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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10화 (410/1,277)

##  410화

구세프 선생님은 이성적이고 냉철하신 분이다.

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강압적인 지도도 가리지 않고, 미움을 사는 일 같은 것도 전혀 꺼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지도를 하는 내내 한 번도 학생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멀리서 관심이 없는 것 같아도 항상 지켜보고, 넓고 평탄한 길로 가도록 인도한다. 그게 내가 아는 구세프 선생님이었다.

“…….”

하지만 그 선생님이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느낀 운명 혹은 경고, 무시해 버리기 어려운 일련의 연관성이 불안으로 화하여 일렁거리다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닿았음을 직감했다.

선생님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불길함에 사로잡히지 않던 첨예한 이성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난 구세프 선생님이 그러길 바라지 않는다.

“약속을 모든 것의 위에 두진 않겠어요.”

“……뭐?”

설마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난 허리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바짝 세우고,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기말시험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을 거라 약속드릴게요. 이건 제…… 취미 같은 것이니까 시험이 끝날 때까진 따로 연습하는 것이 옳겠죠. 결코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

“…….”

과거의 편린을 되찾는 일은 내게 있어서 굉장히 무겁고 중요한 일이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들이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 수 있도록.

구세프 선생님은 잠시 날 바라보시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한 학기 만에 에르네스트에게 수석을 빼앗길 순 없잖아요?”

이 말은 구세프 선생님이 미처 상상도 못했던 지점을 찌른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선생님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하하하하! 그래, 하…… 타티아나. 넌 우리 피아노과의 수석이었지.”

“가능하다면 앞으로도요.”

“그래, 그래.”

비로소 레슨실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어떠한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이는 구세프 선생님의 모습은 참 보기 드문 것이었다.

미하일 선생님도 거들었다.

“에르네스트가 섭섭하겠는걸, 구세프.”

“뭘, 불만이면 본인이 잘 해야지. 안 그런가? 타티아나.”

“그렇죠?”

“이번에도 네가 수석을 하면 녀석 표정이 아주 볼만하겠는데. 기대되는군 정말.”

성적이 나왔을 때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내게 축하 전화까지 해 주긴 했지만, 사실은 내심 분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승부욕도 강하고 자존심도 세니까.

그리고 난 그의 그런 성격을 좋아한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강한 도전자였다.

난 웃으며 구세프 선생님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지켜 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잘 버텨 볼게요. 선생님.”

껄껄 웃던 구세프 선생님은 또 이상한 소릴 들었다는 듯 인상을 썼다.

뭔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서 했던 말들을 곰곰이 되짚어보는데, 선생님이 조용히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선생님.”

“하나만 묻자.”

진지한 눈빛에 절로 긴장되었다. 난 무대에 설 때도 긴장하는 법이 잘 없지만, 구세프 선생님이 날 가만히 바라볼 때면 늘 어떠한 통찰력 같은 것에 꿰뚫린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 고개를 다시 바로 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의자를 앞으로 살짝 끌며 자세를 앞으로 했다. 아주 조금 가까워졌을 뿐인데 선생님의 목소리와 표정 등이 훨씬 더 크고 명료하게 느껴졌다.

“수석을 지키고 싶다는 네 말…… 진심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넌 열심히 하는 학생이기도 하고.”

구세프 선생님이 의자 팔걸이를 손끝으로 툭 치며 물었다.

“하지만 난 늘 의문이 있었다. 솔직하게 답해 줬으면 좋겠다.”

“…….”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으냐?”

갑자기 무슨 말씀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대답 외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을 묻고 계신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이 내 이면을 다시 한 번 더 꿰뚫어 보았다는 것에 섬찟함을 느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좋은 성과만을 보여 드리면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최고를 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신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 내가 가진 조건들엔 한계가 있으니까.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만족했고 납득도 하고 있는 상태라 내겐 큰 문제가 없지만, 선생님의 입장에선 학생인 내가 이런 마음가짐이면 안 되는 모양이다.

“…….”

안 되겠지?

