리나에게 환호성이 쏟아졌고, 지휘자는 잠시 양해를 구한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고는 알리나의 등 뒤로 다가가 태엽을 감듯 손을 돌렸다. 알리나가 끼릭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절제된 동작으로 허리를 들었다.
“어떡해, 너무 귀엽다.”
깔깔거리며 웃던 예카테리나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청중들의 눈빛도 비슷했다.
오페라의 주인공 호프만은 올랭피아가 인형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번에 사랑에 빠져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모두가 납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알리나의 노랫소리는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었다.
그 후로도 깜짝 놀랄 정도의 팬터마임과 아리아가 섞인 무대가 이어졌다. 알리나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가 태엽을 세게 감았을 때 클라이맥스가 터져 나왔고, 멋진 피날레로 곡이 마무리되었다.
“브라바!”
“알리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엄청난 환호에 알리나는 끝까지 인형처럼 팬터마임으로 팬서비스를 하는 프로 정신을 잊지 않았다. 다시 손수레에 실려 나갈 때까지 그녀는 인형 올랭피아였다.
대기실로 돌아온 알리나의 멋진 무대를 축하하는 찬사가 이어지기도 잠시, 쉬는 시간 없이 곧장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세 곡이지?”
“예.”
“준비해야겠네.”
“그렇죠.”
예카테리나의 말대로 오케스트라가 준비한 곡은 세 곡이었다.
첫 곡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서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오페라 아리아로 끝났던 무대의 호흡을 아주 끊지 않고 교묘하게 이어 가는 듯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탄호이저 서곡은 오페라의 서곡이지만 동시에 독립된 관현악곡으로도 많이 연주되곤 하니 상당히 괜찮은 선곡이었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곡은 게오르기 스비리도프의 눈보라 조곡. 그중 왈츠였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들어서 상당히 귀에 익은 곡이다.
“…….”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서 난 점점 연주자로서 준비되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대기실 안에선 연주 중에도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들이 떠다니곤 했지만, 기악에 집중하니 사람의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
이윽고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고 오로지 대기실의 스피커, 그리고 벽 너머의 무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만이 내 귀에 들렸다.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별로, 악기 하나하나까지 모두 세세하게 뇌리에 파고들었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신경들도 모두 고개를 들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짧은 왈츠 후에 이어진 아람 하차투리안의 가면무도회 조곡. 역시 그중에서 왈츠.
연달아 러시아 왈츠 특유의 풍미를 보여 주는 무대였다. 위엄 있으면서도 약간의 멜랑콜리함이 미묘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느낌이 간질거린다.
마음 같아선 이 왈츠를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난 더 이상 즐기기만 할 수 없었다.
“…….”
고개를 드니 에르네스트가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그가 손을 내밀었다.
“준비할까.”
그 손을 맞잡자마자 느껴지는 것들은 말로 수십 마디를 주고받는 것 이상이었다. 난 그대로 일어나선 잠시간 그와 악수를 나누다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할 준비란 서로 말로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각자 조금씩 스트레칭을 했다. 손과 팔을 풀면서 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다음은 기억하고 있는 음악을 빠르게 처음부터 짚어 나가면서 머릿속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점검했다.
정말 중요한 무대이기에 꼼꼼하게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하는 데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난 그리고 내 가방에서 코사지를 찾아 꺼냈다. 이번 듀엣 무대에서만 달기로 했던 액세서리였다.
일단 왼쪽 가슴 위편에 고정시킨 다음 거울로 확인했다. 크기도 위치도 괜찮은 것 같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도 나처럼 의상을 확인하러 왔는지 거울 옆으로 다가왔다. 내 옆에 선 그는 자꾸 옷깃을 만지작거리고 소매를 당기기도 했다.
난 그를 직접 바라보지 않고 거울을 통해서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멋지신데요.”
“솔직히 살면서 꽃 같은 걸 달아 본 건 처음인데.”
에르네스트 역시 거울을 통해 날 바라보더니 비로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잘 어울려요.”
“고마워.”
이렇게 거울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내 입이 움직여서 무언가를 말하고, 에르네스트가 그걸 듣는다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거울 속 모습은 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을 보다 현실적으로 와닿게 했다. 내가 종종 친구들과 다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그리고 이젠 피아노로 우리가 같이 있음을 보일 때였다.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무대 세팅 후 바로 입장 가능하게 준비해 주십시오.”
대기실 스태프가 말했다. 이젠 달리 준비할 것도 없었다. 나도, 에르네스트도 당장 무대에 나가 피아노 앞에 앉을 생각만 하며 모니터링 화면을 노려보았다.
두 대의 피아노는 굉장히 빨리 설치되었다. 빠르게 무대를 전환할 수 있도록 특수하게 준비된 운반구 덕분이었다.
