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07화 (407/1,277)

##  407화

구세프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알리셰르라는 이름이었지. 10년도 훨씬 넘은 옛날 미하일이 키웠던 제자라 구세프는 잘 모르지만, 그 이름을 듣고 나자 서서히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밤색 곱슬머리의 건방진 꼬맹이였다. 러시아의 음악엔 이제 영혼이 없다면서 니힐리스트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그 변변찮은 실력을 콱 눌러 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분해하면서 다음엔 깜짝 놀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오는 열정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어린데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멋지게 살 것 같다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놈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았는지 이젠 물어볼 수도 없었다.

“……후.”

사인은 단순했다. 술에 취한 채 집 밖으로 나오다가 얼어붙은 계단에 발이 미끄러져 굴러떨어졌다. 경추가 부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지만 의사들이 살려 낼 수 있는 사고가 아니었다.

사람은 참 쉽게 죽는구나.

문득 학창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생각났다.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레슬링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타고난 체격을 지닌 친구였지만, 권총을 든 강도들을 상대할 순 없었던. 그때도 눈밭에 파묻어 놓는 바람에 시신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던가.

수많은 사람들을 집어삼켰을 눈은 하얗기만 했다. 구세프는 겨울을 싫어했다.

“무슨 조사를 이렇게 하는 거야, 빌어먹을.”

괜히 투덜거리며 구세프는 난간을 퍽 걷어찼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간 미하일은 이러저런 질문에 응하고 있었다.

평생을 세계를 떠돌다 모스크바로 돌아와 연고가 없는 알리셰르의 사망은 단순 사고사로 추정되었지만, 문제는 그의 집에 남아 있던 수많은 기록들이었다.

음악가 특유의 시니컬하고 주관적인 이야기들. 자신만의 가치관과 주장을 신봉하지 않으면 금방 흔들리고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면서, 어쩌면 틀린 줄을 알고도 쓸 수밖에 없었던 문장들. 그런 것들이 그의 노트와 악보에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미하일의 이름. 그리고 음악학교 시절의 추억들이 두서없이, 하지만 굉장히 많이 적힌 수첩이 나왔다.

모스크바 경찰들은 이 사건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고사 아니면 자살, 사건을 쉽게 처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다만 미하일을 호출한 것을 보니 후자 쪽으로 처리하려는 것 같았다.

구세프 역시 어느 쪽이든 별 상관 없었다. 하지만 저런 기록들을 유서 대신으로 멋대로 해석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 생각했다. 벌컥 짜증이 나려고 한다.

벌써 담배를 몇 대나 태웠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길어지면 한 갑 더 사 와야 하나 싶어 움직이려는데, 경찰서 문이 열렸다.

“오래 기다렸나, 구세프. 미안하네. 그리고 굳이 출석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미하일은 커다란 종이 박스를 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세프는 동료 선생이자 친구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툭 던졌다.

“술이나 한잔 할 텐가?”

“글쎄, 별로.”

아차 싶었다. 말실수였다. 구세프는 괜한 난간만 한 번 더 걷어차고는 앞장섰다.

“쳇…… 가세. 춥군.”

“그러지.”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엑셀을 밟는 대신 히터를 틀었다. 구세프는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딱히 알리셰르의 죽음으로 감상적으로 된 건 아니었다. 제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알리셰르라는 남자가 이 세상에서 이제 없어졌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허무감 정도를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지도 선생이었던 미하일의 기분은 모르겠다. 잘 몰라도 구세프가 느끼는 것보다 더 끔찍하리라.

담배가 피우고 싶다. 하지만 창문을 닫고 히터를 틀었는데 담배를 피울 순 없었다. 구세프는 그냥 아무 데나 갈까 하다가, 미하일이 종이박스에서 무언가 꺼내기 시작하자 물었다.

“그거 뭔가?”

“알리셰르가 쓴 노트와 수첩, 그리고 악보들.”

“그거 경찰들이 보존해야 하는, 뭐 그런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내게 주더군.”

어떤 증거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유족들에게 돌아가야 할 물건들이지만, 알리셰르는 유족이 없다. 때문에 미하일에게 온 것이다.

