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03화 (403/1,277)

##  403화

외출한다고 했더니 빅토르가 따라와 주었다.

저택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거의 다 휴가 중이거나 아니면 저택에 상주하되 일을 쉬는 중이었지만, 빅토르는 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괜히 쉬는 날에 외출하겠다고 해서 내 운전과 경호를 맡고 있는 빅토르를 움직이게 했나 살짝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빈말로라도 숙소에서 쉬면 어떻겠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빅토르는 이상할 정도로 내가 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걸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올해로 7년째 날 보고 있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가도…… 가끔은 묘한 기분이었다. 대부분 감사함이 전부였지만.

“눈이 안 내려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자 빅토르가 답했다. 눈이 오면 운전하기에도, 놀러 다니기에도 별로 좋지 않다. 오늘은 날씨 하나는 정말 좋았다.

한 가지 문제라면 1월 2일이라는 점이지만.

“그런데 오늘은 영업하는 가게들이 적을 겁니다. 아가씨.”

7일 크리스마스까지의 긴 휴일 동안 쉬는 건 저택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쉰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아나스타샤와 미리 했었던 이야기였다. 그녀는 연휴에도 여는 곳들을 몇 곳 안다면서 걱정 말라고 했다.

“예, 알고 있어요.”

“그럼…… 알겠습니다. 혹 원하는 것이 없거나 문제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그렇게 할게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빅토르는 오호트니 랴트 역 근처에 나를 내려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나스타샤를 직접 데리러 갔을 텐데, 오늘은 그녀가 지하철로 오겠다고 해서 역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역 쪽으로 향하면서 난 혹시 거리에 아나스타샤가 있지 않을까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오래 걸리지 않아 내 눈에 익숙한 한 사람이 포착되었다.

큰 키에 코트를 입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뉴스보이 캡을 푹 눌러쓴 머리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쪽을 돌아본다. 날카롭게 서 있던 눈매가 환한 웃음으로 누그러졌다.

아나스타샤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난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앗, 오래 기다렸나요?”

“아니, 아니. 방금 왔어.”

우리는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했다. 바로 어제 봤는데도 또 보니 반갑다. 근래 늘 교복이나 드레스만 입고 보다가 밖에서 이렇게 사복으로 본 건 오랜만이기도 하고.

그녀가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쿡 찔렀다.

“따뜻하게 입고 왔네?”

“옷이 무거워요.”

“그래 보여. 그래도 일단 요 앞에 조금만 가 보지 않을래? 트리 엄청 예쁘게 해 놨더라고.”

“그럴까요?”

따뜻한 곳에 들어가서 외투를 벗는 것도 좋겠지만 일단은 걷기로 했다. 거리를 이렇게 잘 꾸며 놨는데 구경하지 않으면 손해인 것 같기도 하고.

성 바실리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난 몇 번이나 감탄했다. 중간엔 아예 머리 위를 조명으로 덮어 버려서 한낮인데도 별들이 떠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저마다 한 번씩은 고개를 들어 장식들을 구경했다. 다들 발걸음이 조금 들뜬 것처럼 보이는 것도 내 착각만은 아닌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기분 난다. 어때? 타티아나.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아나스타샤도 기분 좋게 웃으며 물었다. 난 이 화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

“반짝반짝하네요.”

“……그게 다야?”

너무 삭막했나? 난 더 무어라 덧붙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내 감상 같은걸 묻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생일이잖아! 네 생일! 설마 또 까먹은 거야?”

“아…… 아뇨, 아니에요.”

작년엔 진짜 생각도 못 하고 있었지만 올해는 아니다. 난 빠르게 변론했다.

“안 그래도 작게 파티를 할 생각이었어요. 정말이에요.”

“……왜 못 믿겠지? 작년에 너무 놀랐던 게 아직도 기억나네. 뭐…… 이젠 생일을 그냥 지나친 것도 이해는 하지만.”

“정말 이번엔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버지에게 확인해 보셔도 좋아요.”

파티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가족들과 상의도 마친 일이라서 자신 있게 말했더니 아나스타샤는 그렇게까지 의심한 건 아니라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튼…… 다행이네. 나도 가도 돼?”

“당연하죠. 무슨 말씀이세요. 꼭 오셔야 해요.”

“알았어. 고마워.”

아나스타샤가 모자를 다시 고쳐 쓰더니 어딘가 조금 더 편안해진 얼굴로 앞장섰다. 잘은 모르겠지만 작년에 내가 내 생일을 몰랐던 일을 꽤 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 피아노 이야기가 아닌 잡담을 나누고, 장난을 치면서 거리를 거닐었다. 난 음악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고 온전히 즐거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약 15분 정도 걷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던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다.

