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1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높다란 탑을 두고 새 한 마리가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검고 작은, 낯익은 새다.
새의 울음소리는 그리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다. 스산하게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약간의 체념을 예감하며 입을 벌려 목소리를 내어 보려 했지만, 역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난 천천히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땅을 쓸었다. 흙먼지가 손 위로 올라왔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손가락 사이로 사라진 것인지 허공으로 날아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든다. 탑 주위를 날던 새는 어느새 그 꼭대기에 앉아 날 내려다보고 있다.
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새는 말을 할 줄 모르니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말을 할…….
“……읏.”
절로 신음이 나왔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웅크리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내 사정은 아랑곳 않고 연이어 들이닥쳤다.
꿈의 내용과 현실의 고통이 뒤섞이며 내 정신을 어지럽혔다. 난 꼼짝도 하지 않고 그것들을 마주하며 내가 있는 곳을 서서히 자각해 나갔다.
“…….”
힘겹게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평소 내 생활을 생각하면 상당히 늦은 시간이지만, 어제 연주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든 게 새벽 3시가 넘어서였다.
수면이 부족하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건 격한 연주의 반동이었다. 한계를 넘어선 연주를 허락받았다면 적어도 휴식이라도 똑바로 취해야 했다. 그 또한 내 의무니까.
난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으.”
하지만 세상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심지어 자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물러간 수마는 좀처럼 찾아올 생각을 않고 심해진 통증들만 찾아들어 쿡쿡 쑤셔 댔다.
게다가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누워 있어 봐야 뜬눈으로 보내게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질색이다.
천천히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에 젖어 있는 탓에 방 안의 공기와 직접 마주한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지 2초 만에 도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래 봐야 기분 나쁜 시간만 이어질 뿐이다.
눈앞을 가리는 머리칼을 대충 손으로 쓸어 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네.”
작은 새가 나오는 꿈은 몇 번이나 꾼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난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다. 그 새는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난 이 꿈을 악몽이라 여기고 있었다.
근래 들어 잘 꾸지 않던 꿈인데, 오늘 갑자기 꾸게 된 이유는 명백했다.
가만히 진정되길 기다렸지만, 여전히 기분이 별로였다.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낫겠다.
이불을 걷어 버리고,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마다 하는 스트레칭이지만 이렇게 아픈 와중에 하려니까 정말 하기 싫다. 혹사되었던 몸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나도 따라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게 아프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난 조금 더 주의 깊게 몸을 풀었다. 재작년 오랜 재활생활로 이러저런 운동법 등을 배워 둘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재작년…….”
발끝을 당기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또 한 해가 흘러서 오늘은 1월 1일이니까 이제 2년이 흐른 것이 맞는데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 그리고 내가 이루어 낸 것들, 도달한 위치. 모든 것들이 한순간의 꿈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헛생각하지 말라는 듯 다시 찌릿한 통증이 엄습해 왔고, 난 다시 현실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렇게 스트레칭 겸 재활 운동을 30분 정도 하니 여전히 뻐근하긴 해도 조금 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실내화를 신었다. 두 발로 서는 느낌이 이상하다. 난 걸음걸이를 이상하게 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복도로 나왔다.
혹시라도 누구랑 마주치면 어쩌나 했는데, 오늘은 연휴를 맞이해 저택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다들 쉬는 날이었다. 차가운 복도엔 내 발소리만 들렸다.
욕실로 가서 파자마를 벗어 버리곤 샤워기를 틀었다.
따뜻한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몸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물줄기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샤워실 벽에 손을 대고 버텼다.
물방울들이 머리 위를 두들긴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욕실의 타일이 어쩐지 악보처럼 보였다. 난 샤워 중이라는 것도 잊고 상념에 잠겼다.
가장 가깝게 맴돌고 있는 건 몇 가지 선율들이었다. 마법사의 제자 그리고 이슬라메이.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중앙음악학교의 깐깐한 선생님이 자신께서 제시하신 기한을 깨고 이쯤하면 되었다고 말씀하시게 만든 곡들.
