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9화
레슨실 안에는 미하일 선생님이 앉아 무언가 서류를 보고 계셨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안경을 고쳐 쓰시며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미하일 선생님.”
“그래. 어젠 미안했다. 일이 있어서.”
선생님은 그저 일이 있었다고만 말했다.
인사가 오가는 이 짧은 순간에도 나는 미하일 선생님을 주의 깊게 살피며 긴장했다. 조금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모를 실수를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로 날 맞이해주셨다.
“앉거라, 차나 한 잔 하자꾸나. 밖에서 온 것 같은데.”
“……예, 선생님.”
미하일 선생님은 평소 사사로운 말씀들을 잘 하시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말을 내게 다 털어놓으시는 분은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난 이러한 선생님의 배려를 받아들여 자연스레 행동하기로 했다.
선생님이 찻잔을 준비하는 사이 물을 끓였다. 늘 하던 일이라 이젠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인다. 마치 익숙한 곡의 연주처럼.
멍하니 주전자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오늘은 보충 레슨인가요?”
“음, 그래.”
미하일 선생님은 찻잎을 덜면서 대답하셨다.
“레슨…… 할 건 참 많지. 저번 주 있었던 연말 음악회는 정말 훌륭했지만 그 곡들을 네 레퍼토리로 조금 더 갈고닦을 여지는 남아 있으니까.”
“알고 있어요. 혼자서도 많이 생각해 왔고요.”
“그래. 변함없구나. 좋은 태도다. 타티아나.”
무대에 선 뒤 첫 레슨 때면 늘 주고받았던 대화. 난 내가 더 나아갈 수 있다고 확인받는 것 같은 이 대화가 좋았다.
하지만 비스듬하게 서 계시던 구세프 선생님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시는 듯했다.
“그렇게 좋은 말만 할 텐가?”
“그럼 안 좋은 말이라도 지어내라고?”
보통 이럴 때면 구세프 선생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가 해이해지지 않도록 한 말씀 하시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영 그럴 마음이 없으신 것 같다. 살짝 인상을 쓴 채로 날 힐긋 바라보는 눈길이 매섭지만, 거기에 깃든 감정들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침묵하는 구세프 선생님이 이상해 보였는지 미하일 선생님이 물었다.
“자네도 오늘 타티아나에게 용건이 있지 않나. 어때, 이젠 그 이야기도 하지.”
“…….”
구세프 선생님은 갈등하는 얼굴을 하시더니, 앞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리셨다.
“미치겠군, 정말.”
“갑자기 왜 그러나, 구세프? 또 딴 생각이 든 사람처럼. 어제 식사하면서 충분히 이야기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문제없다 했잖았나.”
“…….”
구세프 선생님은 여전히 말씀이 없었다.
어제 두 분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구세프 선생님이 쉽게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시는 건 나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정했다. 미하일 선생님을 정말 존경하지만, 선생님의 배려 아닌 배려에 끝까지 따르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미하일 선생님. 어제 겪으신 일에 대해 애도를 표해도 될까요.”
막 주전자를 들어 올리던 미하일 선생님의 손이 멈칫했다.
선생님은 주전자를 든 채로 천천히 날 돌아보았다.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진 않았다. 내가 아는 것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하지만 난 지금에서야 분명하게 여기 있는 두 분의 공간에 들어섰다는 걸 느꼈다.
“…….”
미하일 선생님은 잠시 말이 없으시더니, 천천히 세 개의 찻잔에 물을 부었다. 단순한 일이지만 세 번이나 반복해서 그런지 정말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그중 한 잔을 내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너와 상관없는 일이니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이 공간에서 발을 뺄 생각이 없었다.
“전 그분을 모르지만…… 선생님을 사사한 분이라면 저와 아무 연관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이름도 모르는 미하일 선생님의 제자이지만 같은 선생님에게 배웠다면 적어도 일정 부분들은 같은 음악관을 공유하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난 이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음악관의 공유자를 한 명 잃어버린 것이다.
난 그 사실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하일 선생님이 물끄러미 날 바라본다.
“…….”
“정말 유감이에요.”
난 진지하게 말했고, 미하일 선생님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은 방금 전 인사하면서 지으신 미소와 확연히 달랐다.
“고맙다, 타티아나.”
미하일 선생님이 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고.
선생님은 찻잔을 기울이시곤 가볍게 말했다.
“자, 그렇게 심각할 것 없단다. 알아서 안 될 일을 안 것도 아닌데……. 구세프 자네도. 왜 그러나?”
“후……. 그래, 이게 그렇게 심각할 일은 아니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할지 이해한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되도록, 진단서를 미하일 선생님에게 내밀었다.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의사 소견이 적힌 내 진단서였다.
그걸 받아 본 선생님은 잠시 읽어 보시곤 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이게 뭔가?”
“타티아나 것이네. 어제 차를 타고 가던 중 경미한 사고가 있었다더군.”
“어제?”
“그래.”
어제라는 말을 듣자마자 다시 미하일 선생님의 안색이 바뀌었다.
사건과 사건 간에 인과관계는 없지만, 정말 하필이면 어제다. 난 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것들이 짜증스러웠다.
미하일 선생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시는 듯 내 진단서를 다시 꼼꼼히 읽어 보시곤,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셨다. 난 바보처럼 말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고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작은 사고였어요. 하지만 피아노 연주자라면 그런 일에도 철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병원에 갔다 온 것뿐이에요.”
왜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말해야 미하일 선생님이 걱정하지 않게, 덜 힘들게 할 수 있는 걸까.
내 모자란 말주변을 원망하며 입을 다물자, 미하일 선생님이 상황을 정리해 주셨다.