커다란 트리가 3개나 있었다.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트리가 가장 컸는데, 그 꼭대기에서 주위로 빛나는 조명이 쭉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조명으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허공에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다.

“너무 예쁘네요. 연말엔 쭉 연습하느라 이쪽엔 처음 와 봤어요.”

“나도 그랬어. 잘해 놨다, 정말.”

“그러게요……. 저 트리 만드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우리도 뭔가 만들어서 보여 주는 입장이라 그런가, 괜히 그런 게 신경 쓰이고,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나 싶어질 정도였다.

이 트리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만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생각인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은 작품을 앞에 두고 우리도 예의를 갖춰서 해야 할 건 해야지.”

“예의요?”

“응. 이리 와.”

트리를 만든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서 박수를 보낼 수도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야 예의를 보일 수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아나스타샤가 내 어깨를 안고 다른 팔을 쭉 뻗어 스마트폰을 들고 트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은 갑자기 찍은 건데도 정말 잘 나왔다. 크리스마스라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제가 찍었으면 절대 이렇게 안 나왔을 거예요.”

“왜? 너도 스마트폰 좋은 거 쓰잖아.”

“그게 아니라 팔이 짧아서요.”

“……어?”

친구들과 있을 때 내가 찍은 단체 셀프 사진은 늘 화면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고 잘 안 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숨을 못 쉬게 된 사람처럼 눈만 깜빡이더니,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하하, 아, 팔이? 짧아서?”

“……웃지 마세요. 괜히 말했어요.”

“아니야, 아니……. 콜록콜록.”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웃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까지 했다. 지금까지 그녀와 만나면서 이렇게까지 웃겨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한참을 깔깔거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진짜 엄청 웃었네. 배 아파.”

“다 웃었나요?”

“아, 미안해. 타티아나.”

이렇게 웃는 아나스타샤를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일부러 새된 목소리를 냈더니 그녀가 내 팔을 붙잡고는 달래듯 말했다.

“그게 아니라……. 난 네가 피아노를 얼마나 잘 치는지 알잖아. 그런데 팔이 짧다고 투덜거리는 말을 들으니까 너도 고민하는 게 있구나 싶기도 해서…… 아, 물론 지금 피아노 이야기를 하던 건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긴 한데요……. 제가 왜 고민이 없겠어요?”

“미안해. 미안. 그런 뜻은 아니야.”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진 알 것 같다. 지금 이 짧은 순간만큼은 내 실력이 그녀보다 뛰어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간신히 한계를 비집고 얻어 낸 한 줌의 테크닉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피아니스트로서 타고난 조건을 갖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나스타샤 쪽이었다.

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전에도 몇 번 말했잖아요. 전 아나스타샤만큼만 키가 컸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닌데.”

“……지금 몇이에요?”

“얼마 전에 재 보니까 173.”

“그게 어떻게 큰 편이 아니에요?”

키 큰 사람들도 많지만 어쨌든 평균이 165cm다. 열다섯 살에 173cm인 아나스타샤는 누가 봐도 큰 편에 속했다.

특히 160을 겨우 넘겨서 평균에도 못 미치는 내가 보기엔 더더욱.

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신년 소원을 새로 빌어야겠어요. 키가 크게 해 달라고 말이에요.”

“아하하하, 하하하.”

“웃지 마세요. 저 지금 진지하니까요.”

“알았어. 나도 소원 새로 빌어야겠네? 네 키가 크게 해 달라고.”

“…….”

“그만할게.”

이번엔 나도 모르게 약간 정색했나 보다. 아나스타샤가 곧바로 사과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광장을 한 바퀴 돌자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슬슬 영하권의 날씨가 체감되기 시작했다.

“일단 어디 잠깐 들어갈래?”

“그럴까요.”

따뜻한 차가 간절했다. 우리는 광장에서 빠져나와 옆 상점가로 들어섰다.

빅토르가 경고한 대로 문을 닫고 영업하지 않는 가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도 아나스타샤도 막연히 우리 두 사람이 앉아 차 마실 곳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긍정적이었던 것도 30분 정도였다. 걷다가 걷다가 결국 지친 아나스타샤가 외쳤다.

“어떻게 차 마실 곳도 하나 없어? 미쳤나 봐. 진짜.”

“역시 연휴니까 그런가 봐요.”

