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화
점심 식사 후에 반에서 잠시 일반 교과 공부를 하고 있자 아나톨리가 우리 반으로 찾아왔다.
“저 왔어요.”
“아, 그래요. 아나톨리.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빠르게 책들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오늘은 오후 연습을 빼고 아나톨리와 병원에 갈 예정이다.
난 오늘 레슨이 없었고, 그냥 가볍게 검사하는 건데 굳이 지금 예민하실지도 모르는 미하일 선생님에게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이대로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레슨이 있는 아나톨리는 내가 같이 가서 사정을 설명드리고 오후 레슨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지도 선생님께 같이 가죠.”
“제가 전화로 말씀드려도 괜찮은데요.”
“아니에요.”
아나톨리는 내가 같이 가는 게 조금 부담스러운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난 이런 일일수록 더더욱 내가 작은 일도 책임감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나톨리는 성격상 내 이름을 빼놓고 혼자서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 두 명은 아나톨리의 지도 선생님인 바이올린과 타마라 선생님의 레슨실을 찾아갔다.
타마라 선생님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리고 회색 스웨터를 입고 계셨다. 한눈에 봐도 어쩐지 바이올린 연주자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분이었다.
난 짧게 자기소개를 하고 어제 있었던 일과, 그 일 때문에 아나톨리를 병원에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팔짱을 끼고 이야기를 듣던 타마라 선생님이 말했다.
“오늘 아나톨리에게선 어떤 문제도 느끼지 못했는데요.”
“그렇게 심한 추돌 사고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장기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니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나도 큰 문제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소로킨과 빅토르는 물론 예고르와 아버지까지 무조건 병원에 가 보길 권했다. 난 그 뜻에 거스를 생각이 없었다. 가 보는 게 맞기도 하고.
타마라 선생님 역시 다른 의견을 내진 않았다.
“제 학생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준다니 허락해 주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래요, 가 봐요.”
“감사합니다.”
빠르게 이야기가 끝났다. 이제 허락도 받았으니 아나톨리와 나가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타마라 선생님이 날 불렀다.
“그런데 잠시만요, 타티아나.”
돌아보자 예상 못 한 제안이 툭 나왔다.
“단둘이 할 이야기가 조금 있는데, 괜찮겠지요?”
“……?”
아나톨리가 아니라 저요?
난 오늘 처음 본 선생님과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데, 아나톨리와 관계된 일이라면 왜 단둘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싫다고 할 순 없었고,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아나톨리가 나가자마자 타마라 선생님이 물었다.
“제가 오늘 아나톨리의 바이올린을 보고 약간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데, 풀어 줄 수 있어요?”
약간 묘한 화법이었다. 하지만 난 선생님이 뭘 묻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설마하니 사고에 대한 보상 같은 걸로 쥐여 준 게 아닐지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단 위기감이 들었다. 그건 정말 큰 오해였다. 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뒤에 설명했다.
“전부터 저 아이에게 주려고 했던 바이올린이었어요. 때마침 어제 선생님께서 풀 사이즈 바이올린을 허락하셨단 말을 듣고, 새 바이올린을 사기 전에 주기로 마음먹었고요.”
“오호.”
“사고도 그것 때문에 같이 가는 도중에 생긴 일이에요.”
내 말엔 빈틈이 없었다. 타마라 선생님도 한 번에 납득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짚고 들어왔다.
“그런데 왜 하필?”
사실 설명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저 애의 재능이 기대된다고 말하자니, 난 피아노과 학생일 뿐이다. 바이올린 선생님 앞에서 그런 말은 정말 도를 지나쳐도 한참 지나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거짓말을 할 순 없어서, 난 약간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아나톨리라면 저 바이올린을 잘 다뤄 줄 거라 생각해서요.”
“그렇다고 저렇게 비싼 물건을 덥석 쥐여 주어도 되나요? 난 솔직히 저걸 보자마자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는데요. 아직 어린아이가 들고 다니기엔 너무 고가예요.”
타마라 선생님은 저 바이올린의 가치를 한 번에 알아보신 것 같았다. 바로 고가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가격대도 대략 아시는 듯하다.
