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화
루슬란은 커피를 들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자마자 동생의 얼굴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하마터면 커피를 엎지를 뻔했다.
“휴…….”
간신히 커피를 테이블 위에 제대로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타티아나의 모습은 막 지나가 버렸다. 루슬란은 바로 채널을 돌려 다른 뉴스 채널을 찾았다.
간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연말을 맞아 사람들이 거리에서 축제를 즐겼던 일, 대통령의 새해 인사,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나온 러시아 국민 방송 푸른빛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순간적이긴 하지만 푸른빛의 시청률을 꺾은 송년 제야 음악회에 대한 뉴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음악회를 빛냈던 연주 영상이 차례로 나왔다. 모든 것을 청중석에서 직접 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보아도 굉장하게 느껴지긴 했다.
그리고 거의 막바지에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 등장했다.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고 강렬한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은회색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는 마치 허공을 손끝으로 스쳐 내리는 것처럼 수백 킬로그램의 피아노를 연주해 냈다.
그 옆모습은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
이렇게 보니 어쩐지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저 애의 대단함을 알아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저명한 음악원 교수라고 소개된 한 남자가 나와서 이 음악회에 대한 감상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 굉장히 수준 높은 연주를 보여 준 어린 음악가들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이 음악회가 지속되는 한 러시아가 클래식 음악계의 최선두 자리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호평이었다. 루슬란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자제하지 않고 한껏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이어진 장면을 보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피아노 듀엣 무대를 펼치는 영상이었다.
그 무대는 루슬란이 듣기에도 확실히 대단했다. 러시아의 신성이라 불리는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의 조화는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만큼이나 인상적이고 화려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혼자 무대에 서서 연주하는 것을 볼 때랑은 달리 오빠로서 걱정이 앞선다.
딱히 에르네스트를 신경질적으로 대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연주자들이 사적인 감정으로 한 무대에 서지 않는다는 건 이해하고 있고, 에르네스트가 생각보다 점잖고 괜찮은 녀석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타티아나가 이제 겨우 두 살이라는 생각에 걱정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혹여나 이런 생각을 타티아나가 안다면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그래도 아나스타샤와 가장 친하게 잘 붙어 다니는 것 같으니 걱정이 그나마 덜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처한 사정을 알고 있는 또 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가족인 루슬란보다 더 어른스럽게 타티아나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루슬란은 아나스타샤라면 그가 느끼는 걱정에도 공감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작년에 잠깐 대화를 나누었을 때를 떠올리면 실제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고마운 친구였다.
그나저나…… 난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질 정도인데, 얘는 아직도 자는 건가?
“의외네.”
루슬란은 중얼거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거의 정오에 다다른 시간이었다.
물론 타티아나는 전날 큰 음악회를 치른 상태이지만, 그녀는 연주회 끝에 탈진한 후에도 새벽같이 일어나곤 했다.
평소엔 새벽 3-4시면 일어나는 걸 보면서 제발 조금 더 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타티아나의 생활패턴이 익숙해진 상황에서 이렇게 늦어지니 약간 이상했다.
생각난 김에 깨워서 점심이라도 같이 먹어야겠다 싶어서 루슬란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타티아나의 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루슬란은 방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타티아나. 나야.”
하지만 방 안에선 아무런 답도 없었다. 루슬란은 조금 더 강하게 방문을 노크하고는 알아서 일어나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꽤 오래 지나도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귀가 예민한 애라서 이 정도로 시끄럽게 두들겼으면 바로 일어날 텐데.
혹시나 싶어 문을 열어 보았더니 바로 열렸다.
침대 위는 아무도 없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설마.”
루슬란은 곧장 별관으로 향했다.
피아노 소리가 나지 않는 별관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루슬란이 깜빡 속을 만도 했다.
조심스레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락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는 타티아나가 있었다.
“…….”
깨워야겠단 생각은 싹 사라졌다.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난 걸까. 짐작도 안 간다.