구세프는 참고인으로 저 기록물들을 조금 읽어 보았고, 따라서 경찰이 무어라 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경찰이 이걸 읽으면서 자살이라고 했네.”

“머저리들.”

죽고 싶더라도 훨씬 편한 방법이 많은데 굳이 계단을 선택할 이유가 뭔지 제발 좀 가르쳐 달라고 경찰의 멱살을 쥐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생각이 없고 무책임하게 사망 사고를 처리해도 되는 건가?

미하일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사고사면 조금 더 행정이 복잡해지기 때문인지…… 무슨 이유인진 잘 모르겠네. 하지만 알리셰르가 오해거리를 준 건 사실이지.”

“오해거리?”

“치머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네.”

“……작곡가 치머만 말인가?”

“그래.”

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 1918년 독일 쾰른 태생으로 1950년 즈음부터 활동한 음악가로서 현대음악 작곡가로 평가되지만 사실 고전적 클래식 작곡기법에 조예가 깊은 작곡가였다.

그 뛰어난 실력에 힘입어 독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이기도 했고, 구세프는 그의 곡들을 몇 곡 정도 연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오페라를 작곡하던 중 자신의 음악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권총 자살을 택한 것이다.

미하일이 종이박스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애는 죽어야 한다면 치머만처럼 죽어야 한다고 써 놓았어.”

“차라리 음악을 때려치웠어야지.”

“오토 바이닝거의 문구도 몇 줄이나 있더군. 스스로 천재라는 걸 몰랐던 걸까.”

19세기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 6개 국어에 능통하고 스물두 살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천재였지만, 23세에 권총으로 스스로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언은 짤막했다. 천재가 아니라면 죽음을.

구세프는 짧게 말했다.

“알았지만, 성에 안 찼겠지.”

“난 잘 모르겠군.”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구세프는 지금이라도 알리셰르의 기록물들을 빼앗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저걸 미하일이 계속 읽게 두는 건 그리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하지만 구세프에겐 약간의 믿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무튼…… 경찰들이 그럼 자살로 밀어붙이고 싶어 할 만도 하군. 자네는 뭐라고 했나?”

미하일은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 아니라고 했지.”

단호하게 선언하면서, 미하일은 경찰이 당당하게 자살자의 기록들이라고 주장한 종이 박스를 손바닥으로 쳤다.

“경찰들은 글을 읽을 줄 알지만 음악을 읽을 줄 모르지. 난 이 애의 글보다 악보들을 더 유심이 봤네. 그리고 이거.”

박스 안을 헤집던 미하일이 집어든 것은 한 장의 악보였다.

“가장 마지막에 썼을 거라 예상되는 곡일세.”

미하일이 그 악보를 구세프에게 건넸다. 구세프는 음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서, 그 악보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첫 인상은 난해했다.

느릿한 춤곡처럼 시작하더니, 돌연 타악기처럼 피아노를 마구 두들긴다. 그러고는 다시 잔잔한 호숫가에 이는 파문처럼 섬세한 선율.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짧은 음악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구세프는 의외로 단순명료한 주제가 이 음악에 담겨 있음을 느꼈다.

음악에 대한 선망과 애정, 이 곡을 듣는 청중뿐만이 아니라 연주하는 연주자도 자유로운 바람처럼 연주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 흔적들. 그야말로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가들을 사랑한 사람의 곡이었다. 당장 이 곡을 연주해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미하일이 물었다.

“어때. 권총이 필요한 사람의 곡인가?”

“아니, 그랜드 피아노가 필요했겠군.”

구세프는 잠깐 들렀던 알리셰르의 집을 떠올렸다. 그 낡은 집엔 그랜드 피아노도 없이 업라이트 피아노뿐이었다.

훨씬 더 확신이 굳어졌다. 이런 곡을 쓰는 작곡가가 자살을 택할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알리셰르의 기록들도 전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재미있는 걸 배워 왔군.”

