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06화 (406/1,277)

##  406화

연습에 몰두하다 보니 벌써 2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가끔 이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시간이라는 것 자체를 피아노에 그대로 쏟아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그동안 뭘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고 그냥 하나로 죽 이어진 선율만이 귓가에 남아 맴돌게 된다.

나쁘지 않았다. 난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

허리를 펴고, 스마트폰을 들고 잠시 망설였다.

미하일 선생님에게 전화를 해 보는 게 맞을까? 지금 그분의 제자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안 좋은 일로 자리를 비우신 분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안 그래도 제자의 일로 충격이 크실 분에게, 또 다른 제자인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지어 내겐 그럴 자격조차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

화면이 번쩍였다. 난 멍하니 있다가 깜짝 놀라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나톨리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누나 어디 있어요?]

문득,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섬뜩해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난 지금 너무 예민해져 있었다. 메시지 하나 보고 이렇게까지 긴장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난 쓸데없는 생각들을 모두 치워 버리고 천천히 이 연습실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아나톨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세요?”

“들어오세요.”

천천히 문이 열리고, 들어온 아나톨리는 날 발견하고는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누나.”

그 미소와 말 한마디에 난 안심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쁜 일은 아니겠구나.

“무슨 일인가요?”

“오늘 좋은 일이 있어서요. 가장 먼저 누나에게 알려 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일?”

“네.”

“아하하, 그래요? 잘 되었네요.”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세상에 안 좋은 일만 있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난 가볍게 웃으며 축하를 전했다. 무슨 일일까? 굳이 내게 전할 만한 좋은 일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나톨리는 내게 말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알아맞혀 주길 바라는 듯한 모습으로 입을 닫았다. 글쎄, 난 이런 건 잘 못 맞히는 편인데.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제게 알려 줄 만한 좋은 일이라면 어떤 일…… 아, 바이올린 바꿨나요?”

“……이렇게 빨리 맞히실 줄은 몰랐는데.”

“?”

가만 보니까 들고 온 바이올린이 이전에 쓰던 3/4 사이즈 바이올린에서 풀 사이즈로 바뀌어 있어서 말해 본 건데, 정답이었나 보다.

아나톨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진짜 어떻게 아신 거예요? 조금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1인치 정도라도 보면 다르니까요.”

아나톨리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리 놀랄 것도 없었다. 1인치 차이면 작은 차이도 아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느껴질 정도로 아나톨리의 바이올린은 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에만 4cm가 컸다고 했던가?

난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축하해요, 아나톨리. 풀 사이즈 바이올린을 쓸 수 있게 된 거네요.”

“오늘 선생님이 절 보시더니 이젠 풀 사이즈를 써도 되겠다고 하셔서요. 실제로 만져 보니까 이젠 이게 편하고 잘 맞는 것 같아요.”

150cm정도면 풀 사이즈를 쓸 단계이긴 했다.

저번에 아나톨리의 녹음을 도와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작은 바이올린으로 고생하기도 했었지……. 왜 아나톨리가 풀 사이즈를 쓸 수 있게 되자마자 날 찾아와서 알려 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 준 것이 고맙다.

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아나톨리도 내 키를 뛰어넘겠지.

내가 본 어린 바이올린 연주자 중에선 아나톨리만큼의 성적을 보인 사람이 드물었다. 실제로 바이올린과에서 굉장히 주목받고 있다고도 하고……. 그가 얼마나 좋은 연주자가 되어 줄지 기대가 된다.

그의 바이올린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바이올린은 산 건가요?”

“아뇨. 선생님이 잠깐 써도 좋다고 빌려주셨어요. 일단 이걸 쓰다가 제 걸 사려고요. 다음 주 전에는 사야겠죠?”

아, 다행이다.

난 그에게 줄 것이 있다는 걸 떠올리곤 막 뭘 살지 고민하는 그를 붙잡았다.

“아나톨리, 오늘 연습은 끝났나요?”

“네. 집에 가려고요.”

“오늘 잠깐만 시간 내지 않으실래요? 제가 차로 데려다 드릴게요.”

내가 듣기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제안처럼만 들렸는데, 아나톨리는 이유도 묻지 않고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좋아요, 그럼 갈까요.”

내가 코트를 입고 가방을 챙기는 사이 아나톨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갸웃거렸다.