“그리고 난 어제 바쁘기도 했고. 그래서 내게 말하지 않고 병원에 갔었구나. 타티아나.”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해 못 할 이유는 아니니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지도 선생님에겐 알려야 하는 게 도리임을 알면서도 내가 왜 숨기려 했는지 미하일 선생님은 이해해 주신 것이다.
그런 선생님이 의문을 표한 방향은 내 쪽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건 구세프 자넬세.”
“…….”
구세프 선생님은 대답 대신 찻잔을 들었다.
***
뜨거운 차로 목을 축여도 어떻게 지금 이 심정을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구세프는 살면서 이렇게 답답함을 느낀 적이 몇 번 없었다. 그의 생각은 언제나 분명했고, 말은 거침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생각도 말도 엉망진창이었다.
타티아나가 병원에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왜 차가운 얼음 호수에 빠진 듯한 섬뜩함을 느꼈던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그 느낌은 타티아나가 멀쩡하다는 진단서를 본 뒤로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겉보기에 타티아나는 건강하고 잘 웃는다. 하지만 예전, 그녀가 보인 칼날 같은 광기를 일면이나마 접한 적 있는 구세프는 타티아나가 마냥 만사에 행복해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녀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느냐에 관계없이 태생이 예술가이며, 생각이 깊은 만큼 비밀이 많다.
멋지게 일구어 낸 피아노 실력을 보고, 이제 선생으로서 별로 가르칠 게 없으니 마지막으로 줘야 할 것을 주는 게 의무이자 신의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구세프가 아는 건 정말 피아노 실력뿐만일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두 발로 당당히 서 있으나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알리셰르가 빙판에 넘어졌듯, 두 발로 선 사람은 쉽게 균형을 잃는다.
구세프는 타티아나가 균형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의 단초를 제공하는 게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떤 말도 쉽게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그저 중얼거릴 뿐이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난 저 애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해야 하나……. 진짜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군. 당연한 소린데.”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원하는 것을 얻을 만한 기본 실력을 갖춘다면 선생답게 응당 거기에 도움을 주고 깔끔하게 물러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당연한 일이 너무 어렵다.
타티아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안해했었다. 구세프는 그 실력을 가지고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고 다그쳤지만, 실력과 별개로 그녀가 쉽게 불안정해질 수도 있음을 예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도 선생인 미하일에게 닥친 불행과 타티아나가 겪은 불길한 사고. 모든 것들이 구세프의 판단력을 흔들어 댔다. 관계없는 일들이니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구세프는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일주일 전 결정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데리고 가려고 안달을 하는 학생을 두고 실력에 문제가 있다며 족쇄를 채우는 일은 정말 쓰레기나 하는 짓이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지켜봐야 했던 게 아닐까. 내가 아는 건 저 애의 피아노뿐인데, 그걸 안다고 저 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피아노 선생이더라도 해선 안 될 생각이지 않나.
드물게 횡설수설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구세프를 보며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저번 달 이맘때쯤 했었던 이야기가 떠오르는군.”
12월의 어느 날. 구세프는 지도 선생도 아닌 자신이 너무 타티아나에게 정이 든다면 훗날 막상 필요한 지도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 싶어 의도적으로 타티아나의 레슨을 피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그렇게 예단하지 말고 당장 앞에 있는 타티아나를 봐 달라 했었고.
그런데 이제 한 달이 지나서야, 구세프는 그때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깨달았다. 너무 정이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이미 너무 정이 들었던 것이다.
“지도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지. 구세프.”
“자네 제자야. 미하일.”
구세프가 심각하게 다시 말했다. 지금 자신 이상으로 미하일은 타티아나를 아끼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하지만 미하일은 타티아나를 아끼는 만큼이나 믿고 있었다.
“난 타티아나도 자네도 믿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힘껏 도울 생각이고.”
“…….”
미하일의 긍정적인 목소리는 철저한 믿음과 책임감을 담고 있었다.
구세프는 찻잔을 마지막으로 비워 버리고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강력하게 엮어 놓았던 약속은 구세프가 풀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티아나가 힘겨워하리란 건 분명했다. 그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원하는 곡의 해석은 편린만 들어 보더라도 굉장히 깊이 있고 난해하다. 원하는 연주를 얻어 내려면 정말 갖은 애를 써야만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타티아나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음악들에 금이 갈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힘겹게 쌓아 올리는 것을 견디는 것과 무언가 부서져 내리는 것을 견디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음악가들은 대개 그걸 견디지 못한다.
“구세프 선생님.”
하지만 음악가들은, 그럼에도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타티아나의 눈동자 속엔 어두운 불안과 두려움이 스멀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보다 더 강렬한 불길로 어둠을 밝혔다.
“무엇을 염려하시는진 알아요. 재작년의 제가 어떻게 보였을지도요.”
“…….”
“하지만 선생님은 단순히 시간을 뒤로 미뤄 두기만 하신 게 아니에요.”
끝까지 구세프를 걱정하는 따뜻한 어투엔 미하일의 긍정성이 녹아 있었다.
타티아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각오는 되어 있어요.”
묻고 싶었다. 혹시 무섭진 않냐고. 일주일 전만 해도 불안해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작지만 불길한 사고로 구세프가 고민할 때, 대조적으로 타티아나는 그 사고에서 불길함뿐만 아니라 다른 것 또한 느끼고 각오를 다시 다졌다.
무엇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강인함이라기엔 나약한 구석이 있고, 자신감이라기엔 오기에 가깝다. 여전히 불안정한 무언가에 기대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타티아나는 모든 것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구세프도 그런 타티아나를 똑바로 바라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