불과 몇 시간 전에 연주했던 곡들이니만큼 내성부 하나하나까지 정말 또렷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기억의 저편엔 매우 흐릿한 곡들도 있었다.
“…….”
한때 정말 사랑했었지만 이젠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정신을 갉아먹고, 트라우마처럼 듣는 것도 괴로워지는 곡들.
단순히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라벨의 라 발스나 쇼팽의 마주르카. 제목들은 기억할 수 있고 또 어떤 성질을 지닌 음악인지도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음악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거울을 보자마자 모든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 내 손으로 직접 자아냈던 음악들이 철저하게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젠 작은 라디오 노이즈, 혹은 종이를 구기는 소리. 그런 것들만이 일그러져 남아 있다.
피아노 소리조차 아니었다.
“기억이…….”
흐릿하다. 많은 시간을 들인 연구로 익힌 이론과 해석, 그리고 한 가닥 정도 음악이라 할 만한 부분들이 어렴풋이 느껴지긴 하지만, 잘 모르겠다.
등골이 오싹해져 온다. 음반도 없이 오로지 기억 속에만 있는 곡을 되살리려고 하는 일을 미루고 미루다 보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을 하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흐릿했다.
구세프 선생님에게서 제목을 듣는다면 다시 생각날까? 그렇겠지?
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키가 별로 크지 않았으므로 손가락의 길이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크게 펴 보니 확실히 2년 전과는 윤곽이 달라져 있었다.
보다 많은 건반을 다루기 위해 좌우로 넓게 펼쳐지는 유연한 손과 짧게 다듬은 손톱. 피아니스트의 무기라기엔 여전히 약하지만, 그래도 기본기는 갖추어진 손이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흐릿하게나마 곡이 정해지고, 내가 쥘 수 있는 테크닉도 갖춰진 순간은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후.”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앞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간에 받아들일 준비는 이미 되어 있다.
내게 기회를 준 누군가가 내게 원하는 것이 뭔지, 내게 피아노를 허락한 타티아나는 무엇을 바라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않기에 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시도가 끝나고 나면 무언가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상념을 그치고 나니 비로소 잊고 있던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악몽 때문에 음악회의 피로를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미칠 것 같다.
일단 지금 이대론 아무것도 안 된다. 물줄기가 무거워서 못 서 있을 지경의 사람이 무슨 피아노를 쳐? 최대한 쉬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게 확실해졌다.
크리스마스까지 일주일간은 휴일이니 그 후에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이 있을 때까지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사이 혼자서 무언가 연구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일종의 도피 심리에서 비롯된 결정이라 해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약속에 기대어 의지했던 건 사실이지만, 재작년처럼 준비도 안 된 채로 오기로 달려들었다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선생님 앞에 내던져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난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
구세프 선생님이 다음 레슨 때 약속을 지키실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서 얌전히 곡을 받아 내는 것이 1차 목표다. 곡을 들고 연습해서 되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음 목표고.
그런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 목표들을 제대로 이룰 수 있도록 몸 상태를 정상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었다.
차분하게 생각하니 답은 명료했다. 너무 몰려 있을 필요는 없다. 일단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졌으니 딴생각 않고 순서대로 하면 될 것 같다.
지금 당장 뭘 한다고 해 봐야 쉬는 것뿐이었지만.
식사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몸 관리의 일환이니 의무적으로 먹었다. 오늘 하루는 드미트리도 휴가로 없어서 직접 토스트를 만들었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별관의 연습실이었다.
이 상태로 연습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단지 편하게 좀 쉬려는데 내 방에선 할 것이 없었을 뿐이다.
“읏차.”
연습실에 다다른 나는 평소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볼 때 앉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리모컨으로 홈시어터를 조작해 바흐의 푸가를 틀어 놓고 무릎엔 무릎 담요를 덮었다.
의자에 푹 파묻힐 것같이 된 상태로 손을 뻗으니 옆의 선반에 손이 닿았다. 거기엔 내가 읽던 소설책이 한 권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난 평소에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푸쉬킨, 솔제니친 등 작가를 가리지 않고 책들을 많이 읽곤 했다. 처음엔 공부를 위해 읽었는데, 이젠 순수하게 재미있어서 읽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좋아하는 책이 내 눈을, 익숙한 바흐의 푸가가 내 귀를 뒤덮었다.
