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95화 (395/1,277)

##  395화

에르네스트가 다른 어떤 말을 했어도 지금처럼 놀라진 않았을 것 같다.

화려한 장식이 반짝이는 복도. 주변은 흥에 겨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내 심장 소리만이 귀에 들릴 것처럼 크게 두근거렸다.

작곡과? 난 에르네스트가 피아노과 말고 다른 어디론가로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원래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긴 한데……. 이번에 편곡을 해 보면서 조금 확실해졌어.”

그와 편곡을 하면서 나 역시 느낀 바가 많았다.

에르네스트는 러시아 특유의 감성적인 포인트는 물론이고 파격적인 면모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작곡에도 재능이 무척 많고 자신의 개성도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점을 키우고 싶어 하는 듯했다.

“작곡을 조금 더 제대로 배워 보고 싶어.”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잡은 것처럼, 그가 올곧게 선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

그의 말투는 어쩐지 내가 하는 말투와 조금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들으면 이렇게나 말문이 턱 막히게 들릴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난 말문이 막혔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생각이 머리에 맴도는지도 잘 모르겠는 상태로 한참을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나는 간신히 한 마디를 자아냈다.

“……피아노는요?”

“피아노는 당연히 하는 거지. 내가 피아노 안 치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타티아나. 너 라흐마니노프나 리스트가 작곡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 연주 활동은 쉬었다는 말 들어 봤어?”

“…….”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대에 안 서면 답답해서 안 돼. 죽을 때까지 피아노를 쳐야 하는 거야.”

약간 무섭게까지 들리는 말인데도, 그 말을 듣자 답답했던 마음이 그래도 훨씬 편안해졌다.

라흐마니노프는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아노 연주자들 중 최고라 평가받는 거장이었다.

그 많은 곡들을 작곡하면서도 연주회 활동도 빼놓지 않고 많이 하여 레코딩 음반도 남아 있었다.

연주회를 할 때마다 수백 대의 마차 행렬을 끌고 다닌 시대의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 다 굉장히 수준 높은 작품들을 다작하여 작곡가로서 명망이 높으면서도 당대에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당당하게 라흐마니노프나 리스트의 이름을 입에 담을 정도로 자신 넘치는 연주자였다. 그렇다면 그리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었다.

난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조금 냉정해지자 친구로서 내가 그에게 해야 할 말이 확실해졌다.

이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겠다고 한다면 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건 축복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에르네스트는 작곡을 하셔도 잘 하실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

“예.”

“고마워.”

에르네스트는 담백하게 감사를 보냈다. 난 잠시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작곡을 하겠다는 건 좋다. 그럼 언제부터?

난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40분.

갑자기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굳이 한 해가 바뀌는 지금 이 타이밍에 이런 이야기를 할 이유는 내년이 되면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번엔 분명히 조기졸업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만 그사이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아예 과를 바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체 바뀌지 않은 생각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싶다.

난 나도 모르게 소곤거리듯 물었다.

“그래서…… 내년부턴 학교에서 볼 수 없는 건가요?”

“뭐?”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문했다.

“갑자기? 왜?”

“내년에 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에 가신단 이야기 아닌…….”

“아니야! 왜 갑자기 그렇게 확 건너뛰어? 내가 지금 피아노과라면 몰라도 작곡과를 어떻게 가?”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전과를 하실 건가요?”

“아니. 너처럼 할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설명해 달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약간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타티아나 넌 피아노를 전공하면서 바이올린도 했고 성악도 배우잖아. 그래서 그 음색을 얻어 냈고.”

“아…….”

“우리 학교가 이중 전공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주진 않지만 그런 식으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건 알았으니, 나도 써먹지 않을 이유는 없잖아?”

“그렇죠.”

“기왕에 있는 거, 배울 수 있는 건 더 많이 배워야지. 이제야 결심이 섰어.”

그는 확고하게 말을 맺었다.

난 약간 감회가 복잡했다. 이대로 피아노만 치더라도 이미 장래 유망한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작곡도 제대로 배워 보고 싶다고 결정하게 된 계기가 나 때문이라는 게 잘된 일 같다가도, 어쩌면 잘못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음악적으로 어떠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이건 그 범위를 조금 벗어난 게 아닐까?

