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6화
11시 30분.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칼루진의 연주가 끝나고 자정 인터미션을 알리는 안내가 나왔다.
“…….”
아나스타샤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잠시 앉아서 방금 있었던 연주들을 떠올렸다.
세르히의 연주는 물론이고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의 듀엣 연주는 정말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와 몇 번이나 듀엣 연주를 한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 음향과 음악성을 갖춘 연주를 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연습을 더 하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거의 일방적으로 타티아나의 도움을 받고 있었단 것을.
그에 비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두 친구들은 더 빨리 발전해 나가는 것 같았다.
이미 앞서나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 깜빡하는 사이 더더욱 멀어져 가고 있었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대체 난 뭘 했지? 연습량을 늘이긴 했지만 이건 그 애가 하는 것에 비하면 장난치는 수준에 불과하잖아.
어릴 땐 에르네스트와 피아노로 맞붙어도 지는 일이 드물었는데, 지금은? 한 번이라도 우세할 수 있겠어?
“……아.”
뭘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 불분명한 아나스타샤가 그나마 확실하게 선택할 수 있는 건 피아니스트로서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일단 그녀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하게 강한 피아니스트들이었고, 아나스타샤는 자신만 약해 빠진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었다.
이건 잘난 친구들을 향한 질투 같은 어설프고 유치한 감정이 아니었다. 연주자의 세계를 살아가는 피아니스트라면 반드시 지녀야 하는 향상심, 자존심의 문제다.
이번에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 두 사람만 엄청나게 큰 음악회에 섭외되자 피아노 연습에 몰두해야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명확하게 뇌리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나 멀다.
아나스타샤는 요 몇 년간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슬럼프에 빠져서 2년은 학교에서 어떻게 안 잘렸는지 모를 정도로 흥청망청 놀면서 보냈고, 올해는 타티아나와 놀 궁리밖에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드러난 것이라 생각하니 억울하진 않았지만, 그냥 자기 자신이 싫어졌다.
잠깐 우울해져 있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와 달라는 타티아나의 메시지였다. 이 와중에도 그 애가 찾아 준다는 것이 기뻤다.
옆에서 막 일어나서 나가려던 루슬란이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에게서 메시지 받았어?”
“네. 연주자 대기실 옆 복도라네요.”
루슬란도 같은 것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루슬란을 따라 나가려다가 놓치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먼저 가세요. 루슬란.”
“왜? 같이 가지 않고.”
“제 친구 데리고 갈게요.”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청중석 저편을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커다란 실루엣이 이쪽으로 오려고 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멀리 있는 티켓을 받게 된 한승우였다.
사정을 눈치챈 루슬란이 말했다.
“넌 친구들 참 잘 챙기네. 아나스타샤.”
“제가요? 별로요.”
“하하하.”
내가 친구를 잘 챙긴다고? 언제부터?
아나스타샤는 사실 타인에게 그리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의 평판도 별로 좋지 않았고.
옆에서 지켜보다가 나서서 챙겨 주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던 건 타티아나가 처음이었다. 그때부터인가, 주변 사람들을 보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잠시 기다리자 한승우가 다가왔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가자. 승우 한.”
“기다려 줘서 고마워.”
“뭘, 혼자 떨어져 있어서 외롭진 않았니?”
“음악회가 재미있어서 잘 모르겠어.”
농담 좀 해 보려는데 한승우가 진지하게 받아치니 할 말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싱겁게 웃었다.
“가자.”
홀에서 막 나와서 연주자 대기실 쪽으로 가려는데, 한승우가 무언가 찾는 것이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뭐 하니?”
“여기 꽃 같은 건 팔지 않나.”
“꽃?”
“그 애들 연주, 무척이나 훌륭했으니까 꽃을 선물해 주고 싶어서.”
아나스타샤는 멈칫하며 한승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친구로서 충실하고 싶다는 듯 진지하게 꽃을 찾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짧게 답했다.