“아니, 그래도 왜 카페만? 꼭 한두 군데는 연단 말야. 뭐지? 왜 다 닫은 거야? 요즘 경기가 그렇게 안 좋나?”

어제 전화통화를 했을 때 아나스타샤는 연휴에 가게들이 영업을 안 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몇 군데는 여니까 걱정 말라고 했었다. 실제로 곳곳에서 레스토랑 등은 영업을 하고 있었고.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카페는 한 군데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난 그녀가 괜한 책임감 같은 건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괜찮아요. 뭐 어때요?”

“뭐 어떻긴. 춥잖아.”

“전 아직 괜찮아요. ……음, 차로 돌아갈래요?”

“굳이 휴일에 나와선 갈 곳이 없어서 차에 가는 건 빅토르한테 조금……. 아, 일단 따뜻해 보이는 곳이라면 아무 데나 가 보자.”

결국 우리는 카페는 포기하고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곳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보니 이전까진 눈에 보이지 않던 곳들도 몇 군데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들어갈래? 진짜 따뜻할 것 같아.”

“그러네요.”

향초를 취급한다고 되어 있는 작은 가게였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따뜻하긴 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훈훈한 공기가 확 끼쳐 오며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초를 다루는 가게인 만큼 온갖 향이 섞여 있는 공기였다. 하지만 난잡하지 않고 조화롭게 느껴졌다.

내부는 모던한 스타일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오너로 보이는 한 남자가 우릴 반겼다.

“어서 오세요. 새해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감사합니다. 저기…… 저희 처음인데 향초 만드는 거 배울 수 있나요?”

“물론이죠. 여기 앉으세요. 밖에 춥죠? 차를 내 드릴게요.”

즉흥적으로 결정된 향초 만들기 교습이지만 정말 잘 선택한 것 같다.

우린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향초를 만드는 기본적인 방법을 배웠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초의 원료인 왁스를 녹여서 틀에 굳히는 것이지만, 왁스와 오일 그리고 염료의 양과 온도를 정확하게 맞춰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기도 했다.

우리 앞에 준비된 물건들도 많았다. 핫플레이트와 저울, 온도계, 비커. 그리고 수십 가지 종류의 오일과 염료, 왁스, 용기, 심지, 데커레이션에 쓰는 드라이플라워와 반짝이는 글리터 등등. 초를 만드는 게 아니라 마법약을 제조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 오일들은 어떤 점이 다른 건가요?”

“이쪽은 자연적인 향을 담은 내추럴 에센셜 오일이고, 이쪽은 조향사가 만든 프래그런스 오일입니다.”

“그러면 내추럴 쪽이 좋겠네요.”

“하하, 꼭 그렇지도 않아요. 내추럴은 가격도 비싸고 다루기도 어렵고 향을 내기도 쉽지 않거든요. 처음이라면 프래그런스 오일 쪽을 사용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그런가요?”

이야기를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화이트 초콜릿처럼 보이는 왁스들을 비커에 넣어 정확하게 계량하고, 핫플레이트에 올려 녹였다. 그리고 온도를 맞추어 적당량의 오일과 염료를 넣고 잘 섞어서 용기에 붓고 식히는 것까지.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서 정확하게만 하면 된다는 점이 요리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 하시는 것치고는 정말 잘하시네요.”

우릴 가르쳐 주던 사장님이 칭찬할 정도였다. 나도 아나스타샤도 첫 결과물이 마음에 들게 잘 나와서 다행이었다.

바로 불도 붙여 보았다. 향초는 조용히 타들어 가면서 은은한 불빛을 냈다.

“잘 타네.”

“그러네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자 아나스타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른 것도 만들어 볼까. 심지를 나무로 만들 수도 있다던데.”

“……아예 집에 재료들을 사 가지고 갈까요?”

“집에서 만들게?”

“겨울이니까요.”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정도였다.

아나스타샤는 난방도 조명도 잘 되는 집에 살면서 초를 왜 만드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도 좋겠네.”

그저 웃으며 그렇게 고개를 끄덕여 줄 뿐이었다.

난 다시 멍하니 촛불을 바라보았다. 내가 방금 섞어 준 왁스와 오일 그리고 염료가 녹으면서 심지로 향하고, 작은 불꽃으로 타오른다.

가만히 타게 둔다면 이 초는 밑바닥까지 완전히 다 탈 때까지 타면서 향과 빛을 내겠지.

하지만 중간에 끈다면 굳어 있는 그대로 계속 보존할 수도 있을 테다.

“…….”

들려선 안 될 촛불의 소리가, 내 귀에는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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