“그래, 알리셰르는 천재야. 죽음에 대한 문장들은 그 죽음을 마주 본 것이 아니라, 등 뒤에 두고 있었던 것이지. 멈춰 설 수 없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앞으로 나아갔던 거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죽음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고 오해하기 좋았다. 하지만 알리셰르의 음악은 도저히 오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했다.

구세프는 조금 막연했던 애도의 감정이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 곡을 쓸 수 있는 음악가는 흔치 않은데, 정말 아깝게 갔다.

미하일의 안타까움은 구세프의 몇 배는 되는 듯했다.

“자살이라니, 그런 모욕적인 방식은 절대 용납 못 하네.”

“……그래.”

“장례는 내가 맡기로 했네. 아마 나 혼…….”

“그때 녀석을 기억하던 선생들이라면 다 데리고 가도록 하지. 당시 친구들도.”

“…….”

얼마나 될진 모르겠지만 한 음악가를 배웅하는 데엔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구세프의 말에 미하일은 잠시 침묵하다가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구세프는 피식 웃으며 핸들을 잡았다.

일단 이대로 식사나 하러 갈 생각이었다. 점심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무언가 먹어야 할 필요가 있다.

가까운 식당에 들어선 구세프와 미하일은 간단한 음식들을 주문했다.

요리를 기다리던 미하일은 옆 테이블의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장난을 치며 웃음소리 등이 이쪽까지 번졌다.

미하일이 턱을 괴며 말했다.

“내일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으면 이상했다. 구세프는 미하일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일부러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자네가 그러면 애들 역시 이상함을 느낄걸. 내색하지 않는 것도 우리 일이지.”

“……맞네.”

하지만 구세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늘 오후에 타티아나에게 실컷 내색했던 것을 떠올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구세프는 괜히 인상을 쓰며 미하일에게 말했다.

“타티아나가 미하일 선생님은 어디 갔냐며 걱정하더군.”

“……말했나?”

“아니, 하려면 자네가 직접 해.”

“떠넘겼군.”

“웃기는 소리.”

딱 잡아뗐지만 구세프는 심정이 복잡했다.

어쩐지 그 애를 보면 불안하고,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사실 중앙음악학교의 전교생, 아니 이 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학생들을 통틀어도 타티아나만큼 불안과 거리가 먼 학생도 없었다. 연습광이라서 닦달할 필요도 없고 이해력도 좋아서 레슨으로 하나를 가르치면 백 개는 알아듣는다.

그리고 무대에 서면 떠는 일 한 번 없다.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스스로 준비해서는 무대에서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을 펼쳐 보인다. 구세프는 이 정도로 완성된 연주자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가끔은 뒤가 없는 검투사의 집중력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대를 망칠 수도 있다. 타티아나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기회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한 번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사람처럼 무대를 대했다.

물론 구세프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객관적으로 본 타티아나는 흠 잡을 곳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가끔은, 재작년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의 타티아나가 생각나기도 했다.

구세프는 선생으로서의 의무와 학생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약속을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사실 걱정되는 부분도 굉장히 많았다.

“그저…… 그 녀석과 얽혀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이 생각나서.”

“약속이라던 그 곡 말인가?”

“그래. 사실 저번에 결심하긴 했지만, 오늘 또 딴생각이 들기도 했네. 그냥 엉뚱한 곡으로 흐지부지하게 만들어 버릴까 하고.”

드물게 구세프가 약한 소리를 했다. 미하일이 가당찮은 소리 말라는 듯 말했다.

“그 애가 모를 것 같나?”

“증오하더라도 날 증오하는 게 낫지.”

타티아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경향이 있었다. 만약 어떠한 속임수 없이 제대로 된 지도를 받고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 모든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이 분명했다.

구세프는 그렇게 두긴 싫었다. 그리고 그 애는 미하일의 제자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도, 미하일은 웃으며 말했다.

“난 타티아나가 다 잘 해낼 거라고 믿네.”

“……솔직히 말할까. 난 자네가 그렇게 대책 없이 긍정적인 게 평소에 정말 싫었어.”

“그런가?”

“그래. 하지만 오늘은 듣고 싶었던 말이군.”

구세프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결국 구세프는 타티아나의 진지한 태도를 배신하는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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