“여기선 안 팔아. 그리고 오늘 영하 7도거든?”
“애석하네.”
“그냥 축하나 해 줘. 충분할 테니까.”
한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운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방금 듀엣 연주를 보고 한승우가 꽃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는 건 어딘가 조금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있잖아, 승우 한.”
“응.”
“너…… 음…….”
굉장히 직접적이면서도 본의 아니게 놀리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심지어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아나스타샤 스스로를 공격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말들을 떠올리다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됐어.”
“……?”
착한 애까지 쓸데없이 건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아나스타샤는 대화를 접고 어서 가자는 듯 손짓했다.
하지만 한승우는 그 자리에 서서는 막 접은 대화를 다시 펼쳤다.
“뭔진 모르겠지만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아나스타샤.”
“…….”
“네 말은 딕션도 정확하고 속도도 적절해서 너와 대화하는 건 내 러시아어 숙달에 상당히 도움이 되거든. 날 좀 도와주지 않을래.”
“아, 정말. 착해 빠져선…….”
이 애는 순 맹탕인 것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사람 놀라게 한다니까.
저런 배려를 받고도 무시하면 친구도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삐딱하게 서서 한승우를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진짜.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것뿐이지, 난 지금 우리 관계가 좋고 거기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니까.”
한승우가 알겠다는 듯 가만히 기다렸다. 아나스타샤는 남자애랑 이런 이야기 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승우 한. 넌…… 혹시 타티아나와 무대에서 듀엣을 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니?”
대답은 무척 빨랐다.
“많지.”
“…….”
분명한 대답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예상대로이긴 했다. 타티아나가 한승우에게 애정을 쏟는 만큼, 그 반대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승우의 말은 단순하게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의 실력을 듀엣 무대에서 받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에르네스트밖에 없다는 건 현실적인 상황이지.”
“그렇게 생각해?”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뭐야, 이 패배주의적 마인드는? 듀엣은 하고 싶지만 실력으로 어림도 없으니까 포기하고 있다고?
약간의 실망감.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가 틀렸다고 할 순 없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래서? 끝이야?”
아나스타샤는 말하다 보니 울컥 짜증이 나서 쏘아붙였다.
“에르네스트가 무슨 피아노 괴물쯤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걔를 어려서부터 봐 온 난 말야…….”
“난 끝났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한승우가 말을 툭 잘라먹었다. 그의 자존심을 긁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한 소리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었다.
설명해 보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내가 타티아나에게 빚진 것들은 에르네스트와 상관없는 것들이니까.”
“빚? 타티아나는 그런 말 정말 질색할걸?”
“상관없어.”
상대를 무시하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것이 아닌, 다른 가치관에서 비롯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그 감정에 섣불리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한승우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타티아나에게 갚아야 할 부분이 분명하게 있고……. 그러려면 아마 에르네스트는 물론이고 타티아나보다도 훨씬 실력이 좋아져야 할 거야.”
“……뭐? 다시 말해 봐.”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보다 내 실력을 더 키워야 해.”
이 애가 러시아어가 이렇게 미숙했던가?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농담이지?”
그리고 그 말을 뱉는 순간, 아나스타샤는 패배주의에 휩싸여 있던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움찔거리는 걸 느꼈다. 한승우는 더더욱 확고하게 말했다.
“전혀 농담이 아니야.”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나스타샤는 한승우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아서 그녀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말을 잘못 한 것 같진 않고…….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지금? 뭘 갚겠다고? 피아노 이야기 맞지?”
“피아노이기도 하고 음악이기도 하고.”
한승우는 잠시 중얼거리더니 허리를 슥 숙이며 물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 너는?”
“…….”
지금 나 도발당하고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이제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고. 아나스타샤는 지금껏 해 온 생각들에 더더욱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지금보다 백배는 더 열심히 해서 그 두 사람보다 잘하게 되어야지. 말이라고 물어?”