아나톨리가 가지고 왔던 좋은 일을 내가 바로 알아맞힌 것처럼, 내가 시간을 내 달라는 일을 맞히고 싶은 듯 보였다. 그렇게 고민하는 모습도 재미있어서, 난 일부러 말을 아끼고 그와 함께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빅토르는 나와 아나톨리를 보고는 어디로 가면 되겠냐고 물었다. 난 집으로 가 달라 말했다.

“바로 돌아가십니까?”

“예.”

“음…… 저기 후배와 어디 가시는 게 아닌가 해서.”

“제 연습실에 볼일이 있어서요. 그리고 바로 아나톨리를 집에 돌려보내는 것까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빅토르는 별말 없이 우리를 차로 안내했다.

자하르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소로킨과 빅토르만 있었다. 나와 아나톨리가 뒷좌석에 올랐고, 소로킨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저택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침에도 눈길에 조심했던 것처럼 소로킨은 귀갓길도 서행했다. 어차피 다른 차들이 다 천천히 가서 빨리 갈 수도 없었다.

모스크바의 정체를 맛보며 그사이 아나톨리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섯 살의 나이 차이는 그리 큰 장벽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아나톨리가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타티아나 누나.”

“예.”

“그런데 저 지금 이걸로 제대로 연주할 자신은 없어요. 아직 손에 안 익어서요. 내일쯤 하면 안 되나요?”

“……?”

“어…… 합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왜 집으로 데리고 가는지 지금까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합주 외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쉽지만 틀렸다. 난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적응하는 데에 며칠 정도는 걸릴 테니까요.”

“그런데 합주가 아니면 절 왜?”

“아하하, 아나톨리. 합주할 바이올린 연주자가 필요했다면 방금 전 연습실에서 했겠죠. 안 그런가요?”

아나톨리는 여전히 의문투성이인 얼굴이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

쿵. 하는 소리가 아나톨리의 말을 끊었다.

뒤쪽에서 가해진 충격에 몸이 울컥 앞으로 쏠리며 흔들렸다. 간신히 안 넘어질 수 있었다.

그 직후 바로 내가 한 행동은 아나톨리를 끌어안는 일이었다.

“!?”

아나톨리가 깜짝 놀라며 꿈틀거렸지만 난 놓지 않았다. 뒤이어 뭔가 더 올지도 모르니까 놓을 수 없다.

생각해서 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순간적으로 치미는 공황과 스트레스, 그 모든 것들에 앞서 아나톨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애에게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슨…… 일이죠.”

난 팔을 놓지 않고 앞좌석에 물었다. 빅토르가 바로 답했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소리도 없이 차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빅토르의 얼굴은 평소 농담이나 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걸음걸이도 뭔가 다르고, 한 손은 흔들지 않고 몸에 붙이고 있다.

난 그가 단순 추돌 사고 이상을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난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내게 경호원들이 붙어 있는 이유도 우리 가문에 적이 많기 때문이라는.

“괜찮으십니까.”

운전석의 소로킨이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소로킨은 지금은 괜찮아도 혹시 모르니 나중에 검진을 받아 보자고 말했다.

솔직히 마냥 괜찮지만은 않았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고, 아까 안나에게 들었던 이야기까지 불쑥 튀어나와서 새카만 불안감을 끼얹었다.

조금이라도 냉정할 수 있었던 건 아나톨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난 보다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잠시 후, 빅토르가 돌아왔다.

“일반인입니다. 브레이크가 눈길에 말을 안 들었다고 합니다. 별문제 없어 보여서 연락처만 받아 왔습니다.”

일반인이 아닌 경우도 있냐고 묻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가 추돌 사고로 결론지었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상황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난 아나톨리를 놓아주었다. 그는 여전히 약간 놀란 것 같지만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약간 과잉행동이긴 했다.

빅토르는 내 쪽을 힐긋 보더니 심각한 분위기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소로킨에게 말했다.

“차 사고 나서 어쩝니까? 소로킨.”

“어쩌긴, 후방 추돌이니 상대 보험으로 해결해야지.”

“보험으로 다 처리 못 할 것 같던데요. 차 팔아야 할 텐데.”

“한동안 걸어 다니면서 한 가지 배우겠군. 대물 한도를 더 들어야 한다는 걸.”

