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94화 (394/1,277)

##  394화

성악 덕분인가? 나도 성악을 배워 볼까?

에르네스트는 괜히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바로 지워 버리곤 연주에 집중했다.

타티아나는 마치 진짜 마법을 부리는 사람인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서 한 음, 한 음을 창조해 내듯 피아노로부터 뽑아내어 홀 안에 흩뿌렸다.

발이 달려선 안 될 빗자루에 발이 달리고, 뒤뚱거리며 걷는다. 그 모든 것이 마치 눈에 보일 것처럼 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연습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느꼈지만 타티아나의 저런 음악의 인상주의적 표현법은 대단했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저 음색을 내기 위해 그녀가 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우기도 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걸 피아노로 저렇게 옮겨올 수 있다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다루는 실력이 어마어마하게 높음을 드러냈다.

그래도 가끔은 궁금하다.

저번에 류보비가 말하길 성악을 하려면 연기도 해야 한다면서 타티아나에게 고양이 흉내부터 확실하게 가르쳤다고 하던데, 그런 걸 하면 빗자루 흉내도 낼 수 있게 되는 건가?

“프…….”

연주에 집중하면서도 에르네스트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이 움직이는 빗자루와 함께 이제 이야기를 진행해 볼 시간이었다.

원곡에선 바순으로 진행되는 주 멜로디를 에르네스트가 맡으면서 빗자루에 양팔을 달아 주었다. 제자의 주문이 아주 적절하게 빗자루를 일꾼으로 만들었다.

신나고 경쾌한 리듬이 마치 신이 난 제자의 흥겨운 춤 같다. 제자는 빗자루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고, 뒤뚱뒤뚱 춤을 추면서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대뜸 물통을 빗자루에게 쥐여 주고 욕조에 물을 받아 놓도록 명령했다.

빗자루는 거역하지 않고 물통을 받아 들고 제자와 닮은 특유의 걸음걸이로 뒤뚱뒤뚱 밖으로 나간다.

“…….”

빗자루가 물통을 들고 움직이는 이 신비한 광경은 관현악으로 표현될 때 고음역의 체명악기 중 하나인 글로켄슈필까지 쓰이면서 최고로 환상적이고 마법적인 음악을 드러낸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와 둘이서 각자의 피아노로 이 모든 것을 그려 냈다.

편곡으로 한층 더 고난도로 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된 이 곡은 한계가 없는 것처럼 찬란하게 피어났다.

에르네스트는 왼손으로는 보다 길고 웅장한 금관의 표현을 종합시키면서, 오른손으로는 주 멜로디를 포함한 다채로운 음색들을 잡아내어 무대 위에 그려 냈다.

타티아나는 주 박자를 맡고 있었지만 지금 돋보이는 것은 오른손이었다.

그녀의 오른손은 고역대에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면서 날카로운 옥타브 스타카토를 연주하다가 순식간에 변화했다.

쏟아져 내리는 2도 아르페지오와 다성 트릴이 섞이면서 글로켄슈필의 환상적인 음향을 그려 냈다.

실제 글로켄슈필 연주자들도 인템포로 연주하면 버거워하는 경우가 많은 부분을, 비록 악기가 다르다지만 이렇게 훨씬 어렵게 편곡해서 한 손만으로 완전히 소화해 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끔 보면 너야말로 피아노 치는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싶어.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연주에 더더욱 집중했다. 타티아나가 이 정도 해 주었다면 에르네스트 역시 맡은 바에 충실해야 했다.

“…….”

이야기는 흘러 위기에 다다랐다.

빗자루에게 일을 시켜 놓은 제자는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었다. 가끔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빗자루를 보며 흐뭇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빗자루에 일을 시키는 마법은 배웠지만 그만두게 하는 마법은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욕실은 욕조에 가득 찬 물이 흘러넘쳐서 흥건해져 있었다.

당황한 제자는 다시 스승의 지팡이를 들고 빗자루에 아무 마법이나 걸어 보기도 하고, 빗자루를 멈추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빗자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을 길어 나를 뿐이었다.

조성이 바뀌고, 주법이 바뀐다.

이전의 경쾌하고 낭만적인 주제는 보다 무섭고 숨 막히게 돌변했다. 빗자루는 똑같은 박자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만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수많은 변화를 주었다.

제자가 어떻게든 해 보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빗자루는 매달리는 제자를 끌고 다니면서도 기어이 꽉 찬 욕조에 물을 부어넣는다.