이건 내 실수였다. 난 저 바이올린 값을 자하르를 통해 치렀고 그 후로 가격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아나톨리에게 필요하겠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그에게 주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정말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준 걸 도로 빼앗을 수도 없었다. 이미 저 바이올린은 아나톨리의 것이었다.
타마라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천천히 말씀하셨다.
“저 바이올린의 소리를 들어 본 적 있나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디에서?”
“저 바이올린을 주신 분이 연주하시는 걸 들은 적 있어요.”
그 연주는 정말 환상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제대로 된 홀도 아니고 추운 겨울날 야외에서 한 연주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문득 그때를 떠올리고 있는데, 타마라 선생님이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저 바이올린의 음색이 아나톨리에게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것도 알고 준 건가요?”
저 바이올린의 음색은 날카로움보단 부드러운 쪽이었고 따뜻하고 풍부한 색채감을 지니고 있었다. 아나톨리의 연주 스타일과 비교한다면 조화로울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난 조심스레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어요.”
“피아노과라고 들었는데…… 역시 그런 건 상관없나…….”
타마라 선생님은 고개를 옆으로 튼 채 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쁘게 말씀하시는 것 같진 않았다.
이윽고, 선생님이 미소를 보였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약간 차갑게 느껴지던 인상이 확연히 달라졌다. 타마라 선생님이 말했다.
“난 아나톨리에게 기대가 굉장히 높아요. 그래서 저 애가 괜찮은 바이올린을 쥐길 바랐거든요. 첫 악기에 예민하게 길들여지는 게 우리 귀라서, 무슨 말인지 알죠?”
“알 것 같아요.”
내가 동의하자 선생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그만한 여유가 될는지 걱정이 많았는데, 좋은 바이올린을 얻을 수 있게 되어서 잘 되었네요. 일단 받은 거니까 잘 쓰겠습니다. 아나톨리에게도 잘 맞는 것 같고.”
“아! 저야말로 감사해요.”
“감사는 내가 해야지. 고마워요, 타티아나. 당분간은 조금 번거롭더라도 들고 다니는 것보단 학교에서 보관하게 되겠지만…… 그 정도는 제가 신경 좀 쓰도록 하죠.”
지도 선생님이 도움을 주신다고 하니 걱정이 없었다. 갑자기 부담을 주어 버린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모두 잘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아나톨리에게 기대가 많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군요. 앞으로도 신경 좀 써야겠어요.”
타마라 선생님은 뒤로 빙글 돌더니 의자에 앉았다.
“이야기는 끝났어요. 가 봐도 좋아요. 아, 타티아나도 검진 잘 받고요. 아까 이야긴 안 했지만 제 친구 중 한 명도 경미한 자동차 사고를 당했는데 아직도 골병이 들어 있어요. 어린 친구들이니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알겠습니다.”
“잘 가요.”
레슨실에서 나오자마자 아나톨리가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저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난 이제 바이올린에 대한 이야기는 아나톨리와 타마라 선생님이 나누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구태여 무언가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
검사는 빠르게 끝났다.
별것 없었다. 애초에 아픈 곳도 없었기 때문에 문진표를 한 장 제출하고 간단한 검사를 몇 개 거쳤다.
의사가 목과 허리 부근을 눌러 보며 촉진을 하고, 작은 망치로 무릎 부근을 톡톡 쳐 보기도 했다.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통증이 있다면 바로 찾아오시고요.”
“예.”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과 함께 소득이 있다면, 아나톨리에게 감기 기운이 있다는 걸 빨리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체온이 살짝 높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했는지 아나톨리는 자신이 감기라는 사실에 조금 어이없어했다.
“저 진짜 하나도 안 아픈데요. 기침도 안 하고요.”
“내일이면 아파질지도 몰라요. 잘됐네요. 일찍 알 수 있어서.”
아무래도 오길 잘한 것 같다.
그렇게 아나톨리의 감기약까지 받았고, 이제 이대로 귀가할 참이었다. 난 물론 일찍 돌아가서 예고르와 아버지에게 문제없다는 걸 말씀드린 뒤엔 다시 별관 연습실에 갈 생각이지만.
그런데 막 병원을 떠나려는 찰나, 전화가 걸려 왔다.
구세프 선생님이었다. 난 얼른 받았다.
- 타티아나.
“아, 선생님.”
어제 안나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에 난 아직도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날 대했다.