엄숙한 푸가를 배경음악으로 해서 소설 속 등장인물 알렉세이 닐리치가 열변을 토해 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바로 신으로 여기며,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비로소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일종의 도그마에 심취한 알렉세이의 무거운 대사이지만 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할 수 있다면 소설 속으로 들어가 묻고 싶기도 했다.
그 말대로라면 전 벌써 신이어야 하는데요? 신은커녕 사람으로서도 제대로 되지 못한 것 같은데 이게 어찌 된 일이죠.
물론 팔랑거리는 종이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책은 반쯤 읽었다. 연습실은 조금 더 밝아졌다.
우습게도 난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수면이 부족하긴 부족한 모양이다.
다시 방에 가서 자긴 싫고, 그냥 이렇게 책이나 계속 보다가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책을 다시 드는데,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에르네스트의 메시지였다.
[새해 첫 해가 떴네. 잘 잤어?]
무슨 일이람?
평소 그와 이렇게 인사 메시지를 주고받진 않는 편이라서 약간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침 인사를 받는 게 나쁘진 않았다. 난 장난스레 답장했다.
[자는 중이에요.]
[자는 중에 메시지 하는 거야?]
[그럴걸요.]
[대단하네…….]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난 한참이나 웃다가, 이젠 반대로 그를 어떻게 웃겨 줄지 고민했다.
그런데 그는 그냥 황당해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럼 모닝콜 해 줄게.]
평소 그답지 않은 스타일의 메시지에 약간 놀라고 있는데, 진짜로 전화가 걸려왔다.
난 약간 갈등하다가 받았다.
- 타티아나.
“아…… 에르네스트?”
- 이젠 일어났지?
굳이 2시간도 전에 일어나서 책 보고 있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모처럼이기도 하고.
“아하하하, 일어났어요.”
- 지금 일어난 거면 너답지 않게 늦잠이네. 어제 많이 피곤했어?
난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살짝요.”
- ……게다가 구세프 선생님은 힘든 우리 붙잡고 굳이 바로 안 해도 될 말도 하고 말이야.
아, 에르네스트가 왜 아침부터 전화를 했는지 알겠다.
그가 말을 이었다.
- 어제 옆에서 들으니까 구세프 선생님과 약속한 게 있다던데, 뭔지 물어봐도 돼?
조심스러운 목소리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파리에 있었을 때도 그는 이렇게 걱정을 담아 전화해 주었다고 했었지.
구세프 선생님과 나누었던 말들을 옆에서 들으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묻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도 못 하고, 오늘 이렇게 전화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눈에 선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을 텐데, 지금 그렇게 답하는 건 굉장한 실례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난 최대한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제가 연주하고 싶다고 했던 곡이 있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그땐 아직 때가 아니라면서 연습을 금지시키셨거든요.”
- 뭐? 무슨 곡인데 연습을 금지시키기까지 해?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 ……?
전화 너머에서 조금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더 캐물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무겁게 받아들이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난 살짝 이야기를 돌렸다.
“에르네스트는요? 뭘 하고 있나요?”
- 곡 써.
지금 앉아서 쓰고 있는 건가?
“벌써요?”
- 벌써가 아니라 늦었어. 다음 레슨까지 일주일 남았는데 그사이 써 가야 하니까.
“꼭 첫 레슨 때 해야 할 필요는…….”
- 있지.
그가 딱 잘라 말했다. 난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꼈다.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에게 언제까지 곡을 써 오라고 시간을 정해 두진 않았지만, 이 시험은 그가 작곡에도 재능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치르는 시험이었다. 천재임을 입증해야만 한다.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좋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있겠네요.”
-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후후, 알아요. 열심히 하세요, 에르네스트. 저도 열심히 할 테니까.”
- 너도 열심히?
“열심히 쉬려고요.”
-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그가 중얼거렸다. 난 열심히 쉬겠다는 게 농담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