루슬란은 천천히 타티아나에게 다가갔다. 타티아나는 무릎에 담요를 덮고 두 손은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옆으로 하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잘 거면 편하게 자기 방에서 자면 될 텐데. 타티아나는 일부러 이렇게 조금 불편한 상황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1월 1일의 햇살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연습실에서 루슬란은 잠시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누군가 앞에 서 있다는 걸 느꼈는지 타티아나가 슬며시 눈을 떴다.
“……오빠?”
살짝 풀려 있던 눈빛이 바로 돌변했다. 잠든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어깨를 꿈틀거리다가 담요를 토닥이고,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손등을 입가에 대 보기도 했다. 루슬란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타티아나가 약간 불만이 서린 눈으로 물었다.
“왜, 왜 그러시나요?”
“아니, 밥 먹자고. 점심이야.”
“……아.”
불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슬란은 결국 웃어 버렸다.
“가자, 오늘은 드미트리도 없고 아버지도 나갔으니까 우리끼리 뭐 먹어야 해.”
“아, 그렇죠.”
“그나저나 여기서 뭐 했어? 피아노 연습은 안 한 것 같은데.”
주섬주섬 담요를 개던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더니 대답했다.
“열심히 쉬었어요.”
루슬란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
점심 식사는 오빠와 간단하게 만들었다.
드미트리가 없는 주방의 넘버 투는 바로 나였으니 내가 도맡아서 요리를 하겠다고 했지만, 루슬란 오빠는 오늘따라 내게 뭔가 시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같이 준비하기로 타협을 봤다. 그래 봐야 거창하게 만들 건 없었고, 계란탕을 끓이고 냉동 펠메니를 다시 찌는 사이 오빠가 블리니를 몇 장 구웠을 뿐이었다.
혹시 블리니를 태워 먹거나 하진 않을까 호시탐탐 지켜보았는데, 예상외로 오빠는 요리를 잘 해냈다. 블리니를 뒤집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가볍게 차려진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 식사를 하고, 티타임까지 즐긴 뒤에 난 다시 별관으로 돌아왔다.
“…….”
아직 피아노를 칠 컨디션은 전혀 아니고……. 책을 읽을까 아니면 홈시어터로 영화를 볼까.
그런데 책도 영화도 아닌 전화를 받아야 할 상황이 왔다. 아나스타샤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가 활기차게 큰 소리로 인사해 왔다.
- 타티아나. 올해도 잘 부탁해!
“어? 또요?”
얼떨결에 그렇게 답했다. 밤에 해피 뉴 이어 인사는 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말을 뱉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바보도 아니고, 그냥 새해 인사는 인사로 받아 주면 될 일인데.
아니나 다를까 아나스타샤가 살짝 삐친 투로 말했다.
- 간밤에 했다고 해서 이젠 안 하는 거야? 아직 날짜 안 지났는데.
“아하하하, 그런가요? 미안해요.”
- 그래, 야박하게 굴지 말자 우리.
“좋아요. 음…… 아나스타샤도 올해 다시 잘 부탁해요.”
- 응.
진지하게 사과하고 인사하자 다시 웃음기를 되찾은 아나스타샤가 화두를 던졌다.
- 잘 쉬고 있니?
“예. 덕분에요.”
- 또 그냥 쉬고만 있지?
“아뇨, 열심히 쉬고 있어요.”
- ……예상도 못한 방법으로 말문이 막히게 하네?
오늘 세 명을 어이없게 만드는데 성공한 것 같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큼큼 하는 기침 소리를 냈다. 그렇게 말문을 틔게 한 뒤에 그녀가 말했다.
- 내 말은…… 어제 음악회에 대한 기사 같은 거 모니터링 안 하고 있지 않냔 말이야. 타티아나 넌 평소 그런 거 전혀 안 하니까.
“기사요?”
- 응. 다른 사람들이 다 쉬어도 뉴스나 기사 만드는 사람들은 안 쉬니까. 지금 음악회 이야기 꽤 많이 나왔어.
연주자들이 연주회 후에 쉬면서 반응이나 평가 등을 찾아보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난 스스로 그런 걸 잘 찾아보지 않는 편이었다. 요즘 들어 점점 더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자체를 잘 보지 않기도 하고.