현실적으로 여긴 러시아 최고,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였으니, 이 학교의 학생들은 당연히 세계 최고를 노릴 자세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학교의 수석인 나는 그 드높은 곳으로 향하는 길의 한가운데에 제대로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이 손가락에 한계가 있다는 이유를 차치하고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부분을 짚자면, 난 여전히 내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어느 한순간 이 꿈같은 상황이 끝나 버리고 모든 것이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제자리를 찾으면서, 나는 어두컴컴한 암흑으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설령 그게 내일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를 앞에 두고 주저앉아 있을 순 없으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게 나였다.

그런데 이런 내가, 세계 최고로 향하는 빛나는 길에 서 있어도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난 구세프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의무를 지키기 위해 솔직한 사람이 될 수 없는 만큼, 솔직할 수 있는 부분에선 최대한 솔직하고 싶었다. 그러나 쉽게 생각나는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말하기 어려웠다.

“잘 모르겠어요.”

“……그렇군.”

“세계의 꼭대기에 서는 걸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3대 콩쿠르를 석권하면 될까요? 아니면 연주회를 수 천 번 하면 될까요.”

“당연히 그런 기준은 없다. 그냥 목적성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해 보라는 거다.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괜히 살짝 빠져나가 보려고 했더니 구세프 선생님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듯 날 다시 똑바로 잡아 세웠다. 목적성과 막연함이라는 두 단어가 내 양어깨를 꽉 붙잡았다.

조금 웃기기도 했다. 두 단어가 엄청나게 동떨어져 있는 단어처럼 들린 까닭이다. 하지만 난 한결 대답하기 쉬워졌음을 느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항상 눈앞의 피아노밖에 못 보는 사람이라서, 목적성 같은 건 아직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약 허락된다면, 내가 원하는 미래는 하나였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세계를 위한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내 세계는 그리 넓지 않다. 내 교우 관계는 협소하고, 클래식 음악계 역시 그리 넓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앞으로도 피아노를 칠 수 있어서 내 세계의 저변을 넓힐 수 있다면, 그 세계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로만이 말했다. 모든 것은 기적이라고.

난 사랑하는 친구들과 연주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과 음악을 공유했으면 좋겠고, 아버지나 오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후배들이 멋진 음악가가 되는 걸 보고 싶고, 필요하다면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고 싶다.

“그게 제가 피아노 앞에 앉는 이유일 거예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늘 이유와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내가 조심스럽게 내린 내 희망이었다.

“…….”

구세프 선생님은 조용히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다시 의자 뒤로 기대면서 뒤쪽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피식 웃는 미소와 함께 시큰둥한 목소리.

“많이 달라졌군. 그때도 명예 같은 것엔 관심이 없는 건 분명했지만.”

뾰족한 어투였지만 난 그게 전혀 아프지 않았다. 되레 부드럽게 들린다.

구세프 선생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그런 마음으로 임한다면 충분하다, 타티아나. 난 네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던 것 모두를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원하지 않던 명예까지 얻게 될까. 그건 알 수 없지만 구세프 선생님의 심술궂은 한마디는 상냥한 위로처럼 다가왔다.

선생님은 피아노를 바라보며 작게 읊조리듯 말했다.

“……우리는 같은 계단 위에 서 있을지도 모르겠군. 결국 모두 같은 게다.”

선생님이 발음하시는 우리라는 단어는 꽤 정겨웠다. 난 선생님의 말을 받아 뒤 문장을 덧붙였다.

“맨 아래 계단을 딛게 되면 멈추는 일 없이 언젠가 반드시 가장 위의 계단까지 올라갈 테니 말이에요.”

딱히 외우고 있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말로 나왔다.

구세프 선생님은 깜짝 놀란 눈빛으로 날 보며 물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나?”

“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주 내용은 19세기 카라마조프가의 살인 사건이었지만 종교와 무신론, 악마가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정수와도 같은 소설이었다. 두 번 정도 읽은 것 같다.

구세프 선생님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뭐, 읽을 수도 있지. 그런데 이해가 되더냐……?”