이런 내 생각 자체가 오만일 수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날 만나기 전부터 작곡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고, 본래 하나로 독립된 오롯한 음악가였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건 아주 작은 티끌 같은 것일 뿐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그를 모욕하는 일…….

“타티아나?”

“아…… 예. 말씀하세요.”

“그게 아니라, 난 네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뭔가 현실적인 쓴소리라도 들을 줄 알았거든.”

“……쓴소리요? 제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되묻자 그가 이렇게 말해도 되나 모르겠다는 듯 손바닥으로 목 옆 부분을 짚더니 말했다.

“어쨌든 간에 2년 반 동안은 곁다리로 배워서 그다음엔 음악원 작곡가에 가겠단 건데? 난 너한테 이 이야기하면 아예 전과하라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에요.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구세프 선생님에게 배울 것이 많다고 하셨었잖아요?”

이제야 그가 전과하지 않고 피아노과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를 떠올려 낸 내가 얼른 덧붙이자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우리 학교에 있는 동안은 피아노과로 있고 싶은 거야.”

확실히 그의 말은 현실적인 쓴소리를 들을 만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과에 있으면서 작곡도 배워서 음악원 작곡과에 가려고 한다.

사실 그건 지금 내가 피아노와 동시에 조금씩 배우는 성악으로 음악원 성악과에 가고 싶다는 말과 똑같았다.

물론 이미 우린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 작곡 기법에 대한 여러 가지를 배웠고, 무엇보다 작곡가에게 가장 유리한 악기인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기까지 하다. 분명 유리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음악원 작곡과는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님이 분명하다.

“…….”

그래도, 그라면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피아노 연주자로서 연주 활동도 멈추지 않고, 원하는 삶을 살 열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그런 에르네스트를 바란다.

그제야 간신히 살짝 장난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욕심이 많으시네요.”

“내가 좀 그래.”

“하지만 모두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구세프 선생님에게 말씀드렸을 때, 너처럼 말해 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난 성악을 배워 보고 싶다고 했다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쓴소리 정도가 아닌 호통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작곡을 배운다고 하면 그 정돈 아니겠지만, 그래도 구세프 선생님이 그 성격에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하실 것 같진 않다.

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쉽진 않을걸요.”

“불안하네.”

자기 지도 선생님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르네스트는 생각만 해도 아찔한지 인상을 쓰더니, 귀찮은 일은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 털어 버렸다.

“어쨌든 그건 아직 시작도 안 한 일이니까……. 타티아나 너는?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과로?”

난 사실 미래라는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조금 묘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평소 그런 걸 생각하며 살고 있진 않았다.

그냥 허락되는 대로 현재를 충실히 보내다가 음악원에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할 뿐.

“아마……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아, 에르네스트. 아르카디 교수님은요?”

“응?”

“에르네스트가 모스크바 음악원에 오길 굉장히 고대하고 계실 텐데요.”

그냥 재미없는 대답으로 넘어가려던 나는 갑자기 생각난 것을 물어보았다.

아르카디 교수님은 에르네스트를 점찍어 놓고 5년이나 설득했고 심지어 3년간은 주말에 짬을 내어 개인 레슨을 봐 주시기도 했다.

이런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누릴 건 다 누리고 무시해도 될 일도 아니었고.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태평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 갈 건데.”

“과가 다르잖아요……?”

“과가 다르면 학생이 아닌가? 뭐 어때. 거기 가서 피아노 배울 땐 아르카디 교수님한테 레슨 받으면 되잖아.”

“아니, 너무 멋대로…….”

“타티아나. 정해진 건 없어. 아무것도.”

에르네스트는 딱 잘라 말했다. 마치 우리가 이 음악회에서 있을 자리를 따내기 위해 다짐했던 그때처럼.

자신이 있을 곳은 자신의 힘으로 정한다는 의미였다.

아르카디 교수님이 일단 좋아하실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피아노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작곡과에서 작곡을 배워 자신의 곡을 쓰면서 동시에 피아노 연주자로서도 꾸준히 자신의 걸음을 걸어 나간다면 그런 학생을 밉게 볼 교수님이 있을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천재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고, 그래서 고등교육기관인 음악원에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님이라면 더더욱 지금 에르네스트가 가고자 하는 길을 나쁘게 볼 리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충분히 스스로 정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건 없죠.”