그 때문인지 내겐 이렇게 뉴스 등을 알려 주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지금 아나스타샤가 말하기 전에, 아까 점심 식사를 할 때 루슬란 오빠가 먼저 말해 주기도 했고.
“그리고 보니 아까 루슬란 오빠가 텔레비전에 제가 나왔었다고 이야기했긴 했어요…….”
- 그래?
“예. 그냥 스쳐 지나가듯 나왔나 했지만요.”
- 스쳐 지나가긴 무슨?
아나스타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더니,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 타티아나. 지금 바로 인터넷에 송년 음악회 검색해 봐. 상당히 주목받고 있으니까.
“……잠시만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난 아나스타샤가 시키는 대로 태블릿 컴퓨터를 켜고 검색했다. 음악회를 알리는 예전 글들이 몇 개 있었고, 바로 몇 시간 전에 올라온 기사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난 그중 한 기사를 찾아 들어갔다.
메인 사진은 돔 무지키 스베틀라노프홀의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이어지는 기사는 내 생각보다 훨씬 상세한 감상이었다.
음악회의 시작을 연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으로 시작해서 이어지는 곡들의 구성과 이 흐름을 잘 따라가는 것만 보아도 이 클래식 음악 전문 기자의 전문성이 잘 드러났다.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불새, 우리가 듀엣 연주했던 마법사의 제자, 내가 연주했던 이슬라메이. 모두 엄청난 찬사가 덧붙여져 있었다.
난 이슬라메이에 대한 기사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혹시 테크닉적인 부분에 치중된 이야기가 있진 않을까 살짝 걱정했었는데, 전혀 그럴 필요 없었다. 빠르지만 성급하지 않은 카프카스 지방 특유의 음악성 등, 내가 드러내고자 했던 부분들에 대해 꽤나 만족스러운 대답이 바로 이 기사에 실려 있었다. 심지어 다른 연주들보다 훨씬 더 길고 자세한 표현들이 있을 정도였다.
한참을 기사를 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계속 보고 있다간 중독될 것 같다.
“제 이슬라메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들렸나 보네요…….”
- 그렇지? 내가 본 기사들에서도 단순히 난곡을 연주한 것만으로 보고 있지 않더라. 꽤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 같아. 이후에 인터뷰나 협연 요청 같은 거 많이 들어올 것 같지 않아?
인터뷰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협연은 환영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묶으면서, 내게 짧게 전했다.
- 축하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 네가 잘 해내서 정말 기뻐.
이 진심 어린 축하를 전화를 통해 받는다는 게 아쉬웠다. 지금 아나스타샤가 내 앞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나 역시 진심으로 답했다.
“모두 아나스타샤 덕분이에요.”
- 내가 뭘, 네 발목이나 안 잡…… 아니, 어쨌든 나도 이번 콩쿠르 잘 하게 되면 모두 네 덕분이니까. 알겠지?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던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도 그게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말을 돌렸다. 그녀는 아직도 어떤 콩쿠르에 참가하는지 내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면 정말 어떻게 축하해 주어야 할지 고민이다.
아나스타샤는 콩쿠르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킥킥 웃으며 말했다.
- 아무튼, 휴일 내내 난 연습이나 해야겠네. 타티아나, 휴일에 뭐 할 거야?
“그냥…… 딱히 뭔가 하려고 하지 않고 쉬려고 해요.”
- 집에서?
“예. 그래야죠.”
올해 첫 레슨을 받을 때까지 컨디션 관리만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답했는데, 아나스타샤는 내가 또 집에 틀어박혀 있겠다는 투로 말하자 가만두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넌지시 제안했다.
- 그러지 말고 우리 내일 하루는 밖에서 놀까? 요 근래 우리 서로 연습하느라 바빴잖아. 난 더 해야 하지만 휴일인데 하루 정도야 쉬고 싶기도 하네.
“그런가요?”
- 응. 어때?
“좋아요.”
난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즉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