“쉬운 부분만요. 방금 말씀하신 계단이 원래는 드미트리의 도덕적 방종에 대해 알렉세이가 위로하듯 건넨 비유였지만 그렇게 사용하진 않으셨단 건 이해하고 있어요.”

“……어, 크흠. 그래.”

구세프 선생님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곤 생각하지 않으신 건가? 그건 약간 불만이었다.

무시하지 말아 달란 눈빛을 했더니 구세프 선생님이 한 손을 들며 말했다.

“읽을 리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아니, 알겠다. 알겠어. 네 앞에선 함부로 비유 같은 걸 들면 안 되겠군.”

투덜거리는 구세프 선생님을 보며 난 빙그레 웃었다. 혹 기회가 된다면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이런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으면 좋겠다. 미하일 선생님과 종종 이야기하는 것처럼.

작년, 도스토예프스키를 추천해 주셨던 미하일 선생님은 짧게 한 말씀만 하셨다.

“카라마조프를 읽었다면 나드리브를 조심하렴. 타티아나.”

나드리브nadryv는 어려운 부분에 속하는 단어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파헤쳐 낸 러시아 특유의 문화적 기반에서 나온 단어라 러시아어 외에 다른 언어로는 번역하기도 어렵다.

굳이 길게 풀이하자면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 자기 내면에 너무 심취하여 영혼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왜곡하여 끄집어내는 일 등이다. 일그러진 자기애나 숭배 등이 거기에 있다.

난 이 복잡한 단어에 대한 것들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쩌면 그런 것들에 취약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선생님이 옅게 웃었다.

“넌 영리한 학생이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단다.”

자꾸 이런 칭찬만 들으니 부끄럽다.

아니나 다를까, 구세프 선생님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영리한 것과 요령이 없는 건 별개지.”

“……예?”

“넌 요령이 없잖으냐.”

“…….”

“그 점이 마음에 든다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다.

그냥 평소처럼 날 괴롭히고 싶으신 건가 싶어서 가만히 올려다보니 구세프 선생님이 다시 짧게 기침을 하곤 말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나랑 하나만 약속…… 아니지. 아니야. 그냥 내 조언을 하나만 들어 보는 건 어떻겠나, 타티아나.”

선생님은 정말 날 자유롭게 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묘한 감정을 느끼며 난 대답했다.

“……말씀해 주세요.”

“기한을 정해 놓고 해라.”

영리하지 못해서 그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자 구세프 선생님이 이어 설명했다.

“네가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는 건 겨울방학이 시작하고부터겠지. 그 후로 다음 학기까지 이어 갈 수도 있고. 하지만 방학 2주, 그사이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거기서 멈춰라.”

“그만두나요……?”

재작년 반년을 넘게 쏟아부었어도 자그마한 편린 몇 개를 찾는 데에 그쳤다. 그런데 겨우 2주 만에 무언가 할 수 있는 걸까?

숨이 답답해져서 멀거니 물었더니 구세프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학기에 영향이 가니까 그만두란 말이 아니다. 네가 할 수 있다면 2주라는 기간 안에 어느 정도는 해내야 한단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시 한 번 미뤄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고.”

원래 구세프 선생님은 한 곡의 완성에 10년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건 날 배려하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먼 미래까지 다시 미뤄 둬도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난 이번이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을 거라 생각하니까.

등이 서늘했다. 그래도 기한을 정해야 한다는 건 상당히 의미 있게 들렸다. 날짜가 정해진 무대를 앞두고 곡을 준비하는 건 연주자인 내게 있어 익숙한 일이었고, 그렇다면 지금 찾아내야 할 곡 역시 날짜를 정해 놓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의 조언은 합리적이었다. 내겐 무한정 시간이 있지 않다.

“잘 처신할게요.”

흔들리지 않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번 겨울방학을 내 이기적인 미련을 관철할 마지막 기회로 삼고, 다음은 없다고.

이번에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허락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포기하겠다고.

구세프 선생님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좋다. 네가 해 봐야 할 곡은 이 곡이다.”

그리고 내 앞에 곡의 이름이 던져졌고,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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