그렇게 물을 부어넣는 만큼 홀에 숨 막히는 공포가 차오르는 느낌이 몰려온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훨씬 심각해졌고, 위기감이 치솟아 올랐다.

“……!”

결국 참지 못한 제자는 도끼를 가지고 와서 빗자루를 산산조각 냈다.

쾅.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통해 꽂아 넣은 일격은 그 자체로 빗자루는 물론이고 이 음악을 통째로 죽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하고, 장렬했다.

다 끝났나?

모두가 그렇게 착각할 때.

익숙한 리듬감으로 뒤뚱거리며 빗자루들이 일어섰다.

빗자루의 조각들이 각각 하나의 빗자루들로 변하여 빗자루 군단을 이룬 것이다.

“……후.”

짧게 숨을 몰아쉰 에르네스트는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치면서, 수많은 빗자루 군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리듬과 똑같은 선율이지만 그 수가 많아졌으므로 표현해야 할 범위가 훨씬 더 많아졌다.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의 편곡은 양손은 물론이고 손가락이 어느 하나도 쉴 틈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음악을 연주하고, 심지어 한 선율을 두 명이 번갈아 연주하면서 음을 퍼뜨려 피아노 두 대가 길게 놓여 있는 효과를 이용하기까지 했다.

뒤뚱뒤뚱.

수십의 빗자루들이 물을 길어 오는, 귀엽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공포스러운 광경과 제자의 혼란과 비명 소리. 그 모든 것이 한곳에 집약되었다.

물은 차오르기만 한다.

에르네스트는 양손으로 피아노를 부숴 버릴 것처럼, 9도 화음을 그야말로 때려 박으면서 이 음악의 규모 그 자체를 한계까지 넓혔다.

연속으로 쾅쾅 울리는 에르네스트의 폭탄 같은 타건에도 전혀 밀리지 않고 타티아나가 섬세하게 주위를 그리면서 모든 것을 조화롭게 그려나갔다.

빗자루 군단과 제자의 소동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그렇게 이야기가 종막에 도달하여, 도저히 빗자루들을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어 기진맥진한 제자가 스승의 이름만 부르고 있자,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스승이 등장해 빗자루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

재미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듯,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는 깔끔하게 음악을 마무리하고 동시에 손을 치켜 올렸다.

“브라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함성이 울렸다.

에르네스트는 바로 일어서지 않고 고개를 들어 피아노 건너편을 바라보았고, 타티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혼신을 다한 연주를 했음에도 언제나 그렇듯 평상시와 별다른 표정 없이 있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에르네스트가 느끼는 이 완벽함에 대한 만족도만큼 타티아나 역시 비슷하게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일어나선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타티아나도 바로 옆에 섰고, 두 사람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청중들에게 묵례로 답하고 무대를 뒤로 했다.

“브라보! 브라비! 몇 번을 해도 모자라네! 진짜 너무 잘했어!”

“아까 객석 비출 때 사람들 표정 봤어?”

“나도 똑같은 얼굴 하고 있었어.”

“너희 최종 편곡 후에 더 바꿨니? 빗자루가 하나 늘었던데?”

칭찬인지 아니면 정말 질문인지 모를 말들이 마구 터져 나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있는 그대로 대답하기에 바빴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다음 세르히의 무대도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후.”

성공적인 연주를 마친 것으로 고양된 기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대충 아무 의자에나 걸터앉아서 물통을 들고 들이켰다.

마음 같아선 이제 탄산음료라도 마셨으면 좋겠는데 아직 타티아나가 있기에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옆자리의 타티아나를 살폈다. 그녀는 차분하게 앉아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 검사하듯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끔 보면 묘하게 보이는 행동이지만 지금은 더없이 프로의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혼자서 이 고양감을 안고 있는 것도 싫어서, 그것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타티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타티아나. 아까 우리 빗자루가 늘었냔 질문이 있었는데. 몇 자루였지?”

그냥 쓸데없는 농담처럼 건 말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답했다.

“열두 자루요.”

에르네스트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만, 우리가 상당히 자세하게 연구하긴 했지만 빗자루 군단의 이미지에 병사 수까지 있었는 줄은 몰랐는데?

진작 물어볼 걸 그랬다. 그랬다면 우리가 방금 했던 음악이 더 디테일해졌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생각이 에르네스트를 즐겁게 했다.

“하하하하하.”

“아마 그 이상은 어려울 거예요. 저희도 사람이니까.”

타티아나는 별생각 없는 듯 말하면서 손가락을 마저 다 풀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연주한 만큼 들렸으면 좋겠어요.”

