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05화 (405/1,277)

##  405화

천천히 건반에서 손을 거두었다.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두웠지만 슬슬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침 연습은 이쯤하자.

“……음.”

연초 휴일도 끝났고 오늘부터 시작된 내 평범한 스케줄은 이렇게 아침 연습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휴일간 1학기 기말시험 공부를 하고 향초를 만들거나 요리를 하기도 하면서 상대적으로 피아노엔 그리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쉬는 걸로 컨디션을 완벽하게 되돌려 놓긴 했으니 아무 의미도 없던 시간은 아니었다.

난 건반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손가락을 뻗어 터치했다. 정확한 의도대로 깊이를 가늠했다.

1cm 남짓 들어가는 건반의 깊이를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의 깊이까지 쪼개서 느끼고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했다.

이 감각은 컨디션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기도 한다. 자기관리를 똑바로 하지 못해서 감각이 둔해지면 제대로 건반을 느끼기 힘들다.

“…….”

다시 확인해 본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난 조금 더 천천히 손끝을 움직이면서 건반에 얽혀 있는 모든 것들의 움직임을 분명하게 읽어 들였다. 이 피아노의 모든 것이 명료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손가락을 휘두르며 아르페지오로 건반을 휙 타오르다가, 다시 반음계 스케일로 주르륵 내려왔다. 그렇게 음계를 가지고 놀면서 마지막 확인을 마쳤다.

칼날의 날이 잘 들도록 날카롭게 세우고,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도록 닦아 놓은 기분이다. 이 정도면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셈이나 다름없다.

난 건반 덮개를 덮고, 일어섰다.

오늘은 드미트리를 돕지 않고 등교 준비에만 신경 썼다. 혹여나 빼놓은 것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난 잠시 눈송이를 바라보다가,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빅토르에게 다가갔다.

“준비 다 됐어요, 빅토르.”

“그럼 가실까요? 오늘도 좋아 보이시는군요, 아가씨.”

“그런가요?”

“학교 가는 날이라 그러신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몇 주간 시험 기간 아닙니까? 이 기간에 학교 가는 걸 좋아하는 분이라니…….”

빅토르는 새삼스레 그런 말을 했다. 아직도 빅토르는 학교에 가는 게 좋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난 그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차에 올랐다.

소로킨은 평소보다 훨씬 느릿하게 차를 몰았다. 그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눈 때문에 도로 상황이 별로 좋지 않으니 천천히 가겠습니다. 이 차의 타이어는 눈길에도 잘 미끄러지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전하게 모시는 게 제 일이기 때문에.”

“알겠어요, 소로킨.”

난 그가 운전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든 반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살면서 그만큼 운전을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도 했고.

빅토르도 비슷한 생각인지 잔뜩 추켜세우는 투로 말했다.

“혹시라도 사고 나면 자그마치 20년 무사고 경력 깨지는데, 절대 안 되죠. 안 그렇습니까? 소로킨.”

“빅토르…… 내가 그 경력을 지킬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내 본분에 충실했기 때문이지 경력 자체에 집착해서가 아니다.”

“갑자기 멋있는 말 해 버리시네.”

“……아가씨 내리시면 이야기 좀 하지.”

“아가씨, 전 오늘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모실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빅토르는 그렇게 웃으면서 과장스럽게 농담했다. 하지만 백미러로 보이는 소로킨의 눈빛을 본 나는 이 농담이 정말 유언이 될지도 모르겠단 기분을 느꼈다.

제발 살려만 달라고 같이 빌어야 하나……? 하지만 빅토르의 자업자득인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로 향했다.

일주일 만에 뵙는 미하일 선생님에게 오늘 받아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았다. 바로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시험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음악회에 올렸던 곡들에 대한 레슨도 다시 받고 싶었다. 레슨 시간만으로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에게도 들어야 할 게 있다.

재작년에 약속했었던 곡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엄청나게 앞당겨진 것이니까 꼭 오늘 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금만 더 미루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적어도 기말 시험이 끝나서 바쁜 일정이 끝난 뒤, 아니면 다음 학기까지 마쳐서 9학년을 제대로 끝내고 긴 여름 방학 사이에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난 도피 심리인지 현실적인 판단인지 아직도 분간이 안 가는 그런 여전히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마음이든 간에 구세프 선생님은 분명 다음 레슨 때 내게 주시겠다고 하셨으니까 그 약속을 지키실 터였다.

이 또한 내 운명이라 생각한다. 연주자는 늘 준비된 상태에서만 무대에 오르는 게 아니다. 가끔은 머리가 어지럽고, 긴장감에 곡도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패닉 상태에서도 무대에 올라야 하는 게 바로 연주자였다.

난 앞으로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운명은 미적지근하게 장난 따윌 치지 않았다.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 앞엔 구세프 선생님이 서 있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혹시나는 역시나인가.

난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

그런데 내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를 들으면서도 구세프 선생님은 미동도 앉고 레슨실 문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난 선생님을 부르는 대신 가까이까지 다가가서 살짝 훔쳐보려 했다. 그런데 워낙에 체구가 크셔서 뭘 하고 계시는지 잘 안 보였다.

각도를 어떻게 해야 보일까 싶어 알짱거리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휙 돌아보았다.

“…….”