“그렇지? 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선배들도 많이 알거든.”

“미리 조사를 하셨나요?”

“약간.”

엄지와 검지를 살짝 떼며 제스처를 취하는 그를 보며 난 결국 웃어 버렸다.

그는 막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계획적인 완벽주의자에 가깝다.

그 완벽주의가 스스로의 평가에 기준되어 있어서 가끔은 진짜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긴 해도, 그는 항상 생각하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간다.

작곡을 배워야겠다는 것도 결국 피아노를, 음악을 더 잘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나중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 같이 모스크바 음악원에 갔으면 좋겠다. 다른 녀석들도.”

“혼자 작곡과이실걸요?”

“뭐 어때. 맨날 놀러 가면 되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난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가도 되고요.”

“그렇네.”

에르네스트의 장래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많이 놀랐지만, 이젠 그가 나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거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즐겁게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길 몇 분.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우리가 초대했던 분들이 찾아오셨다.

나와 에르네스트의 가족들, 그리고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이었다.

아나톨리와 류보비의 부모님들도 모두 같이 초대했더니 이번엔 정중히 사양하셨기 때문에 초대하지 못했고, 리처드는 영국에 돌아갔고, 발렌티나는 친척들과 함께 파티를 한다고 했고, 선배들도 이번엔 집에 가기로 했고……. 아나스타샤와 한승우는 어디에 있지?

하지만 지금 안 보이는 친구들에게 신경을 쓰기 전에 느닷없이 인사가 덮쳐 왔다.

“연주 잘 봤단다! 너무 예쁘더라!”

“아, 감사합니다. 연주 전에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 바빴다고 했잖니?”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연신 감탄사를 발하셨다. 난 사샤를 열심히 쓰다듬어 주면서 답인사를 해야만 했다.

“잘했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수고 많았다. 아, 타티아나는 마지막 곡까지 긴장 풀지 말고.”

그리고 두 선생님들도 근엄하게, 하지만 내심 기특하다는 표현이 묻어나는 칭찬을 해 주셨다.

난 오늘 이 음악회가 두 분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아버지는 약간 뒤편에 서 계시다가, 내가 돌아보자 그제야 짧게 말씀하셨다.

“훌륭하더구나.”

“감사합니다…….”

언제나처럼 짧은 한 마디지만 사실 내게 있어선 어떤 말보다 따뜻하게 들렸다.

“한 곡 더 남아 있으니 열심히 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그러마.”

아버지는 그 외에 다른 표현을 하진 않으셨지만 난 충분했다.

그 뒤로 한 해의 마무리를 축하하는 여러 말들이 오갔다. 여기 모인 분들은 서로 공유하는 부분도 많았고 나눌 이야기도 많았다.

나도 끼어서 몇 마디 거들다가 자꾸 신경 쓰이게 오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나서 고개를 들었다.

“두 분은 어디 갔죠?”

에르네스트 역시 기다리고 있었는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글쎄, 오겠지……. 아, 저기 있네. 늦었네, 바보들.”

그는 복도 저편을 가리키며 킥킥 웃었다.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아나스타샤와 한승우가 이쪽을 막 발견하고는 다가오고 있었다.

난 내 친구들의 얼굴만 봐도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 떨리는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잘 했어! 두 사람 다!”

아나스타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난 아나스타샤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좋은 무대였어.”

한승우도 감명 깊었다는 듯 말했다. 나야말로 그가 보러 와 줘서 고마웠다.

그렇게 나와 에르네스트가 초대한 모든 사람들이 모였고, 마치 정확하게 약속이라도 한 듯 새해 5분 전이 되었다.

홀 안에서는 대통령의 신년 인사가 스크린으로 나오고 있을 테지만 복도에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분명히 흘러가고 있었고, 5분 후 신년이 밝았음을 알리는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렘린의 스파스카야 망루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사이, 사람들은 소원 종이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샴페인에 넣은 뒤 건배하고 원샷 했다.

나와 친구들은 샴페인을 마실 수는 없기에 서로를 보며 정해 놓은 구호를 외치기라도 하듯 너 나 할 것 없이 말했다.

“해피 뉴 이어!”

종이 멈추자, 모스크바 전역에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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