숙련된 스태프들이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피아노 듀엣 무대를 세팅 완료했다.
“잘 하고 와.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고마워요.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가 우릴 응원해 주었고, 많은 분들의 격려와 응원 등이 뒤따랐다. 모두 하나하나 응하고 싶었지만 간단하게 미소로 답했다.
사회자의 짧은 소개 멘트, 그 직후 우리에게 신호가 떨어졌다.
우리는 대기실 문을 열고 나갔고, 문을 닫고 무대로 들어왔다.
“……아.”
온몸을 찌릿하게 울리는 박수 소리.
저 멀리 높게,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곳까지 청중들의 실루엣이 가득하다. 이 홀이 이렇게 컸던가? 약간 현실감각이 사라질 지경이다.
하지만 지금 걷는 단단한 목재 바닥이 다시 날 현실로 끌어당겼다.
이 바닥은 연주자의 모든 행위, 심지어 발걸음 소리마저 증폭해서 저 위의 모든 청중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
이 위에 섰다면, 연주자여야만 했다.
“…….”
허리를 곧게 펴고 발을 내딛는다. 내 옆에서 에르네스트가 똑같이 나와 발을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같은 피아니스트와 무대에 선 건 처음인데, 약간 신기하면서 기대되기도 했다.
이미 그와 어떤 음악을 할 수 있을지 많은 연습을 통해 알아본 바 있었다. 그걸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잘 할 수 있을까?
……해 보면 알겠지.
“여기.”
에르네스트가 작게 속삭였고, 난 그가 말해 준 대로 적절한 위치에 서서 인사했다. 박수가 한층 더 커졌다.
이제 피아노로 향할 때였다. 무대는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 좌우에서 중앙을 보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난 내 피아노로 향하기 전에 에르네스트를 일견했다. 때마침 그도 날 힐긋 보더니,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주자.’
언뜻 그가 그렇게 말한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 피아노와 거리를 맞추고 드레스를 정돈하는 데까지 몇 초. 연주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고 청중들 역시 가지런한 침묵으로 감상 준비를 끝마쳤다.
고요 속에서 두 대의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 나와 에르네스트가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동시에 손가락을 뻗어 건반을 터치했다.
“…….”
폴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L'apprenti sorcier.
19세기 프랑스에서 본래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유명했던 뒤카를 한순간에 전 세계적인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곡이다.
내림가장조의 신비로운 선율이 아련하게 흐른다. 난 조심스럽게 선율의 흐름을 조절해 나갔다.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잘 맞추어 주었다.
한동안 단순하게 들리는 주제 선율이 흐르고, 그다음은 긴 프레이징의 한 소리가 끼어든다.
우리가 연구했던 오보에의 소리였다.
“…….”
1897년 작곡된 이 마법사의 제자는 동명의 괴테 발라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원래 70명이 넘는 3관 편성의 거대 오케스트라가 연주해야 하는 관현악 작품이다.
그 곡을 투 피아노 듀엣으로 편곡했으니 표현해야 할 부분도 많았다. 당연히 한계 때문에 삭제된 부분도 많았다.
바로 지금, 긴 프레이징으로 늘어지는 마치 하품 소리와도 닮은 이 오보에 소리는 우리가 처음 찾은 악보엔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편곡자는 굳이 전부를 넣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실제로 이 정도만으로도 이 작은 스케르초의 이야기를 청중들에게 들려주는 데엔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전부 살려 냈다.
천천히 피아노로 길게 소리를 뽑아낸다. 무거움이나 날카로움은 필요 없었다. 편안하게 모두의 귀에 가서 닿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면 괜찮다.
이 표현은 생각보다 잘 된 것 같았다. 저 멀리 있는 1700명의 청중들의 분위기가 축 늘어진 것이 이곳 무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한낮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마법사의 제자. 그 평화로운 모습에 모두가 나른함을 느끼면서 따라서 하품을 하려는 찰나.
“……!”
난데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마법사가 등장했다.
제자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려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졌고, 호통과 잔소리가 제자의 머리 위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지금까지 편안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어지러운 음향이 뒤섞인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이 소리를 너무 까다롭지 않게 표현해 냈다.
마법사가 쏟아낸 잔소리는 괴테의 원작에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욕조를 채워 놓으란 말이었지만 어떻게 해석해도 좋았다.
제자가 스승이 내린 명령을 스스로 할 생각이 없다는 부분을 들려주는 것이 중요했다.
마법사가 다시 자리를 떠나면서 문을 쾅 닫자마자 제자는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두리번두리번.
곧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제자는 스승의 지팡이를 들고 빗자루에 마법을 걸었다.
빗자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