선생님이 말없이 날 본다. 무언가 고민하는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심술궂게 한 마디 던지셨을 분인데 조용하시니까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난 그제야 구세프 선생님이 문 앞에 뭘 붙이고 계셨는지 볼 수 있었다.

[오늘 레슨은 없음. 추후 보충 있을 예정.]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선생님?”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만히 부르자, 구세프 선생님이 그제야 말씀하셨다.

“레슨 받으러 왔나, 타티아나.”

“예. 저번 음악회 곡도 피드백하고 이번 기말 실기곡도…… 그런데 미하일 선생님은 안 계신가요?”

“그래.”

이상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레슨을 이렇게 예고도 없이 펑크 내시는 분이 아니신데……

뭔진 잘 모르겠지만 바쁜 일이 있으시겠지 싶다. 나중에 보충해 주신다니까 괜찮겠지.

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다음으로 내 레슨을 봐 주실 수 있는 구세프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아니, 나도 뒷정리를 좀 하고 미하일을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오늘은 시간이 안 될 것 같군. 미안하다.”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문득, 별생각 없이 볼 상황이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심각한 일인가? 지금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아 보인다.

난 선생님들의 일까지 물어도 될지 말지 잠시 고민해본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신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혹시 미하일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내가 정말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끼셨는지 구세프 선생님이 조금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마라. 내일이면 돌아올게다.”

“…….”

“오늘은…….”

구세프 선생님은 말씀을 하시다 말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냥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라.”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게 말해 줘도 되리라 생각하셨다면 말씀해 주셨으리라 생각한다. 난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세프 선생님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오늘 레슨은 다음으로 미뤄질 테니 나중에 스케줄 표 확인해라. 오늘은 개인 연습 하고.”

“알겠습니다. 선생님.”

구세프 선생님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잠시 날 내려다보다가 짧게 말했다.

“내일 보자. 타티아나.”

그리고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셨다. 난 우두커니 서서 그 커다란 등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뭔가 이렇게 그냥 가시진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늘 생긴 일이 심각한 일이라서 나까진 신경 쓰지 못하신 거겠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레슨이 미뤄진다고 해서 뭔가 잘못되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이대로 연습실에나 가야 하나 싶어서 막 돌아서는데, 익숙한 여학생이 막 손을 흔들었다.

“타티아나 선배님!”

8학년의 안나였다. 재작년 내 위클리 연주회 이후로 친해지고 싶다며 따라다니던 아이다.

리처드와 피아노로 대결을 했을 때 옆방에서 듣고 있다가 끼어들어선 착각으로 내 피아노를 마구 비난하고는 그게 미안했는지 날 서먹하게 대하긴 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날 친한 선배로 대해 주고 있었다.

난 올해 처음으로 만난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나. 올해도 건강하시고, 잘 부탁해요.”

“아…… 저도요!”

안나는 무언가 길게 말을 하려다가 그냥 저도요라는 말로 대신했다. 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나도 오늘 레슨인가요?”

“맞아요. 지금은 아니고 선배 다음 다음 순번이긴 한데, 오늘 미하일 선생님이 학교에 안 계셔서 레슨 없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확인해 보러 왔어요.”

“소문이요?”

“예. 어…… 그런데 문에 붙은 거 보니까 진짜네요.”

안나는 내 어깨 너머로 레슨실 문을 확인하고는 실망한 듯 말했다.

난 그런 것보다 방금 안나가 말한 소문이라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무슨 소문인가요?”

“못 들으셨어요?”

내가 잘 모르는 것 같자 안나는 내게도 알려 주어야겠단 사명감을 약간 느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 수업에도 안 들어오셨거든요. 무슨 일인가 했는데 애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미하일 선생님의 옛날 제자분, 그러니까 옛날에 졸업한 선배가 오늘 아침에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다고요.”

“……예?”

상상도 못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심각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구세프 선생님이 왜 내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으셨는지 알 것 같았다.

안나가 알고 있는 것들을 더 덧붙였다.

“성함은 잘 모르겠어요. 우리 학교 졸업하고는 프랑스 음악원에 계시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분이라고 들었는데…… 제 친구 말로는 미하일 선생님이 가족 대신으로 가셨을 것 같다고도 하네요. 잘 모르겠지만요.”

소문이 정말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서서히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오전에 부고를 접하고 급히 떠나신 것 같았다. 만약 장례식이었다면 이렇게 예고도 없이 가실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도 아니고 음악학교의 선생님이었던 미하일 선생님이 움직이신 걸 보면 아마 사고를 당하신 분은 다른 연고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하일 선생님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거기까지 빠르게 생각이 닿고, 그다음은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어졌다.

“타티아나 선배님?”

“아, 안나.”

“혹시 아시는 분이셨어요……?”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안나는 내게 괜한 말을 전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난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가능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아뇨, 전 오늘 미하일 선생님이 안 계신 것도 방금 알았어요.”

안나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새해부터 사고 당하신 분도 안됐지만, 미하일 선생님도 참 안되셨어요.”

“……그렇네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복도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도 안나도 이런 분위기는 원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결국 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전 이만 연습하러 갈게요. 다음에 봬요.”

“잘 가요, 안나.”

또 당분간 그녀와 어색해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만나면 잘 대해 줘야 할 것 같다.

“…….”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난 그간의 경험으로 약한 공황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터득하고 있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곤두세우면서, 걸음을 세며 연습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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