“분명 그렇게 들렸을걸.”

에르네스트는 그가 자신 있게 대답하는 만큼 타티아나도 자신감을 찾고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이번에도 그의 대답에 타티아나는 보다 확신에 찬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분명 그랬을 것 같네요.”

그다음으로는 세르히의 피아노 솔로 무대가 이어졌지만 솔직히 에르네스트는 세르히의 무대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집중해서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아서 그냥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12월 마지막 날을 마무리 짓는 음악과 함께 시간이 흘러갔다. 연주도 성공적이었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

- 인터미션을 알립니다. 청중 여러분들을 위한 샴페인 리셉션과 각종 행사가 마련되어 있으니 청중 여러분께서는 안내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세르히의 마지막 연주를 마치고 나자 11시 30분이었다. 두 번째 인터미션이 시작되었다.

이 인터미션은 자정 너머까지 1시간 동안 진행되는 인터미션으로, 모두들 새해를 맞이하며 축하와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마련된 시간이었다.

연주자들도 그사이엔 쉬면서 즐길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오도카니 앉아 있는 타티아나를 불렀다.

“타티아나.”

“예.”

부르는 대로 대답하면서 올려다보는 게, 이따가 가족과 친구들이 오기 전까진 그냥 여기 있을 작정이었던 것 같다.

“여기 있지 말고 잠깐 나갈래?”

에르네스트는 넌지시 제안했다.

“그럴까요.”

타티아나는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대기실 밖으로 바로 이어진 복도를 지나 테라스로 나왔다가 찬 공기가 훅 몰아쳐서 다시 바로 복도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에르네스트는 또 모르지만 아직 타티아나는 솔로 무대가 남아 있었고 몸도 약한 편이다.

이런 날씨에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밖에 내놓았다가 감기라도 걸린다면 에르네스트는 책임질 방법도 없다.

낮에 밖을 놀러 다니긴 했었지만.

어쨌건, 결국 복도를 서성이게 된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는 초대한 사람들에게 지금 있는 곳을 메시지로 알려 주고는 멀거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딱히 주고받을 재미난 말도 떠오르지 않고, 에르네스트는 스스로의 재미없음을 한탄하며 먼 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복도 끝에 설치된 샴페인 테이블이었다.

“연주만 아니었어도 한 잔 마시면 좋았을 텐데.”

“안 돼요. 우린 학생이잖아요.”

“깐깐하네. 연말이잖아.”

“연말이라고 붙이면 다 되는 줄 아세요?”

아까 넌 음악회 시작 전에 그러지 않았어?

조금 어이없다는 듯 쳐다봐도 타티아나는 아무 기억도 안 나는지 앞만 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뭔가 시비를 거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아. 소원 종이도 태워 마실 수 있게 해 놨네.”

“소원 종이?”

샴페인들이 제공되는 곳엔 작은 종이 다발과 펜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한 남자는 벌써부터 종이에다가 소원을 써서 준비하고 있었다. 신년이 되면 저 종이를 라이터로 태워서 샴페인에 넣고 가족 친구들과 건배하고 원샷 하는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그걸 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물로 해 볼까.”

“잿물을 마시는 건데요?”

“안 죽어.”

저거 마시고 죽었다는 사람 이야기는 못 들어 본 것 같으니 괜찮겠지.

하지만 타티아나는 언제나처럼 걱정이 많았다.

“소원이 뭔데요? 에르네스트 스스로 하실 수 있는 거라면 잿물은 안 마셨으면 좋겠는데요.”

소원이라기보단 바람에 가까운 거긴 한데.

에르네스트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타티아나를 내려다보다가,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갑자기 루틴을 가르쳐 달라고 그래서 당황했었던 일.

네가 마법을 걸어 준 넥타이를 다시 똑바로 매는 게 루틴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순 없어서 딱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솔직히 그때 타티아나가 보여 준 표정에 에르네스트는 적잖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긴 했어. 타티아나.”

“예?”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말이긴 했고,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할 지금 하면 딱 적절할 것 같다. 중대 발표를 하기에 좋은 날 아닌가?

타티아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니 그녀는 적잖이 당황해했다. 이번에도 모르쇠로 굴 줄 알았는데 말해 주겠다니 놀란 듯한 눈치였다.

가만히 두면 타티아나가 다른 말을 끼워 넣을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말했다.

“나 작곡과에 가려고 해.”

“그, 자, 작……작곡, 과요?”

타티아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더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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