- 미하일 대신 전화한 거다. 어제 미뤄졌던 레슨을 오늘 하기로 했다. 연습 중이라면 바로 와라. 바로 시작할 테니.
난 기겁했다. 지금요?
갑자기 이렇게 없던 레슨이 생길 줄은 몰랐다. 학교까지 다시 가려면 30분 정도 걸린다. 교내에서 연습하다가 가는 것처럼 빠르게 가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난 사실대로 병원에 왔다고 이야기하는 건 어떨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가, 나중에라면 몰라도 지금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 다친 곳 없지만 혹시 몰라 검사를 받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병원이라는 단어를 선생님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불 보듯 뻔했다. 괜한 걱정을 하시게 만들 순 없었다.
“자, 잠시만요…… 저 금방 가도록 할게요.”
- 뭐냐?
“얼마 안 걸려요.”
- ……?
선생님은 약간 의아함을 표했지만 길게 캐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느긋하게 연습실에서 개인 연습이나 하려던 스케줄이 조금 분주해졌다.
난 자하르에게 아나톨리를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나톨리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연습하러 가고 싶어요.”
“감기잖아요? 오늘은 쉬세요. 연주자는 몸 관리도 잘 해야 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감기만 아니었으면 같이 돌아가도 괜찮았겠지만, 오늘은 아나톨리가 푹 쉬었으면 좋겠다.
난 그렇게 빠르게 결정하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안전하게 서행하던 속도를 갑자기 올릴 순 없었다. 안 그래도 어제 눈길에 차가 어떻게 되는지 직접 당해 본 적도 있었고.
그렇게 정확하게 30분 후, 다시 학교에 도착했다. 난 다시 갔다 오겠다는 인사를 빠르게 한 뒤, 바로 레슨실로 향했다.
그리고 복도에서 구세프 선생님과 마주쳤다.
“헉…… 헉…….”
“…….”
구세프 선생님은 찻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날 돌아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교내에서 뛰는 건 네 나이 절반밖에 안 되는 아이들도 잘 안 하는 짓인데. 다친다. 타티아나.”
“……죄송합니다.”
사실 뛰진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만 했지만 이렇게 숨이 차올라서야 변명같이 들리지도 않는다.
구세프 선생님은 삐딱하게 날 바라보다가, 돌연 피식 웃었다.
“그래서 뭐 하다 왔나.”
“예?”
“레슨도 없으니까 오후엔 땡땡이 친 거 아니냐?”
“아, 아뇨. 그렇지 않아요.”
“바른 대로 이야기해 봐라. 나무라려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그 무뚝뚝한 구세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건 정말 선심 쓰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가 꺼려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
“알았다.”
“…….”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구세프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씀하셨다.
“뭐 나도 네게 다 말해주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래,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지.”
“그런 게 아니라…….”
선생님도 감추고 있는 게 있으니 동등하다는 그 말씀은 날 정당화시켜 주는 게 아니라 양심을 쿡쿡 찔러 왔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니 내가 엄청난 잘못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이야기하자. 그게 나을 것 같다. 난 정말 동등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저 선생님이 말해 주지 않으신 게 뭔지 알아요.”
“뭐?”
“어제 미하일 선생님이…… 옛 제자분의 부고를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단지 조용히 말씀하실 뿐이었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나 보군.”
“그리고 방금 전엔 병원에 있다 왔어요.”
“……뭐라고?”
하지만 이번엔 그야말로 깜짝 놀라셨다.
이렇게 놀라시게 만들기 싫어서 빨리 뒤이어 설명을 덧붙이려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순식간에 내 앞에 다가와선 내려다보았다.
“병원? 네가? 왜?”
“아파서 간 건 아니었어요. 정말로요.”
선생님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정말 무서웠지만 난 차분하게 어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진단서까지 꺼내 드렸다. 전부 이상 없다고 적혀 있지만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려고 받아 온 것이다. 선생님에게 먼저 보여 드리게 될 줄은 몰랐다.
“전 괜찮아요. 선생님.”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바라보았다. 구세프 선생님은 잠시 말없이 날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진단서를 받아 들고는 손짓했다.
“일단 들어와라.”
“……예.”
그냥 이야기하지 않는 게 나았을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