“한쪽은 공로 예술가고 한쪽은 우리 학교 수석인데?”
“너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지?”
한승우는 들켰다는 듯 미소를 보였고,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어서 크게 웃었다.
우울했던 마음은 조금 가셨다. 따라잡는 게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술 더 뜨는 친구가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나스타샤는 킥킥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우리가 이런 이야기 하는 거 들으면 타티아나가 섭섭해하겠는데?”
“더 잘하면 좋아할걸.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네.”
연습을 하다가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기분이 들 때, 늘 밝은 횃불로 앞장서 걸으며 따라올 수 있게 해 준 건 타티아나였다.
타티아나는 다른 친구들이 언제라도 자신을 앞질러 나가길 바라는 사람처럼 굴곤 했다. 단 한 번도 인색하게 군 적이 없다.
한승우는 조금 더 심하게 말했다.
“그 애는 피아노만 잘 친다면 남녀노소 안 가리고 심지어 외계인이라도 좋아할 애니까.”
“뭐? 아하하하, 야. 승우 한. 타티아나한테 이른다?”
“반박하진 못할 거야.”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한승우가 이어 말했다.
“너희들이 보기에 난 외계인이나 다름없을 텐데도 그 애는 내 피아노만 듣고 날 건져올려 줬거든.”
적어도, 한승우는 우리 학교와 친구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겠구나.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직감했다.
조금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는 태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남자애들은 묘하게 낭만적인 부분이 있다니까.
어쨌든 그렇다면 확실히 고쳐 주어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다.
“승우 한. 아직 러시아어가 서투른가 본데 외계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야. 알겠니?”
“……하하, 그래. 외국인.”
한승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그에게 그냥 외국인이라는 말도 떼고 친구면 충분하다고 다시 말하려다가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싶어서 다시 말을 돌렸다.
“아무튼 우리도 이런 큰 무대에 설 수 있게 되는 거다? 알겠지?”
“난 사실 큰 무대엔 별로 관심 없고, 그 애에게 갚아야 할…….”
“아, 그냥 알겠다고 해!”
꼭 이럴 때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니까?
아나스타샤는 한승우의 등을 팡팡 치면서 연주자 대기실 쪽으로 밀었다.
***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1월 1일이 되었다.
난 가족, 친구들과 이렇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모두와 축복과 인사를 나누었다.
“새해에도 모두 건강하길.”
“건강하길!”
어른들은 샴페인을 나누면서 웃었다.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사진도 찍고 에르네스트, 한승우와 단체로 찍기로 했다.
배경을 바꿔 가면서 몇 장이나 찍다 보니 여러 가지로 추억을 남길 거리가 많은 시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꽃놀이도 멎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타티아나. 인터미션 끝나기 전에 들어가. 무대 준비해야지.”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그녀의 말대로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때였다. 난 아나스타샤와 포옹했다가 떨어지며 말했다.
“고마워요. 가 볼게요.”
“응.”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도 이만 대기실로 가 보겠다고 인사를 전했다. 이젠 정말 가야 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옆구리에 손을 얹고 있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실력을 최고로 멋지게 보여 줘. 기대하고 있을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무대에 서는 시간뿐이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 달라 하고 있었다.
난 확실하게 대답했다.
“기대에 부응해 보일게요.”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인사를 하도록 남겨 두고, 난 홀로 돌아서서 연주자 대기실로 향했다.
잔뜩 들떠 있던 기분이 착 가라앉으면서 주변 소음이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협연자로서 무대를 준비할 땐 다 같이 고양되는 기분이나 왁자지껄한 무언가가 있어서 좋았지만, 난 이렇게 독주자로서 고요하게 침잠하는 기분 또한 사랑했다.
이 음악회에서 내게 주어진 마지막 무대이자, 새해를 시작하는 첫 곡을 연주하기 위해 나는 서서히 준비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