“이 정도로 끝나면 경고로 끝난 거나 다름없긴 하죠.”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경고로 끝난 것이란 말이 뇌리에 짙게 남았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사고를 낸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그 단어가 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차가 방탄 벤츠가 아니라 소형차라면 어땠을까. 그런 상황을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기나 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삶에서 마주치는 일들에 무의미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늘 겪은 일들이 모종의 경고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구세프 선생님에게서 약속했던 곡의 이름을 받지 못한 채로 작은 사고를 당한 것, 마치 그게 내게 허락되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것 같은 불길함.

매일을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해 보내야 한다는 상투적인 문구를 늘 되새기며 지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깨가 움츠러들고 심장이 거세게 뛴다.

하지만, 그건 다시 한 번 날 자극하기도 했다. 날 움직이게 하는 죄책감이나 의무감, 책임감 등은 여전히 공고해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젠 그 위에 쌓인 다른 가치들도 충분히 있었다.

“빅토르.”

“예, 아가씨.”

내가 입을 열자마자 빅토르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 난 그에게 말했다.

“오늘 사고 난 것, 우리 쪽에서 해결할 수 있나요?”

빅토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의무는 없지만 가능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가볍게 대답한 그는 다시 앞을 보더니, 느닷없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거참. 못된 경호원 둘은 차를 팔아먹니 하고 있는데, 역시 우리 아가씨가 내리시는 판단은 다르군요. 예고르에게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아요.”

늘 경호원의 입장을 지키는 빅토르와 소로킨이 말할 수 있는 건 원리원칙대로 처리하는 방법뿐이다. 내게 어떠한 제안을 하거나 사견을 밝히는 것도 쉽지 않다. 때문에 간접적으로 내게 상황을 이해시켜 준 것이다. 진짜 현명한 건 내가 아니라 빅토르와 소로킨이었다.

그리고 난 내 의지로 결정을 내리면서 이 상황에 어떠한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아나톨리도, 놀라신 것 같기도 하고 오늘은 바로 병원에 데려다 드린 뒤에 귀가하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뇨! 전 진짜 괜찮아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웠다. 병원은 내일 가도록 하자.

“……오늘은 살짝만 제 고집대로 할게요. 미루고 싶지 않네요.”

집으로 향하던 차는 작은 사고를 당하긴 했지만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래 목적지로 향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난 아나톨리를 이끌고 별관의 연습실로 향했다. 아나톨리는 몇 번이나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얼굴로 날 따라왔다.

그래서 내가 연습실의 선반에 보관되어 있던 바이올린을 꺼내 왔을 때, 아나톨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난 그에게 바이올린이 든 케이스를 내밀었다.

“받으세요.”

“……이거 뭐예요?”

“바이올린이에요.”

그걸 묻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심지어 그는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난 아예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낸 다음, 성큼 다가서서 아나톨리에게 바이올린을 안겨 주었다. 아나톨리는 혹시나 떨어뜨릴까 봐 바이올린을 꽉 쥐었다.

추돌 사고를 겪고도 흔들림 없던 그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젠 무릎을 굽힐 필요도 없었다.

“어느 겨울날…… 굉장한 바이올린 실력과, 재능과 가능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지니신 멋진 분께서 제게 맡기신 바이올린이에요.”

이 바이올린의 주인, 구아르바트 거리에서 만났던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를 떠올렸다. 난 상상도 못할 긴 시간을 음악과 함께 하고, 눈이 어두워져 있던 내 시야를 넓혀 주신 분.

아나톨리는 자신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내려다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분께서 맡긴 걸 제게 주시면 안 되잖아요. 정말 좋은 바이올린처럼 보이는데요……. 저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에게…….”

“아뇨, 전 그분이 원하는 건 이렇게 재능을 막 펼칠 수 있게 된 연주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바이올린 실력만 놓고 보면 아나톨리보단 막심 선배가 낫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이 바이올린의 주인은 아나톨리가 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분은 이 바이올린을 내게 맡기고 구아르바트 거리에서 자리를 비웠다. 난 그 의미가 분명 지금 이 순간에 있다고 믿었다.

“이 악기를 가지고, 오래도록 연주해 주세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야 할 때가 온다면, 미련 없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그렇게 해 줄 수 있나요?”

아나톨리는 입을 다물고 한참동안이나 날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 어린 아나톨리에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 얼굴을 보고는 안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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